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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20:07:59

볼프강 폰 트립스

독일의 前 F1 드라이버
파일:Wolfgang von Trips.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볼프강 폰트립스
Wolfgang von Trips
본명 볼프강 베르게 폰트립스 백작 [1]
Wolfgang Graf Berghe von Trips
출생 1928년 5월 4일
독일 라인란트
국적 독일 파일:독일 국기.svg
사망 1961년 9월 10일 (향년 33세)
이탈리아 몬차
소속 드라이버
(F1)
페라리 (1956~1961)
정보 더 보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colbgcolor=#eeeeee,#191919> 출전 횟수 29경기
월드 챔피언 0회
그랑프리 우승 2회
포디움 6회
폴 포지션 1회
패스티스트 랩 0회
첫 경기 1956년 영국 그랑프리
첫 그랑프리 우승 1961년 네덜란드 그랑프리
마지막 그랑프리 우승 1961년 영국 그랑프리
마지막 경기 1961년 이탈리아 그랑프리 }}}

1. 개요2. 사망3. 기타

[clearfix]

1. 개요

독일의 전 포뮬러 1 드라이버. 1956년에 데뷔하여 1961년까지 활동하였다. '귀족 스포츠'로서의 포뮬러 1을 대표하는 인물로, 'von'[2]이 붙는 성씨에서 알 수 있듯이 정말로 독일 귀족이었다.

1956년 F1에 데뷔한 후 한두 경기씩 띄엄띄엄 출전하다가 1958년 마지막 6경기 중 5경기에 연달아 참여했고, 1960년부터 페라리 워크스 소속으로 풀 시즌 참가를 시작하게 된다. F1 말고도 F2와 타르가 플로리오 등의 경기에 출전하며 우승하기도 했고, 1960 F1 챔피언십 시즌에서 남들 다 리어 미드십으로 넘어가는 와중에 프론트 엔진이었던 디노 246으로 수 차례의 포인트 피니시를 기록하면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남겼으며, 1961년 페라리가 새로운 규정을 잘 해석하여 위닝 카를 내놓자 우승권에서 다투기 시작한다.

1961 챔피언십 시즌의 2라운드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첫 우승 컵을 들어올린 것을 시작으로 우승과 2위를 각각 2번 달성하였고, 팀메이트 필 힐과 챔피언 경쟁을 하였다. 7라운드 이탈리아 그랑프리를 앞두고 폰트립스는 33포인트, 힐은 29포인트로 폰트립스가 챔피언십을 리드하고 있었고, 경기 하나에 배정되는 포인트가 적었던 당시로서는 폰트립스의 우승 가능성이 매우 높게 점쳐지는 상황이었다.

2. 사망

그러나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레이스 도중 짐 클락과 충돌해 관중 무리를 전복된 채로 휩쓸면서 15명의 관중과 함께 사망하였다. 필 힐은 이 그랑프리에서 우승하여 34포인트를 만들었다. 페라리는 8라운드이자 최종전인 미국 그랑프리에 참전하지 않았고, 어쨌거나 폰트립스의 사망으로 힐이 1961년 월드 챔피언이 되었다. 관중과 연관된 사고가 적었던 F1에서 관중이 무려 15명이나 사망한 사고였고, 르망 참사의 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당시에 난리가 났었다. 클락은 이 일로 인해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 모두가 피할 수 없는 사고였다며 클락을 변호했지만 클락도 크게 동요했다고 한다.[3] 초창기 F1이 잃은 수많은 보석들 중 하나. 특히 챔피언을 눈앞에 두고 사망한 만큼 많이 아쉬운 드라이버이다.

3. 기타



[1] 더 긴 본명은 볼프강 알렉산더 알베르트 에두아르트 막시밀리안 베르게 폰트립스 제국백작(Wolfgang Alexander Albert Eduard Maximilian Reichsgraf Berghe von Trips)였다. '그라프'는 사람 이름이 아닌 백작을 뜻한다. [2] 영어의 of에 해당하는 단순 전치사이나, 성에 붙으면 주로 귀족이 된다. [3] 클락은 1960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앞에서 사고가 나 트랙 위에 널브러진 드라이버의 시체를 칠 뻔하고 간신히 피한 적도 있었는데 폰트립스와의 사고까지 겪게 되어 심적으로 좋지 않은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4] 부모님이 집 밖에서도 자식이 잘 먹고 다니길 위해 학교 근처 호텔에 매달 돈을 지불하고 아들이 배고플 때 밥을 먹을 수 있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