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2-12-27 20:43:59

박준기 중사 자살 미수 의혹사건

1. 개요2. 교통사고, 그리고 의문의 자살미수?3. 군 검찰 수사의 의혹4. 후일담5. 관련 기사6. 관련 문서

1. 개요

1994년에 발생한 사건. 사건의 양상에 많은 미스테리가 있는 미제 사건이다.

2. 교통사고, 그리고 의문의 자살미수?

1994년 12월 27일, 대한민국 육군 제2군단 사령부의 정보처 선임하사였던 박준기 중사(당시 24세, 이하 박중사)가 친구 김모씨와 만나 춘천시내에서 술을 마셨다. 이후 박중사는 27일 저녁 밤중에 음주 상태에서 친구 김모씨의 차량을 운전했다. 문제는 당시 박중사가 음주상태인데다가 무면허 상태였다는 것이다. 결국 5분만에 박중사가 운전하던 차량은 편도 2차선 도로의 철책을 들이받는 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박중사는 부상이 심하지 않은 반면, 친구 김모씨의 부상은 꽤 심각했던 터라 박중사는 차에서 내려 지나가던 화물트럭을 잡아 세우고 사고 현장에서 약 10~15분여 거리의 춘천성심병원으로 갔다.

이후 박중사는 엄청난 사건을 겪고 인생이 송두리째 뒤바뀌었다. 병원에 도착할 때만 해도 박중사는 별 부상이 없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박중사는 이후 기억을 잃고 11일만에 깨어났을 때는 상당한 중상을 입어버렸다. 박중사의 추가 상해를 놓고 박중사와 군 검찰의 주장이 서로 엇갈렸다.

우선 군 검찰측의 수사 결과에 의하면, 박중사가 음주사고를 일으킨 시점은 12월 27일 밤 10시 30분경이며 이후 병원에 친구와 도착한 후 정확치는 않지만 28일로 넘어가는 자정 무렵에 박중사가 갑자기 병원 10층에 있는 성당으로 올라가서 15m 아래로 투신자살을 기도했다는 것이다. 투신한 박중사를 병원 수위 홍모씨가 12시 30분경에 발견했고, 이후에 출동한 헌병대 수사요원들이 도착했다는 것이다.

박중사는 한동안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서 군 검찰의 수사 결과를 반박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 점차 기억이 돌아오자 군 검찰이 발표한 수사 결과와 자신이 기억해낸 바가 맞지 않는다고 깨달았다고 한다.

박중사가 다시 기억해낸 것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주장은 이렇다. 군 검찰의 수사결과와는 달리 박중사는 자신이 음주사고를 낸 시점을 12월 17일 저녁 7시 30분경으로 기억했고, 여차저차해서 병원에 도착한 시간은 약 저녁 7시 50분경이었다고 한다. 이후 박중사는 밤 9시 5분경에 112로 춘천경찰서에 음주사고를 신고했고, 9시 50분경에 춘천경찰서 최모 경위가 병원에 도착해 박중사를 만난 후 군 헌병대에 연락했다. 군 검찰 수사결과와는 달리 11시 20분경에 군 헌병대 수사관 손모 하사와 김모 중사가 병원에 도착했다.

경찰이 박중사의 신병을 군 헌병대에 이첩하여 박중사는 손모 하사와 함께 군 헌병대로 연행될 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김모 중사는 박중사를 군 차량이 있는 주차장이 아니라 병원 별관 쪽으로 데려갔다. 박중사가 이를 지적하자 갑자기 김모 중사의 태도가 돌변해 범죄자가 수사관에게 따지느냐며 발로 박중사의 명치를 걷어찼고, 이 때문에 박중사는 2~3 m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고 한다. 이 충격으로 박중사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는데, 박중사의 의식이 희미해지는 가운데 기억하는 바로는, 이때 소리를 들었는지 병원 수위인 홍모씨가 달려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김모 중사는 박중사가 발을 헛딛었다고 대답했는데 홍모씨가 이를 의사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고 하자, 김모 중사가 병원에서 난 사고니 당신도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대답한 것을 듣고 박중사는 의식을 잃었으며 이후 11일만에 깨어났을 때는 처음 교통사고 순간부터 모든 기억을 잃었다고 한다.

이후 박중사는 자신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 과정에서 한 프로그램에 출연해 최면요법을 받았다. 최면으로 되살린 이후 기억은 상당히 끔찍했다. 손모 하사와 김모 중사가 의식을 잃은 자신을 병원 밖으로 끌고나와 병원 앞 도로에 대자로 눕힌 다음, 어떤 차량을 이용해 자신을 치고 지나갔다고 기억해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증명할 만한 근거는 부족한 상황이라, 박중사는 돌아온 기억과 최면요법으로 알아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2002년에 재조사를 요청했지만, 초동수사에 문제가 없었다는 이유로 기각당했다. 이후 2006년에 이번에는 육군 수사단에 재조사를 요청했지만 이 역시 기각당했다. 이후 박중사는 2007년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자신의 사건을 탄원했다. 국민고충처리위원회가 조사해보니 사건 조사에 의문점이 있다고 판단해 국방부에 재조사를 권고했고, 2008년 국방부가 재조사에 나섰지만 초동수사에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3. 군 검찰 수사의 의혹

박중사는 1999년에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군 검찰의 수사기록을 받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군 검찰 수사기록은 상당히 부실했고, 결론을 내리는 근거와 논리도 상당히 허술했다.
군 검찰 수사에 의하면 박중사는 군 헌병대 수사요원들이 병원에 오기 전, 자신이 저지른 음주사고에 대한 죄책감과 불안감으로 성심병원 10층 성당에서 15미터 밑 지상으로 투신자살을 기도했다. 그러나 수사기록만 보면 과연 박중사가 자살을 기도했는지 분명하지가 않다는 것이 문제다. 우선 박중사가 투신하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없다. 물론 군 검찰 수사대로라면 자정쯤에 박중사가 투신자살을 기도했으니 밤중이라 목격자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병원은 24시간 운영되는 시설이다. 당연히 박중사가 투신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을 직접 본 사람은 없을지라도, 박중사가 떨어졌다는 시간에 당직의사나 간호사, 혹은 입원환자 중에서라도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사람은 당연히 나올 법한데도, 군 검찰 수사기록에는 이런 목격기록이 전혀 없어서 문제였다.

군 검찰 기록에서 유일하게 목격자라고 할 만한 인물로 지목한 사람이 바로 자살을 기도한 박중사를 발견했다는 당시 병원 수위 홍모씨다. 하지만 문제는 홍모씨의 진술도 분명치 않다는 점. 홍모씨의 진술서는 모든 게 추측이었다고 한다. 즉, 홍모씨 또한 박중사가 자살을 기도한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고, 단지 박중사를 발견한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진술이 추측성일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또한 군 검찰은 10층 창문에서 지문을 발견했고, 홍모씨가 박중사를 발견했다는 지점에서 혈흔도 찾아냈다고 밝혔으나 감식 결과는 전혀 없었다고 한다. 더욱이 이런 증거자료들의 사진도 당일 촬영된 것이 아니라고 드러나 부실수사 아니었냐는 지적이 나왔다.
군 검찰 수사에 의하면 구체적으로 박중사는 10층 창문을 열고 투신했는데, 이 병원의 10층 창문은 반개방형이라 손잡이를 잡고 열어도 부분적으로만 열렸다. 문제는 이 창문이 개방되는 길이었다. 군 검찰은 10층 창문이 개방되는 길이가 약 21cm라고 주장했다. 박중사가 21cm 열린 창문으로 투신자살을 기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박중사의 체격을 고려한다면 이는 말도 안 된다는 반론이 나온다. 박중사의 가슴둘레는 113cm로 상당히 큰 편이었는데, 이런 사람이 21cm 정도 열리는 창문 틈으로 투신을 기도할 수 있냐는 것.

창문이 열리는 길이의 문제는 사건의 중대한 쟁점이라 많은 논란이 일었다. 군 검찰의 당초 수사기록인 21cm와는 달리 2006년 육군 수사대의 조사로는 24cm, 2008년 국방부 재조사는 사건 당시의 병원 당직자가 30cm까지 열릴 수 있다고 한 진술을 근거로 투신자살을 기도하는데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2009년 춘천 경찰서의 조사로는 다시 21 cm로 측정되는 등 정확한 길이를 두고 논란이 끊이지 않는 상황. 그러나 2015년 한겨레 신문이 이 사건을 취재하면서 만난 춘천성심병원 영선실 근무자의 증언으로는, 당초 10층은 병실이었지만 창문이 열리는 길이가 커서 추락사고가 일어나자 이를 방지하기 위해 10 cm정도만 열리도록 고쳤으며, 일반 사무실은 20cm 정도 열리도록 했다고 한다. 증언자는 이런 구조 때문에 그 창문으로 투신을 기도하기에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군 검찰은 10층 창문과 박중사가 발견되었다는 3층 옥상간의 높이를 15m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사이의 높이가 더 높은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한겨레 신문이 이 사건을 취재하면서 직접 측정해본 결과는 무려 21m에 달했다. 한겨레 신문은 병원 건물에 쓰인 벽돌 한 개의 높이를 직접 측정한 뒤 이것을 기반으로 3층에서 10층까지 높이를 측정했는데, 19.5cm짜리 벽돌이 한 층당 17개씩 쓰였고, 층수가 6.5층이라 단순 계산하면 21.54m가 나온다는 것이다. 2007년 국민고충처리위원회의 조사로도 3층 옥상에서 10층까지의 높이는 약 22m로 나왔고 결국 사건 재조사 요구를 받은 국방부 검찰단도 추락 높이는 15m가 아닌 22m로 정정했다.

실제 추락 높이가 중요한 까닭은 박중사의 부상 정도와 깊은 연관이 있다. 94년 당시 박중사를 직접 진료했던 성심병원 의사는 부상 위치가 주로 하체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낮은 층에서 추락했으리라 판단했다고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조사에서 진술했다고 한다. 실제 국민고충처리위원회가 외상 의사들에게 받은 자문으로도 22m 정도 높이에서 추락했다면 당시 박중사가 입은 부상보다 더 심각했으리라고 했다. 박중사의 주장이 맞다면 박중사가 입은 부상이 과연 추락 때문인지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군 검찰과 박중사의 입장이 갈리는 것 중의 하나는 바로 박중사가 일으킨 음주운전 사고가 실제 일어난 시간이다. 이 시간대가 언제냐에 따라서 양측 중 누구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 갈리기 때문이다.

군 검찰은 박중사의 음주운전 사고가 일어난 시점을 밤 10시 30분여경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박중사와 그날 만났고 사고를 당한 친구 김모씨의 진술은 전혀 다르다. 김모씨는 음주운전 사고 시점을 오후 8시 30분 전으로 기억한다. 기억하는 근거는 사고가 나기 얼마 전에 집에서 김모씨의 어머니가 김모씨에게 삐삐를 쳤는데, 김모씨는 공중전화에 가서 어머니에게 연락해 일찍 들어가겠다고 했기 때문에 기억한다는 것. 김모씨의 어머니도 자신이 오후 7시에서 8시쯤에 아들에게 삐삐로 연락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이후 2009년 춘천경찰서가 이 사건을 수사했을 때 친구 김모씨의 진료기록을 확인해보니 오후 10시47분으로 기록되어서, 이를 근거로 김모씨가 병원에 온 시간이 오후 10시 47분이고, 사고가 일어난 시간은 오후 10시 30분이라는 군 검찰 수사결과가 더 타당성이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의료계에서는 진료기록에 오후 10시 47분으로 기록되었다고 이 시간을 내원시간으로 단정하기는 무리가 있다는 반론이 나왔다. 보통 의료기록은 환자의 처치가 다 이루어진 뒤에 기록하기가 보통이기 때문이다.
군 검찰은 박중사를 발견한 병원 수위 홍모씨의 진술을 바탕으로, 박중사가 10층에서 투신한 뒤 3층 옥상에서 발견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박중사를 발견한 사람이 홍모씨 외에도 한 사람이 더 있었다는 점이다. 바로 당시 성심병원의 당직의사였던 정모씨. 그런데 정모씨는 홍모씨와는 전혀 다른 진술을 했다. 홍모씨는 박중사가 10층에서 3층 옥상 바로 밑에서 발견했다고 진술했지만, 정모씨는 박중사가 10층 바로 밑에서 약 14 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고 진술한 것이다. 이 부분이 중요한 이유는 박중사가 정말 10층에서 투신했는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3층 옥상으로 옮겨졌는지 판단할 수 있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군 검찰에 따르면 헌병대 수사관들은 박중사가 자살을 기도하고 병원 수위 홍모시와 당직의사 정모씨에 의해 발견된 이후에 병원에 도착했기 때문에, 박중사와 직접 접촉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박중사는 경찰이 신병인계 관련서류를 가지러 간 사이에 신모 하사와 김모 중사와 30여 분 정도 대화를 나누었다고 주장했다. 박중사는 두 수사관의 외모와 체격, 그리고 수사관의 고향이 전라도 쪽이라는 것과 진급예정이라는 등 사항을 기억해냈다고 한다. 박중사의 진술이 구체적이므로 실제로 박중사가 두 수사관과 대면했고 대화도 나누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4. 후일담

박중사는 2015년 자신의 사건을 재조사해달라고 국회에 요청했다. 당시 야당(더불어민주당) 소속 김관영 의원과 진성준 의원이 박중사의 사연을 접하고 도와주었다고 한다. 진성준 의원은 국방위에서 한민구 당시 국방장관에게 재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한민구 장관은 공소시효가 지났지만 다른 민간기관과 확인하는것은 가능하다고 답변했지만, 이후 별다른 조치가 없었다고 한다.

물론 박중사의 주장은 자신의 기억과 최면요법으로 알아낸 사항이고 직접적으로 입증해줄 목격자나 증거가 부족하다. 하지만 사건에 많은 의혹들이 있고 군 검찰의 수사나 이후 군의 재조사가 이런 부분을 명쾌하게 해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건이 종결되었다고 말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게다가 군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박중사 사건을 조사하기보다는 오히려 박중사에게 불리하게 사건을 일방적으로 조사하고 결론을 내렸다는 주장도 나온다. 일례로 박중사의 친구 김모씨는 군 헌병대의 조사를 받으면서 박중사가 자살을 기도했다는 수사관의 말에 그 친구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진술했지만, 나중에 김모씨의 이 진술은 군 검찰의 수사기록에는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군의 수사에 대한 불신이 여전한 가운데 박중사의 자살미수 논란에 대해서 지금이라도 진상을 분명하게 밝혀서 군 수사의 신뢰성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5. 관련 기사

‘전직 중사’ 박준기의 돌아온 기억 “나는 자살을 기도하지 않았다”
헌병에 구타당해 정신잃었다는데 군은 자살기도 단정

6.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