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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2 18:25:53

박신

<colbgcolor=#999><colcolor=#fff> 박신
출생 1362년
사망 1444년
본관 운봉

1. 개요2. 생애

1. 개요

조선 전기에, 형조전서, 광주목사,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2. 생애

1385년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옮겨 사헌규정이 되었다. 이성계가 제군부를 둘 때 중랑장으로서 군부도사를 겸임했으며, 예조 · 형조의 정랑에 승진되었다. 1392년에 원종공신에 책록되고 봉상시소경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사헌시사 · 교주강릉도안렴사 · 감문위대장군 겸 사헌중승 등을 역임하였다.

1395년 형조도관으로서 공사노비에 대해 다른 도감을 두고 새로운 노비문서를 만들어 노비문제에 대한 쟁송을 없애려고 하였다. 1397년 간관으로서 변정도감의 속공한 노비로 방환한 노비의 수를 보충하자고 해 관철시켰다. 또한 1398년 관직을 줄이고 군자전이 적으므로 녹과전으로 정하지 말고 저축하자고 했으며, 또 아일에는 정전에서 조회를 받고 정무 볼 것을 상언하기도 하였다.

1399년에는 형조전서가 되었다가 1400년 태종이 즉위하자 승추부좌부승지로 기용되었다. 1401년 참찬관승지로서 경연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402년 대언 · 사헌부대사헌에 특배되고, 각도에 경차관을 파견해 곡식의 손실을 검사하자고 주청하였다. 다음 해에는 광주목사로 나아갔다가, 1404년 개성유후 · 승녕부부윤이 되고, 11월에는 참지의정부사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5년 노비변정도감의 제조, 다시 대사헌이 되었으나, 대사헌으로서 ‘전후가 맞지 않는 계문을 올렸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순군사에 하옥되었다. 그리고 아주로 귀양을 갔다. 1406년 귀양에서 풀려나 경외종편되었으며, 다시 동북면도순문찰리사로 기용되자 경성 · 경원에 무역소를 설치하자고 상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