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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97년 1월 6일[1] |
경상남도
밀양군 부내면 노하리 (현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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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73년 3월 26일 |
경상남도 밀양군 | |
상훈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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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박소종은 1897년 1월 6일 경상남도 밀양군 부내면 노하리(현 밀양시 내이동)에서 태어났다.그는 일찍이 동화학교를 졸업하고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1919년 3월 초 동화학교 교장 전홍표의 권유를 받아들여 윤세주, 윤치형, 윤보은, 정동찬(鄭銅燦), 김소지(金小池), 박만수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의논하고 윤세주의 집을 거점으로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들은 3월 13일 밀양 읍내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독립선언서를 밀양면사무소와 부북면사무소 등지에서 등사판을 몰래 가져와 아북산(衙北山)에서 밤을 새워 수백 매를 인쇄하는 한편, 수백 개의 태극기도 제작하였다. 거사 당일 오후 1시 30분경, 박소종 등은 윤세주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미리 준비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때 장터에는 수천의 군중이 운집하여 함께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행진을 벌였다.
밀양거리는 온통 만세군중의 시위로 수라장이 되었고, 부산에서 출동한 일본헌벙과 수비대는 주모자 체포에 무자비한 행동을 가하였다.
그러나 군경의 탄압으로 시위대는 강제 해산되었고, 그는 체포된 뒤 1919년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고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19년 9월 21일 출옥한 후에는 밀양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3년 3월 2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박소종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