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박두종(朴斗鍾) |
생몰 | 1904년 9월 28일 ~ 1967년 12월 6일 |
출생지 | 함경남도 홍원군 경포면 좌상동 |
사망지 | 인천광역시 |
매장지 | 국립서울현충원 212실 128호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박두종은 1904년 9월 28일 함경남도 홍원군 경포면 좌상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울에 상경해 기독청년회관 영어과에 재학하면서도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조선학생사회과학연구회에 가담해 공산주의 서적을 탐독했다. 그러던 1926년 4월 26일, 회원 80명과 함께 서울 종로구 세검정으로 야휴회를 가던 중 순종 황제가 붕어했다는 호외를 보고 제2의 3.1 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천진(李天鎭)·박하균(朴河鈞)·이병립(李炳立)· 이선호(李先鎬) 등과 함께 순종의 인산일인 6월 10일에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고 박하균과 함께 운동자금의 염출을 맡았다.1926년 6월 5일, 박두종 등 준비 책임자들은 산책을 가장하여 북아현동에 집결한 뒤 태극기 2백장과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 30여 장을 만들었다. 또한 인쇄기를 빌어 사직동의 이석훈(李錫薰) 하숙방에서 수만장의 격문을 인쇄했다. 그는 이 인쇄된 격문을 배부하는 임무를 맡았다. 거사 당일인 6월 10일, 그는 황금정(黃金町 : 지금의 을지로) 5정목에 있던 경성사범학교 앞에서 국장 행렬을 봉송하고 대여가 통과된 직후에 준비해온 격문과 태극기를 살포함과 동시에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했다. 그 직후 출동한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박두종은 6.10 만세 운동 학생 주동자 10여 명과 함께 기소되었고 1927년 4월 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인천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7년 12월 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박두종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2007년 국립서울현충원 212실 128호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