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고석
朴古石 | Park Go-seok |
|
<colbgcolor=#7a5543> 출생 | 1917년 2월 25일 |
평안남도
평양 (現 평양시) |
|
사망 | 2002년 5월 23일 (향년 85세) |
국적 | 대한민국 |
직업 | 화가, 영화 미술감독, 영화 제화 디자이너, 판화가, 조각가 |
학력 |
평안남도 평양 숭실중학교 (졸업) 니혼 고등상업학교 전문학사 니혼 대학교 예술학과 학사 |
배우자 | 김순자[1] |
자녀 | 3남 1녀[2]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화가. 강렬한 색채 대비와 두텁고 격정적인 붓 터치로, 토속적 생명력을 뿜어내는 산을 잘 그려내서 '산의 화가'로 불린다.2. 생애
박고석은 목사 집안의 아들로 평양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요셉이다. 평양 숭실중학교에 다닐 때 자신의 이름을 고석(古石)으로 개명했다.숭덕소학교와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1935년 일본에 건너가 1939년 니혼대학 예술학부를 졸업하였다. 박고석은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1940년에 대학 동창들로 구성된 ‘격조전(格調展)’에 참여하면서 화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1943년에는 도쿄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뒤 쇼치쿠(松竹) 영화사의 만화영화제작부에서 일했다. 한 10년 일본에 머무르며 초기 화풍을 다졌는데, 도쿄가 폭격을 당하면서 그 시절 작품들은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1945년 광복과 함께 평양으로 돌아왔으나 곧 서울로 내려와 서울타임스 기자를 거쳐 배화여고와 대광중고에서 미술교사를 담당하였다. 약혼녀 김순자와 결혼식을 잡은 날에 6.25 전쟁이 일어나서 무산되었고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해 부산공고 미술교사로 취직했다. 공동묘지 근처인 범일동에 자리잡고선, 부산공고의 서쪽 담벼락을 끼고 동천에 말뚝을 박아 10평도 채 안 되는 공간에 판잣집을 지었다. 부엌과 작업실 그리고 3명이 겨우 누울 수 있는 방이 전부였다. 하지만 판잣집이긴 했으나 목재는 고급이었고 거기다 흰색 페인트칠을 해서 어수선한 주변과 대비되어 고상한 아우라를 발산했다고 한다. 이 때 박고석은 국제시장에서 시계를 팔기도 하고 부인과 함께 카레라이스 장사를 하기도 했다. 엉뚱하게도 이중섭이 동업을 선언했는데, 며칠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가 갑자기 나타나선 카레라이스 서너 그릇을 먹고는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고 한다.
이 시절 부산은 당대의 예술인들의 집합지였다. 박고석은 동인 활동의 중심에 있었다. 이중섭·이봉상 등과 함께 광복동 르네상스 다방에서 열었던 ‘기조전(1952년)’은 피난 시기의 몇 안되는 그룹전으로 미술사에 기록됐다. 1956년 결성된 ‘모던아트협회’를 통해 유영국, 한묵, 황염수, 문신, 천경자 등과 교류했다.
전쟁이 끝나고 박고석은 서울로 올라와 1955년 정릉에 자리를 잡았다. 부산 피난 시절, 박고석과 삼총사를 이루었던 독신의 이중섭, 한묵이 이웃이었다. 북한산 청수장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를 따라 김병기, 김대현, 최정희, 박경리, 금수현 등 수많은 문인, 예술가들이 정릉에 집터를 잡았다. 이중섭이 죽자 화장된 유골은 3등분 되었다. 일부는 일본의 그의 부인에게로 또 일부는 미아리의 묘소로 갔다. 그리고 나머지는 박고석이 보관하다가 정릉에 수목장으로 묻었다.
박고석은 1950년대까지는 자연주의적 모티브에 야수주의, 표현주의 경향의 화풍을 드러내는 작품을 제작하였으나, 모던아트협회 참여를 계기로 1961~62년경에는 추상작품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곧 추상회화에 회의를 느끼며 한동안 작품을 중단하였다.
1967년 이봉상 등과 함께 ‘구상전(具象展)’을 창립하면서 다시 창작을 재개하였다. 이 무렵부터 산행을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산을 모티브로 한 작품을 제작하였다. 북한산, 설악산, 백양산, 지리산 등 전국의 명산을 여행하면서 산의 사계절을 그림으로 남겼다.1970~80년대에 그린 산 그림은 원근법을 무시한 공간, 두터운 유화물감의 질감, 힘과 탄력이 넘치는 필치, 강렬한 색채대비를 통해 산의 감동을 표현하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부드러운 필치로 잔잔한 여운이 감도는 소박한 풍경을 그렸다.
3. 작품
3.1. 범일동 풍경
3.2. 도봉산
3.3. 외설악
3.4. 쌍계사 길
4. 여담
- 그가 평생 남긴 유화는 300점 정도. 과묵한 성격에다가 감동이 오지 않으면 그림을 그리지 않는 스타일이다. 그를 오래 전부터 보아온 엄중구 샘터화랑 대표는 “그림 사겠다는 사람은 100명인데 그림은 열 점이 채 안돼 속 태우던 분”이라고 소개했다. 일찍이 박고석을 알아본 박명자 현대화랑 회장은 “집에 가 보면 팔아줄 그림은 안 걸려 있고 등산 장비만 잔뜩이었다”고.. #
- 그는 다방면에 재능이 많았는데, 1955년에는 홍성기(洪性麒)가 감독한 영화 《열애》로 영화 미술감독에 데뷔하였으며, 1967년에는 김수용(金洙容)이 감독한 영화 《 사격장의 아이들》로 영화 제화(題畵) 디자이너 데뷔하였고, 1970년 판화가로도 미술 분야에 등단하였으며, 1972년에는 조각가로도 등단하였다.
- 6.25전쟁이 벌어지기 이전에 숭실중 동기인 첼리스트 전봉초(1919~2002)와 함께 38선을 넘다가 군인들의 검문에 걸려 유치장에 갇힌 적이 있다. 유치장 속에서 박고석은 전봉초에게 사교댄스 스텝을 가르쳤다고.. 박고석은 과묵한 사나이로 알려져 있지만 늘 유쾌했고 매사에 긍정적이었다고 한다.
- 박고석과 이중섭은 술을 마시기도 하고 밤새도록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 등 붙어다녔다. 이중섭은 인근의 미군부대 쓰레기장에서 수거한 담뱃갑 은박지에다 그림을 그렸는데, 박고석의 부인인 김순자는 늦은 밤마다 이중섭과 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열이 받아서 이중섭이 그림을 그린 은지화를 모아다가 땔감으로 썼다고... ㄷㄷㄷ
- 박고석은 지독히 커피를 사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큰 주전자에 원두커피를 가득 넣어 하루 종일 마시는 스타일. 그림이 팔리면 쌀이나 연탄은 뒷전이고 우선 커피부터 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