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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7 06:53:34

바실리 필라토프

<colcolor=#000000> 로마노프 왕조의 후예
바실리 필라토프
Василий Филатов
파일: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webp
<colbgcolor=#F0FFFF> 이름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
(Василий Ксенофонтович Филатов)
출생 1907년?
러시아 제국 샤드린스크?
사망 1988년 (향년 81세)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아스트라한 이크리아노예
아버지 친부 불명[A]
양부 크세폰 필라토프
어머니 불명[A]
형제자매 불명[A]
배우자 리디아 쿠즈미니치나 클리멘코바
자녀 장남 올렉[4]
장녀 올가
차녀 이리나
삼녀 나데즈다
종교 정교회 ( 러시아 정교회)

1. 개요2. 생애3. 너무나도 수상한 선생님4. 반전5. 과연 누구의 자손인가?

[clearfix]

1. 개요

"바실리 필라토프", 본명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는 생전 본인이 러시아 혁명 당시 몰살당한 니콜라이 2세 가족의 마지막 생존자라고 주장하여 화제가 된 인물이다.

2. 생애

바실리 필라토프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드린스크의 정교회 성당에 남아있던 출생정보에 의하면 1907년생으로, 그가 본인이라 주장했던 알렉세이 황태자보다 약 3살 정도 어렸다.

바실리는 1921년, 아버지를 여의고 1922년부터 1928년까지 고아원 생활과 구두공 생활을 병행하다, 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그로즈니 교육학 연구소에 입학하였다가 튜멘 교육학 연구소로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그는 1936년에 졸업장을 받고 이세츠크의 중학교 중 한 곳에서 지리 교사로 여생을 이어가게 된다.

1953년, 그는 같은 학교의 수학 교사인 리디아 쿠즈미니치나 클리멘코바와 결혼했으며, 리디아와의 관계에서 슬하 4명의 자녀를 두었다.
1955년에 바실리 가족은 오렌부르크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바실리는 1967년 정년시기까지 교사로 있었다가, 은퇴 후 아내와 함께 아스트라한 이크리아노예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말년을 보내다 1988년 심부전으로 사망하였다.

3. 너무나도 수상한 선생님

바실리는 노동자 계급 출신으로 되어있었지만, 본인의 사학 지식과 악기 연주, 그리고 너무나도 고상한 교양 등, 노동자 계급 출신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는 것이 많았다고 한다.

1907년에 태어난 그는 공식적으로 알렉세이보다 3살이 어렸다. 세례성사 견진성사를 받았던 성당에 출생기록이 남아있었으므로, 나이가 거짓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일개 구두 제화공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오르간· 피아노· 하프시코드· 아코디언 등 여러 악기들을 연주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베토벤· 차이콥스키· 쇼팽 등 고전음악과 러시아의 민속음악· 오페라에도 조예가 깊었고, 러시아/역사, 특히 전쟁사에 박식해[5] 아이들에게 항상 자세히 이야기하곤 했으며, 독일어· 그리스어· 라틴어· 영어· 프랑스어 등 6개국어 이상을 구사했다. 또한 푸시킨· 체호프· 괴테를 비롯한 많은 작가들의 시를 외우고 있었다.

즉 노동자 계급으로 태어났다는 걸 생각하면 상식적으로 전혀 납득할 수 없는 매우 다방면의 교양을 갖추고 있었던 것. 저 수준의 교양을 갖추려면 최소한 엄청나게 부유한 집안의 자제 정도는 되어야 했다. 더구나 13세부터 구두 수선공으로 일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13세가 채 되기도 전에 저 정도의 학식을 갖출 정도로 교육을 받았다는 뜻이 된다. 이 정도 수준이면 상류층과 관계가 없기도 힘들다고 할 수 있다.

비록 필라토프가 혈우병 증세를 보이진 않았어도[6] 유전자 검사 결과가 일부 일치하는 것으로 나오자, 이는 거의 결정적인 증거로 취급되었다. 사실 일부 학자들도 이렇게나 알렉세이와 일치하는 점이 많았던 필라토프를 알렉세이라고 믿고 싶어 했었다. 실제로 1991년에 발굴된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시신에서도 아나스타시야와 알렉세이는 없었는데, 이것이 알렉세이 생존설의 한 증거이자 필라토프가 알렉세이라는 것을 입증해주는 간접적인 증거가 되기도 했다.

물론 필라토프를 알렉세이로 보기 어려운 근거도 상당히 있었다. 필라토프는 혈액 관련 질병이 있긴 했으나, 아내의 증언에 따르면 생전에 병원도 거의 가지 않았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병약했고 유배생활 중에 걷지도 못하게 되었던 알렉세이가, 갑자기 건강체가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필라토프는 "진짜 바실리 필라토프는 죽었고, 그 부모가 알렉세이 황태자였던 나를 거둬 자신들의 아들인 바실리 필라토프의 인생을 살게 했다"고 주장했지만 이 사실을 증명해줄 사람도 없었다. 갓난아기도 아니고 10대 초반의 남자아이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면 주변에서 이상하게 생각했을 법한데, 필라토프의 어린 시절 이웃들은 "그런 사실은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었다.

바실리 본인이 밝힌 회고에 따르면, 자신은 첫번째 사격 당시 운이 좋게도 아버지 니콜라이가 자신보다 앞에 있어 총을 맞지 않았으며, 기절하였다가 확인사살을 위해 유로프스키 일당이 로마노프 일가를 트럭으로 이송하던 와중, 운이 좋게도 트럭에서 깨어났다고 한다. [7]

어찌저찌 트럭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한 바실리는 수십미터를 기어가 스트레코틴 형제에게 전화를 걸었던 교환원에 의해 발견되었고 교환원은 깜짝 놀라 그를 코프챠키 마을에서 좀 떨어진 샤르타쉬역으로 데려갔다고 한다.

알렉산더 스트레코틴과, 안드레이 스트레코틴의 묵인으로 목숨을 건진 그는 도움을 받아 얼굴을 숨기기 위해 헝겊으로 붕대를 감은 다음 샤드린스크로 갔고 그곳에서 도움을 받았다며 바실리는 회상했다.

여기서 "미하일"이라는 사람은 바실리와 함께 토볼스크 시의 두브로브노예 마을로 갔다가 수르구트로 가서 1919년 말까지 치료와 보호를 위해 그를 한티인에게 의탁하였다고 한다.

바실리는 아들 올렉에게 이 시기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는데,
나는 그곳에서 약해진 몸을 요양하고, 치료를 받았어.
한티 사람과 만티 사람들은 나에게 신선한 생선, 사슴 고기를 줬는데, 그 사람들은 내가 앓고있는 야맹증이 나으려면 동물 눈을 먹는 것이 좋다고 강요했단다.
이 사람들은 나를 지극정성으로 치료해줬고, 동시에 치료를 위해 여러 야생 허브들과 그것을 달인 차도 줬었지.

바실리의 거처에 대해 어찌할까 고민하던 사람들은 우연히 샤드린스크에 "크세폰"이라는 구두공의 아들이 일찍 죽어 참척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실리의 출생 정보를 조작해 1907년생으로 만든 다음에 본인을 크세폰 필라토프의 원래 아들인 바실리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양자로 들였다고 한다.

다만 본인이 죽기 전 알렉세이 황태자라고 주장했을 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황태자를 사칭해 부귀영화를 누리려한다며 비난하였다.

4. 반전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황태자 사칭범일 것이라고 예상한 바실리 필라토프는, 사후 치러진 유전자 검사에서 놀랍게도 검사 결과 정말 로마노프 왕조의 후예가 맞았던 것으로 밝혀졌다.[8] 이 당시 발굴된 로마노프 왕가의 가매장 무덤에서 알렉세이만 발견되지 않았기에 살아남은 마지막 황손이었다며 메스컴에서 띄워주기에 이른다.

그러나 2007년, 러시아 혁명 90주년으로 다시 전개된 전수 조사 중, 알렉세이의 시신이 발견되었기에 또 다시 바실리의 정체는 미궁으로 빠진다. 분명히 왕가의 일원은 맞았지만, 황태자는 아니었고, 로마노프 왕가 내에 그를 아는 인원은 아무도 없게 된 것이다.

이에 수많은 러시아인들이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아들 올렉 필라토프 또한 아버지의 반전을 듣고서는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5. 과연 누구의 자손인가?

출신 계급에 비해 너무나도 많은 것을 알고 있던 점과, 결정적으로 왕가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점에 의해 그가 왕가 사람이 아닐 가능성은 거의 없다. 따라서 여러가지 설이 생기게 된다.
등등 여러가지가 있지만, 현재까지도 바실리 필라토프는 누구의 아들인지 밝혀진 바가 없다. 아직까지도 아들 올렉은 아버지의 친척들을 찾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힘을 쓰고 있으며, 본인의 성을 "로마노프"로 복원해주기를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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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본인은 니콜라이 2세와 헤센의 알릭스 공녀의 아들이었던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라 주장하였으나 2007년, 알렉세이의 시신이 확인되면서 본인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만 그가 정말로 로마노프 왕조의 후예라는 것이 DNA 전수 조사 이후로 밝혀졌기에 아버지가 니콜라이 2세가 아닐 뿐, 다른 왕족의 아들임은 확실시 되고 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니콜라이 2세의 동생인 미하일 대공의 혼외자라는 것. [A] [A] [4] 본명 올렉 바실리예비치 필라토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언론인으로 활동 중에 있으며, 아버지가 로마노프 왕가의 후예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연구하였다. [5] 알렉세이 역시 밀덕이었다. 러시아 제국군 군복을 맨날 입고 돌아다녔을 정도. [6] 다만 군대는 혈액 관련 질병과 좌 우 다리의 선천적 장애 때문에 면제받았다고 한다. [7] 당시 로마노프 일가를 이송 중이던 트럭은 피아트제 트럭이었는데, 워낙 힘이 안좋고 잔고장이 많아 가던 중 진흙탕에 발이 묶였다고. 이때 스트레코틴 형제들이 자신이 살아있던 것은 알고 있었으나, 약탈을 금지하려고 애쓰던 유로프스키에게 이 사실을 숨겼던 것 같다고 본인은 추가로 설명했다. [8] 우연의 일치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생판 남인 사람끼리 DNA 정보가 일치할 확률은 사실상 제로인 점을 감안하면 절대 우연이라고 볼 수가 없다. [9] 현재로서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