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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1 03:37:08

바르가스의 비극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상세3. 지원4. 대통령의 논란

1. 개요

Tragedia de Vargas

1999년 12월 14일부터 3일간 베네수엘라 바르가스[1]에 내린 폭우로 인해 일어난 참사.

2. 상세

당시 베네수엘라 북부 바르가스 주엔 3일 동안 강수량 910mm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폭우가 내렸다. 이는 무려 1년 평균 강수량에 달하는 양이다. 폭우가 계속해서 내리자 해발 2,000m를 넘는 산들이 비를 이기지 못했다. 토양 속 수분이 과포화되자 그대로 무너져 내렸고, 이러면서 일어난 엄청난 양의 산사태가 해안지대의 카르멘 데 우리아, 세로 그란데, 마쿠토 등의 마을을 그대로 덮쳤다. 한 곳은 최고 12m높이에 달하는 흙이 쌓이기도 했다.

마을 대부분이 평균 10m 높이의 흙과 돌더미에 묻혀 구조에 나선 군인과 민방위대원들은 구조를 사실상 포기한 채 이재민들에게 생필품을 나눠주는데 더 신경을 썼다. 산사태가 일어나지 않은 지역에도 언제 산사태가 일어날지 몰라 주민들에게 대피 명령이 내려졌다.

연이어지는 산사태로 최소 3만명이 사망했고, 20만명이 넘는 이재민이 나왔다. 재산피해는 베네수엘라 GDP의 2%인 20억 달러에 달했다. 이 재해는 1967년 300명의 사망자를 낸 지진의 기록을 넘어 베네수엘라에서 가장 많은 목숨을 앗아간 자연재해로 기록됐다.

3. 지원

당시 베네수엘라 대통령이었던 우고 차베스는 대대적인 '사회전쟁' 을 선포, 새로 집을 지어 이재민들을 정착할수 있게 하겠다 선언했다. 또한 우방국들에게 대대적인 지원을 요청하며 "국적과 상관 없이 모든 구조 인력을 받겠다." 고 말했다. 공항은 피해를 상대적으로 덜 입어 폭우가 끝나자마자 다시 운영을 했기에 해외의 원조를 쉽게 받을 수 있었다.

유엔총회는 188개 회원국과 유엔 산하단체, 국제 금융기관, 비정부기구들의 베네수엘라 수하복구에 개한 전폭적인 지원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는데, 당시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EU에서도 긴급이사회를 소집하 320만 유로를 기존의 긴급 구호기금과 함께 추가로 지원했다.

미국은 C-5 수송기 2대로 3만여명의 사람들에게 식수를 공급할수 있는 대형 정수기 2개와 21명의 정수 기술자, 의료품과 식료품을, 아르헨티나는 20톤 가량의 의약품과 식량, 쿠바는 의료진 수백명을 급파했다. 다른 중남미 국가들도 군수송기와 군함 등으로 생필품을 전달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희생자들의 영생과 이재민들의 정신적 안정을 위해 전세계 카톨릭 신도들이 기도해줄 것을 당부했다.

4. 대통령의 논란

미국 정부는 군부대와 헬기들을 서고 현장에 파견해 인명 구조를 벌였고, 추가로 해병대 450여명과 헤군 엔지니어를 파견할수 있다 하고 베네수엘라 국방장관도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얼마 안가 차베스는 갑자기 돌변해 미국의 추가 지원을 거절했다. 피델 카스트로와 통화 후 미국의 원조를 거절하라 지시했다. 외신들은 차베스가 반미 투사라는 정치적 이미지를 갖고 있는데, 미국의 도움을 받으면 이러한 정치적 이미지가 훼손돼서 그런게 아니냐 추측했다.

차베스는 미국의 도움을 거절한 후 야당의 비난에 시달리다 재난 수습 문제는 신경을 끄기로 했다. 해외에서 온 수천만 달러에 달하는 원조금도 이재민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참사 10년 후에도 이재민들이 노숙자로 지내기까지 했다. 당시 16세였던 후안 과이도는 가족과 함께 간신히 살아남았으나 집을 잃어 한동안 노숙자 생활을 해야 했고, 이후 반 차베스 학생운동에 뛰어들게 됐다.
[1] 라과이라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