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문응순(文應淳) |
이명 | 문월선(文月仙), 문응신(文應信) |
생몰 | 1900년 12월 4일 ~ ? |
출생지 | 황해도 해주군 해주읍 남본정 |
사망지 | 미상 |
추서 | 건국포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0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문응순은 1900년 12월 4일 황해도 해주군 해주읍 남본정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기생으로, 1919년 2월 김성일(金聖日)과 함께 고종의 인산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고종의 인산을 배관한 후 해주로 돌아왔다. 이후 3월 10일 해주에서도 만세시위가 벌어지자, 그녀는 3월 하순 김성일, 김용성(金用性), 문재민(文載敏), 운경(玉雲瓊) 등과 거사를 논의한 후 4월 1일에 실행하기로 했다. 김성일과 문응순이 직접 한글로 독립선언서를 지어 5천장을 인쇄하는 한편, 태극기를 손수 제작하여 준비를 마쳤다.1919년 4월 1일 오후 2시경, 문응순을 비롯한 해주 기생들은 남문 쪽을 향해 나가며 태극기를 흔들고 전단을 뿌리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소식을 듣고 동료 기생들을 비롯한 군중들이 모여들여 행렬은 3,000여 명에 달하였다. 이들 행렬은 재판소를 거쳐 동문으로 들어와 다시 종로로 향하였다. 이때 출동한 일제 경찰에 의해 문응순 등 주동자 5명은 잡혀 종로경찰서로 끌려갔다. 이들은 종로경찰서 앞에 이르자, 돌을 집어 유리창을 부수는 한편, 다시 만세를 부르는 의기를 보였다. 경찰서에서 이들은 심한 악형으로 온 몸이 멍이 들고, 화상을 입었다고 한다.
이후 그녀는 1919년 6월 26일 해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1919년 12월 28일에 출소했다.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문응순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