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리비아 왕국 제3대 총리 무스타파 아흐메드 벤 할림 مصطفى احمد بن حليم | Mustafa Ahmed Ben Hali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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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1년 1월 29일 |
이집트 술탄국 알렉산드리아 | |
사망 | 2021년 12월 7일 (향년 100세) |
아랍에미리트 | |
재임 기간 | 제3대 총리 |
1954년 4월 12일 ~ 1957년 5월 25일 | |
국적 |
[[리비아| ]][[틀:국기| ]][[틀:국기| ]], [[사우디아라비아| ]][[틀:국기| ]][[틀:국기| ]](1975~) |
직업 | 정치인 |
학력 | 알렉산드리아 대학교 (토목 공학 / 학사) |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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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
교통장관 외무장관 제3대 리비아 왕국 총리(1954~1957) 주프랑스 리비아 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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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비아의 정치인이자, 외교관.마지막으로 생존한 리비아 왕국의 총리.
2. 생애
리비아 독립운동가들과 협력한 혐의로 체포될 위기에 처한 아버지가 이집트로 도피하면서 그곳에서 태어났다.1946년 알렉산드리아에서 대학까지 마치고 이탈리아의 리비아 지배가 끝난 뒤인 1950년 리비아로 가게 되었다. 고국으로 돌아가 전후 복구를 돕다가 1954년 33세의 나이로 리비아의 총리가 되었다.
2.1. 정치인 시절
총리로 재직하는 동안 벵가지에 리비아 대학교와 리비아 중앙 은행의 설립을 주도했다. 또한 리비아에서 석유를 발견하게 된 리비아 석유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외교적으로는 친서방 정책을 펴서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아냈고, 소련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1957년 민주주의 확대와 관련해 이드리스 1세 국왕과 입장 차를 보여 사임했다. 다만 왕과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1958년부터 1960년까지는 주프랑스 리비아 대사로 지내면서 프랑스와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의 휴전 협상을 도왔다.
이후 트리폴리로 돌아와 제조업과 천연자원 분야의 벤처기업 설립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북아프리카 은행을 설립하여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
1964년 이드리스 왕의 요청으로 국가 개혁을 이끌었지만 기득권 세력의 방해로 실패했다.
2.2. 기나긴 망명생활과 귀국
1969년 무아마르 카다피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벤 할림은 가족들과 함께 스위스로 휴가 중이었다.리비아로 돌아갈 수 없던 그는 런던으로 갔다가 1970년 레바논 베이루트에 정착했다. 그러나 1973년 카다피의 납치 시도가 실패하자 가족을 런던으로 보냈다. 그 후에도 카다피에 의해 생명이 위협받았지만 다행히도 영국 정보국에 의해 번번히 저지되었다.
망명 때부터 파이살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이 그의 활동을 돕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 여권을 주었고, 1975년 사우디아라비아 국적을 받았다. 1980년에는 파흐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왕세자의 개인 고문을 맡았다.
2011년, 귀국하여 희생자들의 사진을 보는 벤 할림
2011년 카다피가 축출되면서 42년의 망명생활을 끝내고 리비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귀국할 때 살아있는 유일한 옛 왕정 시대의 총리로서 많은 환영을 받았다.
한편 귀국 당시에도 90세였고, 이후 10년을 더 살며 장수했다. 그러나 카다피 축출 이후 곧바로 시작된 내전으로 제대로 된 재건을 하지 못하는 조국을 보며 죽는 순간까지 마음이 편치 못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