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제학자, 정치인.20대 시절 미국에 유학하여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귀국 후 베이징대학 경제학과 교수가 되어 경제학 연구에 몰두하며 중국 사회의 병폐를 규탄했다. 중화민국 시기 난징정부 입법위원을 지냈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중앙재경위원회 부주임, 화둥군정위원회 부주임, 베이징대학 총장, 임민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1950년대에 산아제한을 기초로 한 '신인구론(新人口论)' 논문을 발표했다가 반우파 투쟁 때 우파로 간주되어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그가 내놓았던 신 인구론은 1970년대 초반에 관료들에게 재평가되며 2자녀 정책의 기본 이론이 되었으며, 1980년부터 시행된 계획생육정책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2. 생애
2.1. 초기 일생
마인추는 1882년 6월 24일 저장성 소흥부 성저우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의 출신에 대해 회족 출신이라는 설과 한족 출신이라는 설이 대립하고 있다. 다만 마인추의 고조, 증조 때 소흥부의 대상인이 되어 대대로 부유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마인초의 조부모와 사촌 20명, 아버지의 형제 15명이 대부분 지방 향시에 급제해 소흥부의 유지로서 탄탄한 기반을 다졌다. 이렇듯 사회적으로 명망높고 부유한 집안에서 평탄한 어린 시절을 보닌 마인추는 17살 때 소흥현 학당을 졸업한 후 상하이로 가서 한 교회 학교에서 서구의 학문을 공부했다.1904년 학교를 졸업한 마인추는 천진 북양대학교에서 야금학(冶金學)을 공부했다. 북양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07년, 그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때 그는 중국의 야금 기술수준이 낮아 야금학으로는 장래가 밝지 않다고 판단하고 예일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해 1910년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그는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에 진학하여 1914년 경제학 및 철학 복수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때 그가 제출한 졸업논문 <뉴욕시의 재정>은 학계의 호평을 받았고 컬럼비아대 학부 1학년 교과서로 채택되기도 했다.
1915년 중국으로 귀국한 마인추는 그해 9월 베이징대학 총장 차이위안페이(蔡元培)의 초빙을 받고 베이징대학 경제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1917년, 그는 베이징대학교 경제연구소 주임을 역임했다. 그는 이 시기에 발발한 러시아 혁명을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중국 공산당 창립 멤버인 리다자오와 친한 친구가 되었다. 1918년 10월, 대학 평의원직을 맡았고 이듬해에 베이징대학교 교무장에 당선되었다.그러던 중 5.4 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학생들을 적극 지지했고 당국이 학생들을 체포하자 교섭을 통해 그들을 석방시켰다.
2.2. 중화민국 시기
1927년 3월, 베이징을 장악한 장쭤린이 베이징대학을 폐쇄했다. 이에 차이위안페이는 항저우로 내려가 국민정부에 들어가서 저장성 임시 정치회의 위원 겸 주석직을 맡았다. 차이위안페이는 마인추 등을 초빙해 저장성 건설에 참여시켰다. 마인추는 금연위원회 위원을 맡아 아편 단속 업무에 종사했으며 농민은행 창설을 준비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장징장(张静江)이 저장성 정부위원을 맡았고, 차이위안페이, 마인추 등 베이징대 교수 출신 인사들은 저장성 정부 직책에서 쫓겨났다. 이후 마인추는 항저우 재무학교 교수로 일하다가 상하이 저장성 흥업은행 총계감사를 맡았다.1928년 10월, 마인추는 국민정부 입법원 입법위원이 되었고 이듬해 입법원 경제위원장에 이어 재정위원장에 선출되었다. 또한 난징 국립 중앙대, 금릉대, 상하이 국립 교통대 경제학과 교수를 겸임했다. 그러던 1931년 만주사변이 벌어지자, 마인추는 장제스의 무저항 정책을 비판했다. 그리고 1934년에는 입법원 회의에서 인플레이션 심화와 대외금융정책의 모순 문제를 두고 공상회 재정부 장관 쿵상시(孔祥熙)를 맹비난했다.
중일전쟁 발발 후인 1939년, 마인추는 충칭대 교수 겸 상업 학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항일운동에 가담해 각종 평론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4대가족을 비롯한 부패 고관들의 전횡에 분노해 고위 공작들에 대해 임시 재산세를 부과하고 그들의 부패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러자 국민정부는 1941년 12월 마인추를 전격 체포해 구이저우 및 장시성 교도소에 구금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국민당은 사방에서 비난을 받았고 결국 1942년 8월 마인추를 석방했다. 이후 마인추는 당국의 감시로 충칭 가락산에 가택연금을 당해 언론 활동에 제약을 받았고, 그 동안 경제학개론, 통화신설 등의 전문 저서를 발간했다.
1944년 12월, 마인추는 국민참정회의 결정으로 언론활동의 자유를 되찾았다. 이후 중일전쟁이 끝난 뒤 베이징대학, 난징 중앙대학, 상하이 교통대, 충칭대, 저장대학을 거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이 시기에도 4대가문의 관료 자본주의를 계속 반대했으며 국민정부의 부정부패를 비판했다. 그러던 중 리궁푸가 국민당 특무에게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마인추는 분노하여 유서를 써 학생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난징 중앙대 연단에 서서 국민정부의 독재를 비판하고 물가가 치솟아 국민들이 고통받고있는 상황에서 임시세를 부과해 국민들의 고혈을 짜내고 관료들은 부패하다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장제스는 마인추의 이같은 발언에 분노했고 그를 "공산당의 첩자", "이적분자"로 간주했다. 결국 마인추는 체포되어 수년간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공산당 비밀조직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1948년 말 홍콩을 경유하여 베이징으로 건너가 공산당의 신중국 건설계획에 참여했다.
2.3.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1949년 8월 저장대 학장으로 부임한 마인추는 그해 9월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전체회의에 참석해 중앙인민정부위원, 재정위 부주임,화둥 군정위원회 부주석을 역임했다. 1951년 5월엔 베이징대학 총장에 임명되었으며, 제12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 제1~5회 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위원 및 제2,4,5회 상무위원을 역임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초기, 마인추는 물가를 안정시키고 인플레이션을 막는 데 공헌했다.1953년, 중화인민공화국은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중국 인구가 총 6억 193만 8035명이며 매년 인구 증가율은 20‰에 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마인추는 이 인구조사가 표본 조사방법이기 때문에 출생신고 횟수에서 사망신고 횟수을 뺀 순증가율로 인구 증가율을 계산했다고 봤다. 그는 이러한 방식은 중국 전체의 인구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고 생각했으며, 상하이 만의 순증가율이 39‰인데 중국의 인구 증가율이 20 ‰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지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후 마인추는 3년간 연구해 중국의 인구 증가율은 매년 22‰가 넘으며 어떤 곳은 심지어 30‰에 이를 정도로 매우 높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는 이렇게 인구가 계속 늘어나면 50년 후에는 중국의 인구는 26억명에 달하게 될 것이며, 사람이 많고 땅이 적어 밥 먹는 것조차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봤다. 그는 자신의 연구 성과를 <인구통제와 과학연구>라는 논문으로 정리하고 1955년 7월 제1차 전국인민대표대회 2차 회의에서 제출했다. 마인추는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대표들은 내 견해에 동의하지 않고 내가 말하는 것이 맬서스 트랩과 유사하다고 생각하지만, 내 주장은 이와는 다르다. 나는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모두 선의로 발언한 것이라 생각하고 스스로 이 연설문을 회수하고 시기가 무르익으면 다시 대회에 제출하겠다."
1955년 9월, 저우언라이 총리는 중국 공산당 제8차 전국대표대회 보고에서 "여성과 어린이를 보호하고 후손을 잘 교육하고 소수민족의 건강과 번영을 위해 출산을 적절히 억제하는 것에 찬성한다."고 고 밝혔다. 마인추는 저우언라이의 발언에 기뻐했고 곧 인구통제 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1957년 2월 최고 국무회의 11차 확대회의에서, 마인추는 "우리의 사회주의는 계획경제이며, 인구를 계획경제에 포함시키지 않으면 계획을 실행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마오쩌둥은 그의 발언을 듣고 크게 칭찬했다.
"인구가 계획대로 생산될 수 있는지 여부를 따지는 것은 괜찮은 사상이다. 그가 아주 잘 말했다. 나와 그는 동지로, 예전에 다른 사람들이 그의 의견을 백화제방(百花齐放)하지 않고 거세게 반대했지만, 그는 하고 싶은 말을 다했다.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한 요구 사항을 가지고 있으며, 도시와 농촌 사람들은이 요구 사항을 가지고 있다. 요구 사항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또한 마오쩌둥은 출산을 적극 장려하자고 주장하던 사오리쯔(邵力子)가 마인추 옆에 앉아 마인추에 대한 지지를 표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걸 주목하며 빙긋 웃으며 "사오 선생, 두 분께서 함께 앉으시지요."라고 말했다. 마인추와 사오리쯔는 마오쩌둥의 말에 서로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마인추는 자신의 의견이 공산당에게 높이 평가받아 출산통제정책을 실시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사회적으로 매장되고 만다.
2.4. 반우파투쟁의 희생양
1957년 3월, 사오리쯔는 전국 정치협상회의 제2기 제3차 회의에서 출산계획과 관련해 장문의 발언을 했다. 그는 현대인들은 생활, 학습, 업무 등에서 모두 계획이 있으며, 출산에 있어서도 반드시 계획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법령이나 권력으로 낙태를 제한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며 혼인법 제4조 '남20세, 여18세, 결혼 시작 및 결혼' 규정을 개정해 결혼 연령을 높이는 방안을 제안했다. 또한 지속적인 피임수술을 제한하지 말고, 농촌에 대한 절육 사업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자고 주장하였다. 마인추는 사오리쯔의 발언을 적극 지지했지만 낙태는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부부가 아이를 둘만 낳아서 두 아이밖에 없는 부모에게는 장려금을 지급하고 두 아이를 초과한 부모는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가장 좋다."
4월 27일, 마인추는 1949년 이후 처음으로 베이징대학 대강당에서 인구문제를 강연했다. 그는 강연에서 몇 년 동안의 조사 연구의 결과를 설명했다.
"해방 후 여러 가지 조건이 좋아지고 인구의 증가가 과거에 비해 빨라졌다. 최근 몇 년 동안 인구 증가율은 30‰에 달했는데, 아마도 더 높을 것이다.사람이 많고 땅도 적은 모순 때문에, 중국이 다른 사람을 침략하려 할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을 침략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나를 침략하지 않게 하려면, 인구를 통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오쩌둥은 그의 이같은 발언에 불쾌감을 드러내며 마인추에게 다시는 이런 말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마인추 역시 자신이 지나쳤다고 여기고 베이징대 캠퍼스에 대자보를 붙이고 공개적으로 자아비판했다. 그리고 1957년 6월, 마인추는 제4차 회의에서 인구통제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10개 측면에서 제시했다. 그러나 이 때는 반우파 투쟁이 시작된 시기였다. 그는 곧 자신의 <신인구이론>이 당에 대한 우파의 공격으로 간주되어 맹비난을 받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몇달 전까지만 해도 마오쩌둥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거늘 어째서 오늘에 이르러서는 '우파의 공격'으로 간주된단 말인가?
사실 마오쩌둥은 인구통제정책이 다소 좋은 점이 있다는 걸 인정했지만 내심 인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대약진운동을 계획할 무렵, 마오쩌둥은 서구에 비해 기술 수준이 낮은 중국에서 가능한 짧은 시기에 경제 발전을 이루려면 중국의 압도적인 노동력을 동원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그는 "지금보니 인구가 십억여명 이상 늘어나도 괜찮다."라고 말하며 인구통제 자체를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마오쩌둥의 의중을 읽은 천보다는 베이징대학 60주년 경축대회에서 "맬서스의 <인구론>을 검열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류사오치는 중국 공산당 8기 2차 회의에서 마인추를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인구통제사상에 대해 비판했다. 7월 9일, 마오쩌둥은 사오리쯔, 천보다, 황옌페이, 장스자오(章士钊), 리지선(李济深), 장즈중 등 당외 인사들을 불러 대약진운동에 대한 그들의 의견을 들었다. 우파라는 비난을 받고 있던 마인추를 걱정한 사오리쯔는 인구를 통제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마오쩌둥에게 시간을 갖고 마인추를 지지해줄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냉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현재 중국인구는 8억명이 채 되지 않으며 인구문제는 아직 심각하지 않다. 출산은 계속 늘려야 한다."
한편, 마인추는 자신에 가해지는 비판이 부당하며 자신의 이론이 옳다고 여기고 1957년 5월 9일과 7월 24일부터 31일까지 <광명일보>에 "나의 재담균형 이론 중 '빙빙전(团团转)'이론을 재론하자"와 "재담균형론과 빙빙전"을 개재했다. 하지만 마인추도 자신의 이론이 완전무결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8월부터는 여러차례 외지로 나가 자신의 이론을 확인하고 보완하기 위해 현지조사를 실시했다.
1958년 1월, 마인추는 "나의 경제이론, 찰학적 사고 및 정치적 입장"을 출판했다. 이후 <계획경제>신문은 마인추의 경제이론에 대해 토의하는 글을 발표했고, 경제연구와 교수연구팀은 평론을 발간했다. 1958년 4월 19일, 민주당파가 후원하는 <광명일보>는 새로 개설된 <독서>란 제3기에 <베이징 대학의 대자보>을 선정했다. 이때 한가진(韓佳辰)의 <'빙빙전적 연계'는 유물변증법적 정치입장이 아니다>라는 글을 실었다. 또한 중국혁명사교연실의 저우자번(周家本)은 <마인추의 인구론을 평함>이라는 대자보를 게재해 마인추가 반변증법적 이론을 제시해 공산주의 이론을 손상시켰다고 비난했다. 이리하여 본격적인 마인추 비난의 서막이 올랐다.
6월 1일, 광명일보는 '학문동태'를 다룬 기사를 실어 "학계에서는 마인추의 논문에 대해 부르주아 사상이라는 비판을 퍼붓고 있다"며 마인추에게 비판을 가했다. 6월 6일, 인민일보도 "우리나라 인구와 일자리 문제" 기사를 실어 출산 통제를 주장한 마인추를 맹비난했다. 11월 29일, 광명일보는 베이징대 경제학과의 마인추 경제사상팀에 대해 "자산계급 학술사상을 철저히 바판한다"는 제목의 3편의 비판 기사를 게재했다. 이후 광명일보는 1958년 11월까지 총 37건의 마인추 비판 기사를 게재했고 다른 중국 신문, 학술지 등에서는 30건의 마인추 비판글을 게재해 총 67편에 달하는 비판글이 쏟아졌다. 이 비판글들은 한 목소리로 마인추의 신인구론이 맬서스 트랩에서 비롯된 것이며,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의심하고 인민대중을 멸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비난했다.
1959년 루산회의 후, 전국에서 우파에 대한 공세가 개시되었다. 이때 저우언라이는 특별히 마인추를 불러 너무 고집부리지 말고 대세에 맞게 반성글을 쓰라고 권했다. 그러나 마인추는 여전히 자신에게 가해지는 모든 비난이 부당하다고 여기고 <신건설> 잡지 편집부에게 자신의 주장을 변호하는 글을 보냈다. <신건설> 잡지 편집부는 마인추의 원고를 감히 멋대로 게재하지 않고 중국 공산당 중앙선전부와 중앙이론팀에 보내 심사하게 했다. 이때 중앙 이론 소조장을 맡았던 캉성은 마인추의 글에서 한 구절에 주목했다.
"나는 거의 80 세이지만, 아직 정정하다. 나는 단 하나의 말이다. 나는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다. 나는 비합리적으로 굴복시키기 위해 나를 협박하는 비평가들에게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캉성은 이것을 꼬투리잡아 마인추를 숙청하기로 결심했다. 1958년 10월 24일, 캉성은 이론계와 관련 신문 관계자를 소집하여 회의를 열어, 마인추에게 전면적인 비판을 가했다.
"마인추가 '신건설'의 문장을 선물했는데, 나는 그가 흑심을 감추고 관점을 바꿀까 봐 걱정됐다. 하지만 지금 확인해보니, 그의 관점은 드러나 있고, 흑심이 있었다..인민일보는 마인추가 과거 '명명천지'에 발표했던 문장을 제대로 비판하지못했고, 정규전도 없이 게릴라전만 치렀다.이제 그가 도전했으니 응전하라."
그러면서도 캉성은 <신건설>에게 마인추의 글을 게재하게 하면서 그가 자신을 제거하려는 당국의 결정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비판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그리하여 11월 초 <신건설> 전문에 마인추의 글이 실렸다. 그로부터 한달 후인 12월 초, 캉성은 대대적인 마인추 비판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그는 중앙 이론 소조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마인추는 우파의 대표로, 그의 경제 이론을 살펴보는데 좀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그를 엉터리로 비판하지 마라. 그리고 마인추가 지금 베이징대 총장을 맡고 있지 않은가? 비판이 끝나면 다른 사람으로 교체할 준비를 해야 한다."
이후 캉성은 베이징대 학생들을 지도해 마인추를 타도하는 운동을 전개하게 했다. 베이징대 캠퍼스에서 수많은 대자보가 붙여졌고 마인추를 향한 공격은 점차 인격모독으로 이어졌다. 학교 당국자 한핑징(韓苹卿)은 한 대회에서 마오추가 거대한 토지와 재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토지개혁에 반대했고 뤄룽지, 장보쥔, 장나이치 등 '대우파'와 손잡았다고 주장했다. 참석자들은 한핑징의 '폭로'에 분노했고 마인추는 참가자들에게 포위되어 온갖 구타와 언어폭력을 당했다.
이런 끔찍한 상황에 직면한 마인추는 1960년 1월 12일 혈압이 190으로 올라가는 바람에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그는 다음날 베이징대학 교장직에서 물러났고 3월 28일 국무원으로부터 베이징대학 총장직에서 해임되었다는 사실을 통보받았다.
2.5. 말년
마인추는 베이징대 총장에서 물러난 후에도 여전히 제2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962년 1월 저장성 지선군을 방문하던 도중 중상을 입었고 다리가 움직이는 걸 불편해 했으며 페렴을 검진받았다. 1963년, 그는 제2차 전국인맨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직에서 해임되었다. 그후 그는 농촌에 살면서 중국 농업에 대한 몇가지 책을 썼다. 1965년, 그는 다리가 마비되어 항상 가마를 타고 가야 했다. 그래도 1965년 8월 7일 저우언라이가 주재한 다과회에 참석했고 같은 해 쑨원 탄생 100주년 기념 준비위원회가발족했을 때 위원으로 활동했다.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마인추는 종종 우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규탄되었지만 저우언라이가 적극 보호해준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72년 직장암에 걸리자, 저우언라이는 톈진시 인민병원에 그를 옮겨서 90세인 마인추에게 직장암 절제 수술을 실시하게 했다. 수술 후 마인추는 하반신이 마비되어 아예 움직이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1976년, 저우언라이 장례식에 참석한 그는 1977년 5월 1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회의에 참석함으로서 1960년 이후 17년만에 공개적인 활동을 재개했다. 1978년 초엔 전국정협 상무위원에 배치되었으며 전국정협대회 집행위원장 중 한 명으로서 직무를 맡았다. 1979년 9월, 반역 후 북경대학 명예총장을 역임하였으며, 제5회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에 재선되었다.1981년 2월 27일 중국인구학회 명예회장에 당선되고, 1981년 3월 29일 중국경제학단체연합회의 제1차 이사회 고문으로 선출되었다.
1982년 5월 10일, 마인추는 베이징에서 병사했다. 향년 99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