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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3 00:40:13

리영호(1910)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한국 독립운동가이자 북한의 군인, 정치인.

2. 생애

1910년 7월 4일, 함경북도 경성군의 빈농가에서 태어났다. 중국 길림성 요하현 신흥동 사립소학교를 다녔으며 소학교 졸업 이후 1921년부터는 부모를 도와 농사를 지었으나 1932년 6월부터 중국공산당 영도 하의 항일운동에 투신했다. 1933년 7월 공청구위원회 비서, 당지부 비서로 일하다가 1935년 2월, 중공중앙의 결정에 따라 요하에 요하현위와 호림현위를 하강특위로 개조하였는데, 이때 특위 연락원에 임명되었다. 1935년 11월, 7군 산하 7단 정치위원으로 승진하였고, 1940년 4월, 7군 산하 2대대 정치위원이 되었다. 1940년 12월 북야영 당임시위원회 선전위원이 되었으며 소련으로 피신했다. 1941년 6월, 당 적극분자 회의를 개최, 7월에 20명을 이끌고 북만주 침투작전을 벌렸으며 88여단 산하 제3영 제5련 부련장이 되었다.

해방 후인 1945년 9월, 귀국하여 황해도 해주에 파견, 항일유격대 집단의 중앙지도부 구성 이후 석산, 전창철과 함께 함경남도 소조를 맡아 시군의 당지역 조직에 나섰고 12월에 해주시당 위원장에 이명되었다. 1946년 8월 보안간부 훈련소 소장에 임명, 조선인민군이 창설된 후 리청송의 2사단 산하 연대장이 되었다. 1948년 즈음에 소련 유학을 다녀왔으며 이때 박헌영 지지파들과 충돌한 만세사건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1949년 2월 7일, 방학세, 오백룡 등과 함께 국기훈장 2급을 수여받았다. 1950년 10월, 조선인민군 3사단장이 되었다. 1950년 6.25 전쟁에 참전하여 서울을 공격했다. 공으로 근위사단 칭호를 받고 낙동강까지 내려갔으나 9월에 유엔군의 반격으로 개박살이 났다. 1950년 10월에 7군단장으로 승진했다. 종전 이후 1953년 7월, 민족보위성 부상 겸 해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해군사령관으로 재임하다가 1957년 5월 11일, 병환을 이유로 소환된 최일의 뒤를 이어 주중 북한 대사로 파견, 6월에 마오쩌둥에게 신임장을 봉정하였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63년 12월에 당중앙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정확한 시점은 확인해야 하지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만약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최고인민회의 회의에서만 선출한다고 보수적으로 추정할 시에는 1966년 4월의 3기 5차 회의에서 선출된 것으로 보인다.

1966년 10월, 2차 당대표자회에서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했다. 1967년 12월 4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재선되었다. 1968년 3월, 홍명희 장의위원, 1969년 8월, 리주연 장의위원을 지냈다. 하지만 1969년 8월 이후로 공개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더니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서 탈락하고 소식이 끊어졌다.

1978년 2월 14일에 사망했으나 부고도 발표하지 않는 등 대접이 박하다가 나중에 재평가됐는지 이후 애국렬사릉이 안장되자 시신이 항일혁명렬사 직함으로 그곳에 안장되었다. 아내 류경희 역시 합장되었다. 빨치산 출신인데도 혁명열사릉이 아닌 애국열사릉에 묻힌 것은 숙청됐던 것의 영향으로 보인다. 물론 애국열사릉에조차 묻히지 못하고 사망년도도 불명인 김광협, 김창봉, 허봉학, 김동규 등보다는 좋은 대접을 받았다.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