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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7 14:37:54

루카스 노타라스

1. 개요2. 상세

1. 개요

Λουκάς Νοταράς
( 1402년 4월 5일 ~ 1453년 6월 3일)

콘스탄티노스 11세 재위기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메가스 둑스.

2. 상세

"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라틴인의 주교관을 보느니 술탄 터번을 보겠다"는 말로 유명하다. 그 말이 씨가 됐는지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되었고 현재까지도 계속 튀르키예의 영토로 남아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유명한 말과는 별개로 노타라스는 실제로는 교황과의 동맹을 맺어 서유럽의 원군을 얻고자 분투했고, 실제 동맹을 성사시켰다. 이 동맹은 동방교회가 교황 수위권에 복종하는 것이 조건이었으나, 이 당시 교황에게 서유럽 각국에서 과거 십자군과 같은 거대 병력을 동원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도와줄 만한 정치적 힘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 결국 제노바 등에서 소소한 원군만이 오는 데 그쳤다.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당시 세명의 아들 중 막내 아들을 제외한 두 아들이 전사했다.

그의 최후에는 서로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당대 학자이자 성직자였던 마카리오스 멜리시노스의 기록에 따르면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메흐메트 2세는 처음에는 루카스 노타라스를 좋게 대우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메흐메트 2세는 루카스 노타라스의 아들인 14살짜리 막내 아들 야코보스 노타라스가 용모가 빼어난 미소년이라는 말을 듣고 "그대의 아들을 하렘으로 데려오라"고 명했는데 루카스 노타라스가 이를 거부하자 화가난 메흐메트 2세가 루카스 노타라스와 그의 사위, 막내 아들을 처형했다는 것이다. 이때 막내 아들은 처형당하지 않고 하렘으로 보내졌다가 20대 초반에 이탈리아로 탈출했다는 전승도 있다.
"내 아이들아, 용기를 잃지 말거라. 우리는 우리가 주인인 이 도시에서 넘치는 부귀와 경이로운 영광을 누리다가 잠깐 사이에 모든 것을 잃었다. 목숨만이 남았지만 그 또한 영원할 수 없다. 때늦은 후회지만 황제 폐하와 우리에게 소중했던 사람들과 함께 우리도 그 날 죽어야 마땅했다. 더는 죄짓지 말자. 악마가 활을 우리에게 겨누고 있다. 사랑하는 로마인의 아들들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처형 당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의 이름으로, 우리 또한 죽어 그분에게로 가자.”

노타라스가 처형 직전 막내 아들과 사위에게 한 유언이라고 하며 자신이 먼저 처형 당하면 그것을 본 막내 아들이 마음이 약해져 술탄의 성적 욕망에 굴복하는 '잘못된 선택'을 할까봐 메흐메트 2세에게 아들을 먼저 처형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한참 전에 딸과 누이를 베네치아로 피신 보냈다는 것이 빌미가 되었다거나, 정복자로 입성한 메흐메트 앞에 국고에서 빼내 온 금은보화를 싸 들고 나타났는데 "그런 게 있었으면 방위비로 썼어야지. 너 같은 놈을 두고 반역자라고 하는 거다." 라는 이유로 처형되었다고도 한다.

공방전 당시 병에 걸려 있던 부인은 노타라스의 처형 후 노예로 끌려가다가 사망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전에 베네치아 공화국으로 피신한 딸 안나 노타라스는 베네치아에서 동로마인 망명지구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또 다른 딸들인 헬레나 노타라스와 테오도라 노타라스도 망명에 성공했다.

튀르키예 역사가 할릴 이난즉은 메흐메트 2세 동성애 혹은 양성애 성향이 있었다는 기록은 어딜 찾아봐도 없다며 메흐메트 2세가 성적인 욕망 때문에 루카스 노타라스와 노타라스의 막내 아들을 처형했다는 설을 부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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