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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2 09:08:33

루이 블레리오


<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루이 블레리오
Louis Blériot
파일:Louis_Bleriot.jpg
본명 루이 샤를 조제프 블레리오
Louis Charles Joseph Blériot
출생 1872년 7월 1일
프랑스 캉브레
사망 1936년 8월 1일 (향년 64세)
프랑스 파리
국적
[[프랑스|
파일:프랑스 국기.svg
프랑스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가족 앨리스 베덴(배우자)
직업 비행기 조종사, 항공 기관사, 발명가, 사업가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사업과 항공기 개발2.3. 도버 해협을 건너다2.4. 영국 해협을 건넌 후의 삶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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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항공기술자. 최초로 항공기를 이용해 영국 해협을 건넌 사람이다.

2. 생애

2.1. 초년기

루이 블레리오는 1872년 7월 1일 프랑스 캄브레에서 다섯 자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나이에 비해 조숙했던 그는 열 살 때 집을 떠나 캄브레의 노트르담 기숙 학교에 다녔고 열다섯 살 때 아미앵 리세로 이사하여 고모와 함께 살았다. 블레리오는 파리의 생트 바르브 대학에서 1년을 보낸 후 입학 시험을 통과하여 파리의 명문 에콜 센트랄(École Centrale)에서 3년 동안 공부할 수 있었다. 그 후 피레네 산맥의 타르베에 주둔한 제24포병연대에서 소위로 군 복무를 마쳤다.

2.2. 사업과 항공기 개발

군 복무를 마친 뒤, 전기 엔지니어링 회사인 바게스에서 일자리를 얻어, 그곳에서 소형 통합 아세틸렌 발전기를 기반으로 한 세계 최초의 실용적인 자동차 헤드램프를 개발한다. 그는 바게스에서 직장을 그만두고 당시 파리에 헤드램프 쇼룸을 열었고, 그 성공으로 당시 두 개의 주요 자동차 제조업체인 르노 파나르-르바소에 공급업체가 되었다. 헤드램프와 기타 자동차 액세서리 제조업으로 번 부는 항공학 분야에서의 초기 작업에 자금을 지원했다.

1900년 파리 박람회에 참석하는 동안 블레리오는 프랑스 기계 엔지니어 클레망 아데르의 증기 엔진 항공기 아비옹 3호를 우연히 발견했고, 항공에 관심이 생겼다. 30세 때 비행기 조종 실력을 연마하여 비행에 도전했지만 그의 첫 도전들은 오르니톱터 비행기였던 탓인지 전부 실패하고 만다. 1905년 블레리오는 가브리엘 부아종의 첫 수상 비행기 글라이더 시험을 목격했고, 1905년 6월 8일에 비행을 주제로 한 영화 촬영까지 한다.

이에 영감을 받은 가브리엘 부아종 에르네스트 대주교( 에어로클럽 드 프랑스를 설립한 사람)와 함께 일하던 직장에서 벗어나 Ateliers d'Aviation Edouard Surcouf, Blériot et Voisin을 설립했다. 세계 최초의 항공기 제조 회사로 여겨지는 이 회사는 해체되기 전에 두 종류의 항공기를 생산했지만 팔리지 않았고, 블레리오는 루이 블레리오 항공 연구소(Recherches Aéronautiques Louis Blériot)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여 최초의 성공적인 동력 단엽기를 생산할 수 있었다.

블레리엇의 이 실험 단계에서는 시조 기종의 진화를 볼 수 있었는데, 로마 숫자를 오름차순으로 붙여 후속 모델을 지정했다. 블레리오 V는 캐너드 구성이었고 블레리오 VI는 탠덤 윙 디자인이었다. 진정한 혁신은 1907년 11월 16일에 처음 비행한 현대적 재래식 비행기 레이아웃을 채택한 블레리오 VII에서 이루어졌으며, 가장 초기의 성공적인 단일체 비행기로 인정받고 있다.[1] 블레리오 VII호는 블레리오가 12월 6일에 U턴을 포함한 500m가 넘는 두 번의 비행을 조종하면서 성공을 이어갔다.

2.3. 도버 해협을 건너다

루이 블레리오의 유명한 영국 해협 횡단 비행은 런던의 데일리 메일이 내놓은 제안에서 비롯되었다. 데일리 메일은 1908년 10월, 그 해가 끝나기 전에 비행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 500파운드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지만 한 해가 지나도 진지한 시도가 없자 신문사는 상금을 1000파운드로 인상하고 1909년 연말까지 제안을 연장했다. 라이트 형제는 1000파운드의 상금이 위험을 감수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며 거절했지만, 블레리오와 그의 경쟁자 3명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블레리오는 그의 비행기 블레리오 XI호를 이용하여 22마일을 불과 36분 30초만에 칼레에서 도버까지 비행하는데 성공한 후, 영국 해협을 가로질러 항공기를 조종한 최초의 사람으로 유명해졌다. 당시 블레리오는 오늘날 현대 조종사들이 사용하는 나침반이나 계기판을 사용하지 않고 비행을 완료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시험 비행에서 심하게 다친 발로 고생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비행 중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난류와 시야 불량이 발생했지만, 블레리오는 어떻게 한 일인지는 몰라도 계속해서 진로를 유지했다.

해가 뜨자, 04:41에 블레리오는 횡단을 시도하기 위해 이륙했는데, 그의 계획은 비행을 호위할 프랑스 해군 구축함 에스코페트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항공기의 속도가 너무 빠른 나머지 곧 배를 추월했고 그의 블레리오 11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동쪽으로 진로를 잃은 그는 르 마틴 과 함께 삼색기를 흔들며 블레리오가 도버 성 근처의 착륙 지점에 도착했다는 신호를 보내는 기자 샤를 퐁텐을 발견했다.

도버의 잔디밭에 착륙하는 블레리엇의 모습을 보기 위해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비행기는 불시착으로 인해 랜딩 카트리지와 프로펠러를 개박살내며 착륙했고 블레리오는 무사히 비행을 마치고 돌아와 세계에서 유명해진건 물론, 1,000파운드의 상금을 얻어 부자가 되었다. 이 비행으로 그는 “현대 단엽 비행기의 아버지”, “최초의 획기적인 비행을 한 조종사”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비행을 마친 루이 블레리오는 영국 해협 양쪽에서 축하를 받았으며 다음 날 파리에서도 영웅 대접을 받았다.

2.4. 영국 해협을 건넌 후의 삶

블레리오가 영국 해협을 건너 비행할 당시, 그는 이미 자신의 항공 실험에 투자하기 위해 자신의 돈 약 78만 프랑을 투자했다. 그의 비행 덕분에 그의 회사인 루이 블레리오 항공 연구소는 엄청난 투자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항공에 대한 그의 투자가 드디어 흑자를 보기 시작했는데, 회사가 각각 약 1만 프랑에 판매된 Type XI 항공기에 대한 여러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비행기는 호주와 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온 사람들을 포함하여 많은 다른 비행 클럽에서 구매했다. 블레리오의 비행기는 러시아, 오스트리아,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의 초기 공군에서도 사용되었다. 블레리오 항공기와 이를 사용한 조종사는 1910년에 열린 대규모 유럽 대회와 항공 경주에서 지배적인 세력이었다. 1910년 7월 블레리오 Type XI는 지속 시간, 거리, 속도 및 고도 분야에서 세계 기록을 보유했다.

블레리오의 영국 해협 횡단은 같은 해에 랭스에서 열린 첫 번째 고든 베넷 항공 트로피에서 2위를 차지하면서 더욱 성공적이었고, 이 대회에서 그는 서킷에서 가장 빠른 랩을 완주하고 항공기의 새로운 세계 속도 기록을 세웠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 몇 년 동안 블레리오는 항공 시장을 장악하여 Type XI를 약 900대 생산했다. 당시 시대 상황상 단엽기 역시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블레리오 비행기 4대가 사고로 인한 안전 문제로 인해 프랑스군은 1912년에 단엽기 사용을 잠시 금지했다. 단엽기의 날개가 비교적 약해서 무너져 추락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루이 블레리오는 스스로 항공기의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책을 내놓았다. 단엽기 금지는 비행기의 착륙선을 강화하여 문제가 해결된 후 해제될 수 있었다.

라이트 형제와의 특허 분쟁이 수년간 계속되다가 결국 미국의 청구가 기각되면서 그의 상업적 성공은 훼손되었다. 블레리오는 우선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프랑스, 나중에는 미국 공군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된 유명한 스패드 복엽기 제조업체를 인수하여 1914년 항공 산업의 리더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전쟁 이후, 항공 분야에서 블레리오의 다양한 기업적 프로젝트(영국 회사 Air Navigation and Engineering Company(ANEC)의 출범 포함)는 전쟁 전의 상업적 성공을 재현하지 못했다. 이는 그의 원래 항공기 설계가 시대에 뒤떨어졌기 때문이었다. 항공기 부문의 전반적인 쇠퇴를 완화하기 위해 ANEC는 오토바이 및 자동차 시장으로 사업을 다각화하여 4륜 사이클카인 블레리오-휘펫을 생산했다. 수백 대가 생산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전설적인 자동차 전문가 알렉 이시고니스가 소유했다.

ANEC는 거의 10년간 사업을 했지만 1926년에 제조를 중단하고 이듬해에 문을 닫았다.

1936년 8월 1일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루이 블레리오는 레 인발리드에서 군장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3. 여담


[1] C H 깁스-스미스의 '비행의 역사'(19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