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과이 공화국 대통령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 #0038a9;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 |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 파쿤도 마차인 | 시릴로 안토니오 리바롤라 | |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살바도르 호베야노스 | 후안 바티스타 힐 | 이히니오 우리아르테 | 칸디도 바레이로 | |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
베르나르디노 카바예로 | 파트리시오 에스코바르 | 후안 후알베르토 곤살레스 | 마르코스 모리니고 | |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제16대 | |
후안 바티스타 에후스키사 | 에밀리오 아세발 | 안드레스 엑토르 카르바요 | 후안 안토니오 에스쿠라 | |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
후안 바티스타 가오나 | 세실리오 바에스 | 베니그노 페레이라 | 에밀리아노 곤살레스 나베로 | |
제21대 | 제22대 | 제23대 | 제24대 | |
마누엘 곤드라 | 알비노 하라 | 리베라토 마르시알 로하스 | 페드로 파블로 페냐 | |
제20대2 | 제25대 | 제26대 | 제27대 | |
에밀리아노 곤살레스 나베로 | 에두아르도 샤에레르 | 마누엘 프랑코 | 호세 페드로 몬테로 | |
제21대2 | 제28대 | 제29대 | 제30대 | |
마누엘 곤드라 | 에우세비오 아얄라 | 엘리히오 아얄라 | 루이스 알베르토 리아르트 | |
제29대2 | 제31대 | 제28대2 | 제32대 | |
엘리히오 아얄라 | 호세 파트리시오 구기아리 | 에우세비오 아얄라 | 라파엘 프랑코 | |
제33대 | 제34대 | 제35대 | 제36대 | |
펠릭스 파이바 | 호세 펠릭스 에스티가리비아 | 이히니오 모리니고 | 후안 마누엘 프루토스 | |
제37대 | 제38대 | 제39대 | 제40대 | |
후안 나탈리시오 곤살레스 | 라이문도 롤론 | 펠리페 몰라스 로페스 | 페데리코 차베스 | |
제41대 | 제42대 | 제43대 | 제44대 | |
토마스 로메로 페레이라 |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 | 안드레스 로드리게스 | 후안 카를로스 와스모시 | |
제45대 | 제46대 | 제47대 | 제48대 | |
라울 쿠바스 그라우 | 루이스 앙헬 곤살레스 마치 | 니카노르 두아르테 | 페르난도 루고 | |
제49대 | 제50대 | 제51대 | 제52대 | |
페데리코 프랑코 | 오라시오 카르테스 | 마리오 아브도 베니테스 | 산티아고 페냐 | |
<rowcolor=#ffffff> ※ 파라과이의 경우 임기가 중간에 단절되었다가 다시 집권해도 처음 집권했을 당시의 대수를 유지한다. | ||||
← 파라과이 집정관 | }}}}}}}}} |
<colbgcolor=#0038a9><colcolor=#fff> 파라과이 제32대 대통령 라파엘 데라크루스 프랑코 오헤다 Rafael de la Cruz Franco Ojeda |
|
|
|
출생 | 1896년 10월 22일 |
파라과이 아순시온 | |
사망 | 1973년 9월 16일 (향년 76세) |
파라과이 아순시온 | |
국적 | 파라과이 |
임기 | 파라과이 제32대 대통령 |
1936년 2월 17일 ~ 1937년 8월 13일 | |
배우자 | 데이다미아 솔라린데 |
복무 | 파라과이 육군 |
1915년 ~ 1936년 |
[clearfix]
1. 개요
파라과이 제40대 대통령이자 군인. 차코 전쟁의 영웅이기도 하다.2. 생애
수학과 교수인 페데리코 프랑코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5년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1924년 8월 대위로 진급했다. 1926년 2월, 사관학교 훈육대장을 거쳐 11월 보병 제2연대로 소속을 옮겼다. 1928년 소령 시절때 그란차코 지역에 있는 볼리비아 요새를 점령하는 공적을 세웠다. 이후 군사 항공 학교의 교장으로 옮겼다.1933년 대령으로 진급한 프랑코는 차코 전쟁에서 파라과이군 제1사단을 지휘했다. 1933년 7월 12일, 알리우아타(Alihuatá) 전투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빠르게 적의 방어를 뚫고 들어가 볼리비아군 제4사단을 격파했다.
프랑코는 에우세비오 아얄라 대통령과 갈등을 빚었고 결국 아르헨티나로 추방시키자 1936년 2월 17일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대통령 즉위 후, 1936년 2월 24일 파라과이 정부는 파라과이 중앙은행을 설립했고, 증권거래소 역할까지 겸임하게 했다. 노동개혁의 일환으로 8시간 노동제, 일요일의 의무휴일 지정, 주휴시간 48시간, 임금은 현금으로만 지급, 노동자들의 노조와 파업의 권리뿐만 아니라 여성 노동자들의 권리를 인정했다. 또한 1936년 5월 5일 파라과이 정부는 20만 헥타르의 토지를 농민 1만 가구에 분배하고 임대료를 1년 동안 동결하는 내용의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파라과이의 첫 일본인 이민자가 도착했고, 또한 볼리비아와 전쟁 포로 교환을 실시했다. 2대 대통령인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를 "로페스는 운이 따라주지 않았을 뿐, 파라과이의 자주성을 드높인 위대한 지도자다."라고 평가하며 기존의 무법자, 독재자 인식을 뒤엎고 국가의 영웅이자 애국자로 추대했다. 또한 로페스가 전사한 날인 3월 1일을 '국가 영웅일'이라는 국경일로 지정했고 로페스 부부의 유해를 새로 지은 박물관에 안치했다.
1937년 8월 13일 프랑코가 차코 지역에서 파라과이 군대를 철수시키자, 군내 우익 세력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프랑코 정부가 전복되고 자유당인 펠릭스 파이바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후 프랑코는 우루과이로 망명했다. 1946년 사면을 받고 잠시 파라과이로 돌아왔으나 정치 음모 혐의로 다시 망명했다. 1963년 말이 돼서야 완전 귀국했고 10년간 조용히 지내다 사망했다.
3. 대중매체에서
Hearts of Iron 4에서 2월 혁명 이벤트를 통해 파라과이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업데이트 전에는 1936년 1월부터 지도자로 등장했다. 즉, 아직 프랑코가 집권하기 전으로 고증오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