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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녕총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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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몽 관계
, 쌍성총관부
, 탐라총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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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간섭기의 고려
파일:파일_원 간섭기 시기의 고려.png

東寧路總管府 | 동녕로총관부

1. 개요2. 상세

1. 개요

원 간섭기 1270년 원나라 고려의 서경( 평양)에 설치했다가 1290년 요동으로 이전한 통치기구이다.

2. 상세

1269년(고려 원종 10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의 기관(記官) 최탄(崔坦) 등이 반란을 일으키고 서경, 북계의 54개의 성과 서해도의 6성을 원나라에 바치고 투항했다.[1]

이후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은 서해도 부근 자비령을 경계로 그 이북 지역을 모두 요양행성에 편입하고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한 후, 최탄을 총관에 임명하였다.

이에 고려 원종은 원의 수도 대도(오늘날의 베이징시)에 직접 가서 쿠빌라이 칸에게 이 지역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관철되지 않았고, 오히려 쿠빌라이 칸은 1275년( 충렬왕 1년)에 동녕부를 동녕총관부로 승격시켰다.

하지만 끊임없는 설득과 요구 끝에 원나라는 1290년(충렬왕 16년)에 이 지역을 고려에 돌려주었고, 동녕총관부를 요동 지역으로 이동시켰다.[2] 동녕부를 돌려준 이유는 세조구제인데 원 세조가 고려의 항복이 이뤄진 시점부터 원나라에 협조하는 대가로 영토와 주권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했고, 따라서 더 이상 유지할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탐라총관부도 실권은 원나라 목호들이 쥐고 있었으나 일단은 고려에 돌려주었다.

동녕총관부는 고려 밖으로 옮겨졌지만 한때 고려를 지배했었으므로 정벌해야 할 외세의 통치기구라는 명분으로 공민왕은 1370년(공민왕 19년) 북진을 실시하였고 이에 고려는 일시적으로 요동을 점령하는 결과를 얻기도 하였다( 제1차 요동정벌).

고려인의 배반으로 원나라의 직속령이 되었다는 점에서 쌍성총관부와 유사하다.

[1] 최탄은 서경유수(西京留守) 최년(崔年), 판관(判官) 유찬(柳粲), 사록(司錄) 조영불(曹英紱), 용주(龍州) 수령 유희량(庾希亮), 영주(靈州) 수령 목덕창(睦德昌), 철주(鐵州) 수령 김정화(金鼎和), 선주(宣州) 수령 김의(金義), 자주(慈州) 수령 김윤(金潤)을 죽였고 그 나머지 각 성의 원리(員吏)들도 다 적에게 살해당했으며 성주(成州) 수령 최군(崔群)은 부하의 손에 죽었다. 김정화의 처는 대경(大卿) 이덕재(李德材)의 딸로, 처음 고을로 들어올 때 그 미색을 뽐내느라 얼굴을 가리지 않았으므로 그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에 적이 김정화를 기둥에 묶어놓고 보는 앞에서 강간했다. 김의는 사람됨이 굳세었는데 적이 술을 부으라 하니 분을 못 이겨 스스로 목매어 자결했다. [2] 즉 영토는 반환했지만 동녕총관부라는 기구 자체는 이때 철폐된 게 아니다. 그리고 요동 지역에 고려 왕족을 심왕으로 삼아 고려를 압박하는 데 썼는데, 어차피 원의 속국이면 요동을 누가 차지해도 상관없어서 일시적으로나마 요동 통치권을 고려왕이 가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