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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29 22:17:51

도이칠란트(잠수 화물선)

파일:Deutschland_photo.jpg

Deutschland

1. 개요2. 배경3. 봉쇄 돌파4. 일생
4.1. 첫 항해4.2. 두 번째 항해4.3. 전투함으로 개조되다
4.3.1. 1917년4.3.2. 1918년
4.4. 최후
5. 관련 항목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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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칠란트는 독일에서 제작된 잠수 화물선(Merchant Submarine)이다.

2. 배경

파일:Grand_Fleet_by_Bernard_Gribble.jpg
Bernard Gribble - Grand Fleet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에 의해 시행된 해상 봉쇄는 독일에게 큰 고통을 초래했고 독일의 전쟁 능력을 상당히 방해했다. 1915년까지 1년 동안의 봉쇄 조치만으로도 독일 제국의 수입은 전쟁 전보다 55%나 감소했고 수출은 53%로 격감했다. 봉쇄는 석탄과 철광 같은 필수 원자재의 부족을 초래하는 것 외에도, 농업에 필수적인 비료 공급선도 막아버렸다. 이로 인해 1916년 말까지 곡물, 감자, 육류, 유제품과 같은 식자재들이 너무 부족해져서 배급제가 시행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톱밥을 섞어 구운 전쟁빵(Kriegsbrot)과 순무를 먹고 식후에는 치커리차를 마시는 등, 대용 식품을 먹어야만 했다. 심각한 식량 부족으로 민심이 흉흉해졌고, 독일 뿐만 아니라 빈과 부다페스트에서도 종종 약탈과 폭동이 일어났다.

종전 후 독일은 영국의 봉쇄로 763,000명의 민간인이 굶주림으로 인한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죽었다는 통계치를 발표했다. 이 수치는 사망자를 424,000명으로 집계한 그 후의 학술적 연구에 비하면 부정확한 것으로, 1918년 마지막 6개월간의 통계는 포함되지도 않는 등 주먹구구식 통계였고, 프로파간다가 가미된 것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봉쇄로 인하여 민간인들이 받은 막대한 피해를 말해주고 있다. 종전 후 9년이 지난 1928년에 카네기 국제평화기금이 후원한 독일의 학술연구는 전쟁 중 독일 국민의 사망자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제공했다. 이 연구는 알자스-로렌을 포함하지 않고 독일에서 1세 이상 민간인의 전쟁 관련 사망자가 424,000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으며, 학자들은 이것이 주로 1917년과 1918년 사이에 급증했으며 대부분 식량과 연료 부족에 기인했다고 밝혔다. 또한 1918년에 추가로 209,000명의 스페인 독감 사망자도 추정했다. 영국의 해상 봉쇄는 확실하게 눈에 띄는 효과는 볼 수 없었으나 서서히 독일을 말려 죽이는 본래의 목적은 어느정도 달성했다.

3. 봉쇄 돌파

파일:German cargo submarine 'Deutschland' arrives in Baltimore Harbor. HD Stock Footage.gif
이에 독일은 "수상 함대와 교전 자체를 거부할 수 있는 잠수함을 이용하여 상선처럼 화물을 실어 보낸다"는 방법을 생각해냈고 상선 잠수함(Handels-U-Boot)의 건조에 착수하게 되었다. 첫번째로 완공된 도이칠란트(Deutschland)는 해상 봉쇄를 통과해 미국과 독일 사이에 화물을 수송하기 위해 고안된 7척의 잠수 화물선(Merchant Submarine) 중 하나였다. [1]
파일:Deutschland.jpg
파일:How the German Submarine, Deutschland, is Constructed. 1916.jpg
도이칠란드는 초기 잠수함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복각식 선체로 제작되었다.

이 잠수함은 1916년에 자매함인 브레멘(Bremen)과 함께 해운회사인 노르트도이처 로이드(Norddeutscher Lloyd : NDL)와 도이체 방크(Deutsche Bank)의 자회사인 도이체 오젠-리데레이(Deutsche Ozean-Reederei : DOR)를 위해 건조되었다. 설계와 공사는 독일 최북단의 플렌스보르크 협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플렌스부르거 조선소(Flensburger Schiffbau-Gesellschaft : FSG)가 의뢰를 받아 진행하였다. 도이칠란트는 화물을 적재할 공간을 위해 넓은 선창을 갖췄으며 FSG의 수석 엔지니어 루돌프 에르바흐(Rudolf Erbach : 1880~1959)[2]박사는 어뢰나 함포 같은 무장은 전혀 설치하지 않게끔 설계했다. 400만 마르크를 들여 준공된 이 잠수함의 화물 탑재량은 선창에 700톤, 그리고 이중으로 제작된 내부 선체와 외부 선체 사이의 자유 침수 공간에 고무 230톤을 저장할 수 있었는데, 당연하지만 해상 위로 항해하는 동급의 수상 선박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적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잠수함을 상선으로 이용하려는 독일에 항의하면서, 다른 화물선과 같은 방식으로 대할 것이며 군수품 검사를 중단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당시 중립국이였던 미국은 외교적 압박에 시달리면서까지 이 주장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그러므로 설령 잠수함이라 할지라도 무장하지 않는 한 상선으로 간주될 것이며, 따라서 무역을 위한 항행이 허용될 것이라고 밝혔고 영국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물론 이런 암묵적인 동의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봉쇄로 독일에 대한 수출에 타격을 입고, 특히 연합군과 동맹군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며 전시 무역을 통해 이익을 얻고자 하는 의도가 좌절된 미국은 연합군 측에 격렬하게 항의했다. 영국으로서는 장차 미국을 우군으로 끌어들이려면 반감을 사는 것을 피해야만 했다. 그래서 미국 선박들은 밀수품(?)을 싣고 가다 봉쇄선에 멈춰 서면 영국인들은 화물 전량을 사들였고, 화물이 없는 배는 즉시 풀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잠수함의 통행마저 막는다면(막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지만)미국은 유럽 전선에 끝까지 관여하지 않을 가능성마저 있었다.

일단 도이칠란트급 자체는 단 2척의 잠수함만 완성되었지만 독일은 총 7척의 잠수함을 상선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첫 항해에서 실종된 브레멘과 그보다 훨씬 성공적이었던 도이칠란트는 대서양을 건너 미국과 독일을 오가며 본국에게 귀중한 전략물자를 운반했다. 나중에 미국이 참전을 하면서 연합군 편에 서게 되자, 이 잠수 화물선들은 150 mm 데크건을 장착시켜 장거리 순양잠수함인 U-크루저(U-kreuzer)로 개조되었는데, 이 형식은 U형 151급(Type U 151 class)으로 도이칠란트급과는 조금 성격이 다른 함선이었다.

4. 일생

4.1. 첫 항해

봍티모어에 도착한 도이칠란트 / 뉴 런던에서 출항하는 독일 잠수함

파일:1916cargo.jpg

도이칠란트는 1916년 6월 23일, 노르트도이처 로이드 해운사의 파울 쾨니히(Paul Liebrecht König : 1869~1933) 선장이 지휘를 맡아 첫 미국 항해를 떠났다. 첫 항해에서 이 배에는 250톤의 화물이 실려있었는데, 그중에는 값비싼 고농축 화학 염료인 안트라퀴논(Anthraquinone)[3]과 알리자린(Alizarine)[4] 부산물 125톤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그중 일부는 파운드당 1,254달러나 나갔다. 그 밖에도 보석과 살바르산(salvarsan)[5], 귀중한 의약품과 외교 우편도 함께 운반했으며, 화물의 재화 가치는 당시 시세로 150만 달러[6]의 값어치가 있었다.

도이칠란트는 영국과 프랑스 함대의 초계와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처음 발표된 항해일 이후 일주일 동안이나 북해의 헬골란트(Helgoland) 섬 근해에서 머물며 대기했다. 통행량이 많은 잉글랜드 채널을 통과하는 대신 스코틀랜드를 우회하는 북쪽 항로를 택해서 출발했다. "잠수 화물선"이라고는 하지만, 그 당시 잠수함은 필요할 때만 잠수했기 때문에 도이칠란트는 미국까지 6,100 km를 항해하는 동안 겨우 140 km만을 잠항했다. 1916년 7월 9일, 도이칠란트는 당시 볼티모어(Baltimore) 경계선 밖에 있던 시 외곽의 검역소에 도달하여 해상에서 대기하다가 2주를 조금 넘긴 후인 7월 10일에 미국에 입항하게 된다. 볼티모어 항구에 머무는 동안 독일 승무원들은 놀라운 여정을 해낸 유명인사로 환영을 받았고, 도시의 남서부 지역에서 화려한 만찬과 지역 축제에 초청하기까지 했다. 미국의 잠수함 개척자인 사이먼 레이크(Simon Lake : 1866~1945)는 볼티모어에 있는 동안 도이칠란트를 방문해 선내를 둘러보았고, 1917년 4월 초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을 때 결코 성과를 거두지 못한 프로젝트를 노르트도이처 로이드 계열사 대표들과 계약을 맺었다. 이후 그가 독일 잠수함을 면밀히 견학했던 경험은 훗날 북극 탐사에 쓰인 원양 잠수함 O-12 노틸러스를 설계할 때 어떤 형태로든 참고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이칠란트는 8월 2일까지 볼티모어에 머물며 브레머하펜(Bremerhaven)으로 향했고, 8월 24일에 니켈 341톤, 주석 93톤, 고무 348톤의 귀중한 전략물자를 싣고 도착했다. 이 한 번의 항해로 싣고 온 화물은 잠수함 건조 비용의 4배 이상에 달하는 1,750만 달러어치로 평가되었으며, 독일군이 필요로 하는 양의 3~4개월 분에 해당했다. 고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잠수 화물선 도이칠란트는 190해리(350 km)를 잠수한 상태에서 항해했고, 8,450해리(15,650 km)를 여행했는데 이것은 잠수함으로서는 가장 긴 원양 항해였다.

4.2. 두 번째 항해

첫 항해를 성공리에 마친 도이칠란트는 1916년 11월에 보석, 증권, 의약품 등 1,000만 달러(2021년 기준 2억 3,495만 달러)어치의 화물을 싣고 코네티컷주 뉴 런던(New London)으로 갔다가 돌아와 다시 한번 무사히 왕복했다. [7]

11월 17일, 도이칠란트는 뉴 런던 항구에서 원양으로 나가는 도중에 우연히 예인선 스캇 주니어(T. A. Scott, Jr.)를 들이받았는데, 이 예인선은 독일의 잠수 상선을 탁 트인 바다로 호송하던 중에 갑자기 예고도 없이 방향을 틀었다. 도이칠란트의 강철 선체를 들이받은 목조 터그보트 스캇 주니어는 즉시 침몰하면서 5명의 승무원은 익사하고 말았다. 도이칠란트도 선수가 움푹 패이며 손상되었고, 수리를 위해 뉴 런던으로 돌아가야만 했기에 출항이 일주일 연기되었다. 도이칠란트는 1916년 11월 21일에야 6.5톤의 은괴를 포함하여 378톤의 고무, 188톤의 니켈, 146톤의 합금강, 76톤의 주석을 화물을 싣고 미국을 떠났다.

이 항해는 미국 참전 이전의 마지막 항해였다. 두 번의 잠수함 원양 항해를 무사히 마친 파울 쾨니히 선장은 독일 잠수함의 장대한 여정에 관한 책을 쓰기 위해 협력했고, "도이칠란트의 항해, 최초의 잠수 상선(Voyage of the Deutschland : the First Merchant Submarine)"[8]이라는 회고록을 펴냈다. 영어와 독일어로 출판된 이 책은 독일인에게는 긍지를 심어주는 반면 미국에게는 전쟁에서 잠수함이 활약하며 원양 항로를 옥죌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는 선전책자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독일과 미국 양쪽에서 전혀 다른 이유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다.

4.3. 전투함으로 개조되다

파일:u155.jpg
파일:fb95c117fadd7081b0cdd34100819964.png
1917년 1월로 계획되었던 세 번째 항해는 그 무렵 점차 경색되어가는 미국과 관계로 인해 연기되었다, 미국에서 출발하여 영국으로 향하는 상선들이 영해를 벗어나자 독일 U보트에 의해 침몰하면서 독일과 미국 관계가 험악해진 것이다. 결국 도이칠란트의 상선으로서의 임무는 중단되었다. 이 배는 1917년 2월 19일 독일 해군에게 접수되어 빌헬름스하펜 황립 조선창(Kaiserlichen Werft Wilhelmshaven)에서 전투함인 U-155로 개조되었으며, 잠수 순양함대(U-Kreuzer Flotilla)의 일원으로 복무하게 된다.

개장될 때 함수에는 6문의 어뢰 발사관이 설치되었고, 18발의 어뢰를 탑재시켰다. 갑판에는 15cm SKL/40 함포 2문이 탑제되고 거무튀튀한 위장 도색까지 칠해진 도이칠란트는 이제 상선이 아니라 군함이었다. 짐꾼으로 두 번의 원양 항해를 성공시켰던 것처럼 도이칠란트는 싸움에도 유능했다. 도이칠란트는 3회의 전투 초계를 나가는 동안 무려 42척/121.328톤의 배를 격침시키고 1척을 손상시키는 상당한 전공을 거두게 된다. 섬뜩하게도, 쾨니히 선장이 회고록을 통한 예고는 정확하게 들어맞은 셈이다.

4.3.1. 1917년

1917년 여름 U-155는 함장 카를 뫼젤(Karl Meusel : 1881~1941 / 52,387 GRT 격침) 소령이 지휘하여 105일간의 첫 초계 임무에 나섰다. 5월 24일에 독일을 떠난 도이칠란트, 아니 U-155는 9월 4일에 돌아온다. U-155가 잉글랜드 제도의 북쪽 끝 해역을 유유히 통과해 대서양으로 나가는 동안, 도이칠란트는 노르웨이의 웃시라 섬(Utsira Island) 근처에서 아군 잠수함인 U-19에게 포착되어 추격을 당했고, 적함으로 오인하여 거의 격침될 뻔했지만 참사는 면할 수 있었다.

이 초계 임무 도중, U-155는 7월 4일 오전 3시에 아조레스 제도의 항구도시 폰타 델가다(Ponta Delgada)에 함포를 발사했다. 식민지에 주둔하고 있던 보잘 것 없는 포르투갈 군대는 낡은 해안포 밖에 갖춰져 있지 않았던 탓에 별다른 대응을 할 수 없었다. 이 포격으로 인해 건물 여러 채가 무너지고 민간인 4명이 사망했다.
파일:uss_orion.jpg
석탄운반선에서 급유함으로 개조된 오리온호
공교롭게도, 이때 항구에는 미 해군의 석탄 운반선인 오리온호(USS Orion AC-11)가 수리를 받기 위해 부두에 들어와 있었다. 독일 U보트의 갑판에서 포격을 하던 수병들은 포연에 가려 오리온을 보지 못했고, 이에 오리온호의 미국 수병들은 재빨리 배에 탑재된 4문의 3인치 단장포로 치열하게 대응 사격을 퍼부으며 155 mm 함포에 맞서 싸웠다. 짐배와 전투함의 포격전이자 공격하는 잠수함과 앉아있는 오리 신세인 방어측 사이에 벌어진 기묘한 해전은 12분 동안 계속되었다. 두 척 모두 상대편과 정면 대응은 할 수 없었지만 이 포격전을 짧고 격렬했다. U-155는 결국 꼬리를 말고 잠수하여 후퇴했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포르투갈 정부는 오리온호의 용감한 수병들에게 감사의 뜻으로 포르투갈 군인에게 주어질 수 있는 최고 훈장인 탑과 검 기사 훈장(Antiga e Muito Nobre Ordem Militar da Torre e Espada)을 수여했다.

연합군은 대서양의 중간 기점인 아조레스 제도의 무방비 상태에 충격을 받은 한편, 향후 U-155와 같은 원양 잠수함들에게 중계 기지로 이용될 가능성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된다. 그 결과 미 해군이 이끄는 연합해군은 폰타 델가다에 함대를 파견하고 해군 작전기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첫 전투 임무에서 U-155는 19척의 상선을 격침시켰는데, 대부분은 포격으로 가라앉힌 것이다. 이 잠수함은 19척의 연합군 무장 상선들을 어뢰로 공격했지만 그들 중 9척만 가라앉힐 수 있었다. 독일로 돌아올 때까지 U-155는 10,220해리(18,930 km)를 항해했으며, 그 중 620해리(1,150 km)는 잠항 상태였는데, 이것은 그때까지 모든 잠수함을 통틀어 가장 긴 잠항 기록으로 알려진다.

4.3.2. 1918년

U-155는 1918년 8월 11일에 페르디난드 슈투트(Ferdinand Studt : 1879~1958 / 17,525 GRT 격침) 소령이 지휘하는 킬(Kiel) 군항에서 출항했다. 슈투트 소령은 출격하기 전에 노바스코샤주의 핼리팩스(Halifax) 항구와 뉴펀들랜드(Newfoundland)의 세인트 존스(St. John's) 항만을 차단하게끔 기뢰를 부설하고 낸터킷(Nantucket) 경비 지역의 미국 동해안을 순찰하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또한 노바스코샤에서 남동쪽으로 80 km 떨어진 세이블 섬(Sable Island)에서 대서양 전신 케이블을 찾아내서 끊어버리도록 지시받았다. 그러나 이 명령은 실현 가능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슈투트 소령은 뉴브런즈윅주 세인트존스 펀디만에 있는 세인트 존스 해역에 기뢰를 깔았다.

U-155는 2차 초계 중에 포르투갈의 요트 가모호(Gamo)를 나포하여 격침시켰고 SS 프랑스를 공격하려고 시도했으며, 노르웨이의 2,600톤급 상선 스토르틴드(Stortind)를 포격으로 파괴했다. 9월 7일에 U-155는 미국의 6,000톤급 대형 기선 프랭크 H. 벅(Frank H. Buck)과 원거리 포격전을 벌였는데, 어처구니 없게도 기선은 U-155를 침몰시켰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피해도 없었다.

9월 13일 U-155는 영국의 4,300톤급 상선 뉴비 홀(Newby Hall)과 포격전을 벌였고, 뉴비 홀에서 날아든 포탄이 잠수함에 명중탄을 내기 시작했다. U-155의 외장 철갑이 찌그러지고 구멍이 뚫려 내압 선체가 누수를 일으키자, 일시적으로 잠항이 불가능하게 되면서 그대로 후퇴했다. 일주일 후인 9월 19일에 슈투트 함장은 세이블 섬 근처를 빙빙 돌며 전신 케이블을 찾아 헤매었지만, 절단은 고사하고 찾아내는 것도 실패하고 낸터킷으로 향했다.

4.4. 최후

파일:german-submarine-u155-01-900x1034.jpg
독일의 항복 이후 영국에게 나포된 U-155
파일:U155_Scrap.jpg
해체 중인 U-155
U-155는 1918년 11월 12일 독일로 귀환하여 일주일 후인 11월 24일에 잉글랜드 남동부의 항구인 하리치(Harwich)에서 다른 독일 해군의 잠수함들과 함께 연합군에 항복하였다. 승전국의 전리품이 된 도이칠란트는 1918년 12월 런던의 테임즈강에 있는 세인트 캐서린 독(St Katharine's Dock)에 전시되었다가 그 후 리버풀(Liverpool)로 옮겨져 승리의 상징으로 널리 전시되었다.

영국 해군성은 1919년 3월 3일 제임스 준설(James Dredging Co.)에 £3,500에 불하했고, 이후 영국의 비행사 출신 발명가 노엘 펨버톤 빌링(Noel Pemberton Billing : 1881~1948)에게 £17,000에 되팔렸으며, 1919년 9월에는 무장과 전투 장비를 모두 제거하고 상업 운항에 나서려고 존 불 주식회사(John Bull Ltd)에 £15,000에 매각되었다.

1921년 6월, 다시 상선으로 되돌려지기 위해 복구 공사를 받던 도이칠란트는 1921년 9월 17일에 기관실에서 일어난 원인 불명의 폭발 사고로 5명이 사망하는 사고를 일으켰다. 망가진 선체는 1922년 6월에 200파운드에 버켄헤드의 로버트 스미스 & 손(Robert Smith & Son)에게 고철로 팔렸고, 록 페리(Rock Ferry)에서 해체되며 최후를 맞았다.

5. 관련 항목


[1] 여담으로 독일에서는 프로이센 시대부터 도이칠란트라는 이름이 붙은 배를 여러 척 진수시켰다. 대표적인 것이 1866년에 진수된 2,800톤급 기선 도이칠란트(SS Deutschland)와 1900년에 대서양 항로에 취역한 27,000톤급 호화여객선 도이칠란트(SS Deutschland). 잠수함 도이칠란트는 그 뒤를 이어 붙여진 이름이었다. [2] 뒤셀도르프 출신으로 조선학 박사 학위를 따고 Deutsche Werke Kiel AG에서 근무하다가 이 프로젝트를 맡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 그는 단치히 공과대학에서 조선학 교수로 후학을 양성했는데, 바로 그의 제자들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U보트를 설계했다. [3] 염료 생산에도 쓰이지만 각종 의약품 재료이기도 하며 과산화수소의 생산에도 쓰인다. [4] 지금은 화학공법으로 제조되지면 당시에는 덩굴식물(꼭두서니)을 채취해 농축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힘들게 얻어야 했다. [5] 독일 특허의 의약품 재료 [6] 현재 기준으로는 6,000만 달러 정도 [7] 같은 시기에 독일 제국 해군(Kaiserliche Marine)의 U-53 잠수함도 대서양을 건너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Newport) 항구를 방문했고, 돌아오는 길에는 미국 영토 밖에 있던 연합군 화물선 5척을 격침시킨 뒤 귀환했다. [8] 원제는 Die Fahrt der Deutsch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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