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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5E1FF><colcolor=#000> 덴마크의 세습 왕자 크누드 Knud, Arveprins af Danmar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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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크누드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 미켈 (Knud Christian Frederik Michael) |
출생 | 1900년 7월 27일 |
덴마크 륑뷔토르베크 소르겐프리 궁전 | |
사망 | 1976년 6월 14일 (향년 75세) |
덴마크 코펜하겐 | |
배우자 | 덴마크의 카롤리네 마틸데 공주 (1933년 결혼)[1] |
자녀 | 엘리사베트, 잉골프, 크리스티안 |
아버지 | 크리스티안 10세 |
어머니 |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알렉산드리네 여공작 |
형제 | 형 프레데리크 9세 |
종교 | 루터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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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덴마크의 왕자. 크리스티안 10세와 알렉산드리네 왕비의 차남으로, 프레데리크 9세의 남동생이다.덴마크 여왕 마르그레테 2세의 숙부이자 노르웨이 국왕 올라프 5세[2]의 친사촌이며 호엔촐레른 가문의 수장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3]의 이종사촌이다.
2. 생애
1900년 7월 27일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10세와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알렉산드리네 여공작의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크리스티안 10세는 유럽의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크리스티안 9세의 손자였고, 어머니 알렉산드리네는 메클린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3세와 아나스타샤 여대공의 장녀였다.증조할아버지 크리스티안 9세가 1906년 1월 29일에 사망하고, 할아버지 프레데리크 왕세자가 프레데리크 8세로 즉위하였다. 6년 후 1912년 5월 14일, 할아버지 프레데리크 8세가 사망하고 아버지 크리스티안 왕세자가 크리스티안 10세로 국왕으로 즉위했다.
1920년 남부 유틀란트 지역이 덴마크와 재통일되었을 때 그는 아버지 크리스티안 10세와 형 프레데리크 왕세자와 함께 말을 타고 이전 덴마크-독일 국경을 넘어 상징적인 국가 행사에 참여했다. 1930년에 그는 프레데리크 왕세자와 사촌인 악셀 왕자와 함께 극동 지역으로의 장거리 여행에 참여했다.
1933년 1월 27일 32세 때 자신의 친사촌 동생이자 12세 연하인 20세의 카롤리네 마틸데 공주와 약혼하고 9월 8일 덴마크 프레덴스보르 궁전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2년 후 장녀 엘리자베트 공주가 태어나고, 1940년에 장남 잉골프 왕자, 1944년 차남 크리스티안 왕자를 낳았다.
1944년 숙부인 구스타프 왕자[4]로부터 북셸란 프레덴스보르 근처의 에겔룬드 성을 물려받았고, 1954년 덴마크 고용주협회에서 팔 때까지 여름 거주지로 사용했다.
크누드는 해군 장교로서 어업 검사선을 타고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 페로 제도까지 여러 차례 북대서양을 항해했다. 그리고 다양한 업무를 맡았는데 나치 독일의 1941~1943년 점령 중이었을 때 드라고르 요새의 사령관이었고 1945년부터 1946년까지 아마게르의 남서쪽 해안에 있는 콩겔룬드포트를 지휘했다. 8월 봉기와 협력 정책 종료 이후 독일 국방군은 1943년 8월 29일 사파리 작전을 수행하여 덴마크 육군과 해군을 무장해제를 하자마자 해산시켰고, 8월 31일에야 콩겔룬드포르에 도착했다. 크누드 왕자는 이미 8월 중순에 지휘소에서 휴가를 신청했고, 1945년 해방 이후 6월 25일 저항군 AMPA가 요새를 크누드 왕자에게 반한했다.
2.1. 세습 왕자가 되다
1947년 4월 20일에 아버지 크리스티안 10세가 사망하고 형 프레데리크 왕세자가 프레데리크 9세로 즉위했다. 형 프레데리크 9세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 3명을 두었기에 크누드는 왕위 계승 1위가 되었다.[5] 하지만 1953년에 프레데리크 9세는 국민투표로 살리카법을 폐지하고 장녀 마르그레테 공주를 새로운 후계자로 지명하자, 크누드는 왕위 계승자를 바꾼 형에게 반발했다. 레이프 감보르그(Leif Gamborg) 검사의 도움을 받아 왕위계승법 개정을 끝까지 막으려고 했지만, 무용지물이 되었고 세습 왕자의 칭호만 받았다.[6]2.2. 말년
1972년 1월 14일 형 프레데리크 9세가 세상을 떠나고, 조카 마르그레테 2세가 덴마크 여왕으로 즉위했다. 크누드는 1976년 6월 14일 코펜하겐 북쪽 겐토프테에 있는 코펜하겐 카운티 병원에서 숨을 거두고, 로스킬레 대성당에 안치되었다.3. 장모 헬레네 아델하이트의 나치 부역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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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네 아델하이트와 하랄 왕자 |
크누드 왕자의 숙모이자 장모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헬레네 아델하이트 공녀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카롤리네 마틸데 공녀의 3녀이다. 이후 프레데리크 8세의 3남인 하랄 왕자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 3녀를 낳았는데 이들 중 차녀가 바로 크누드의 아내인 카롤리네 마틸데 공주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나치에게 적극적으로나 소극적으로나 대항했던 덴마크 왕족들과 달리 나치에게 매우 우호적이어서 그 당시부터 말이 많았다. 영어 위키의 표현에 따르며 Sympathiser, 무려 동조자였다고. 덴마크 보호령이 이어지면서 반독 감정이 갈수록 심해지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택에 독일인을 초대하여 파티를 열거나 그 자신도 독일인들의 파티에 자주 참석했다. 이에 분노한 덴마크 국민들이 헬레네 아델하이트가 타고있던 차의 창문을 깨부수기도 했고, 적극적으로 나치에게 저항하던 덴마크측 인물들은 그녀를 가리켜 "덴마크 왕족 중 유일한 배신자"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런 헬레네 아델하이트의 나치 지지 행적은 남편인 하랄 왕자를 포함한 가족들마저 당혹스럽게 했다.
헬레네 아델하이트의 사용인 중 하나였던 파울 달(Paul Dall)은 나치의 정보기관인 아프베어의 끄나풀이었고, 2차 세계 대전이 나치의 패배로 종결되자 전범으로 체포되어 유죄를 선고받았다. 심지어 1942년 1월 8일 덴마크 의용군 출신으로 슈츠슈타펠에 입대하여 나치측으로 참전했다가 러시아 전선에서 사망한 슈츠슈타펠 장교의 추도행사에 국왕이자 사돈인 크리스티안 10세마저 참석을 완강하게 거부했음에도, 꿋꿋히 참석하는 뻔뻔한 모습을 보였고 같은 해에는 시조카이자 사위인 크누드 왕자에게마저 "아버지인 국왕을 설득해서 나치 당원들이 덴마크 정부에서 일할 수 있게 해달라"라는 청탁까지 했다. 후대 연구자들도 헬레네 아델하이트는 나치 독일 측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뿐만 아니라 덴마크 왕실의 정보 제공자였고 비공식적인 끄나풀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엄연히 덴마크의 왕족이었던만큼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이후 헬레네 아델하이트의 처벌은 국왕인 크리스티안 10세의 재량에 달렸고 결국 크리스티안 10세의 제수이자, 사돈이라는 신분 때문에 재판도 받지 않고 공식 처벌 없이 1945년 5월 30일 덴마크 바로 밑 독일 북부에 있는 글뤽스부르크 본가로 국외 추방 및 가택연금을 당했다. 이마저도 불과 2년 뒤 남편 하랄 왕자의 병이 위중해지자 남편의 병간호를 위해 가택연금이 풀려 덴마크 입국이 허용되었다. 하랄 왕자가 사망한 뒤 13년을 더 살다갔지만 앞서 말한 매국노나 다름없는 전적으로 수많은 덴마크인들의 경멸을 받으며, 조용히 살다가 1962년 6월 30일 사망했고 왕실 묘당인 로스킬레 대성당에 남편 하랄 왕자와 함께 안장되었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세습 왕자 크누드 (Knud, Hereditary Prince of Denmark) |
<colbgcolor=#fff3e4,#331c00> 크리스티안 10세 (Christian X) |
<colbgcolor=#ffffe4,#323300>
프레데리크 8세 (Frederick VI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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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9세 (Christian I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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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센카셀의 루이제 (Louise of Hesse-Kass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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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과 노르웨이의 로비사 공주 (Louise of Swed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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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15세 (Karl X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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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루이세 공주 (Louise of the Netherland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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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알렉산드리네 여공작 (Alexandrine of Mecklenburg-Schwer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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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클린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3세 (Friedrich Franz III, Grand Duke of Mecklenburg-Schwer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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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클린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 (Friedrich Franz II, Grand Duke of Mecklenburg-Schwer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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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스쾨스트리츠의 아우구스타 (Princess Augusta Reuss of Köstritz)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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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아나스타샤 미하일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Anastasia Mikhailovna of Russia) |
|||
러시아의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 (Grand Duke Michael Nikolaevich of Russia) |
|||
바덴의 체칠리에 공녀 (Princess Cecilie of Baden) |
4.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녀 |
엘리사베트 공주[7] (Princess Elisabeth of Denmark) |
1935년 5월 8일 | 2018년 6월 19일 | |
1남 |
로젠보리 백작 잉골프 (Count Ingolf of Rosenborg) |
1940년 2월 17일 | 잉게 테르니 | |
수지 요하이 | ||||
2남 |
로젠보젠 백작 크리스티안 (Count Christian of Rosenborg) |
1942년 10월 22일 | 2013년 5월 21일 |
말토트프넬슨의 안네 도르테 여백작 슬하 3녀 |
[1]
숙부 하랄 왕자(할아버지
프레데리크 8세의 3남이자
크리스티안 10세의 동생.)의 차녀로 친사촌이다.
[2]
숙부
호콘 7세의 외아들.
[3]
이모
체칠리에 황태자비의 차남.
[4]
할아버지
프레데리크 8세와
스웨덴의 로비사 공주의 삼남이다.
크리스티안 10세의 둘째 남동생.
[5]
덴마크 왕위 계승은 1853년에 발효되어 사실상 남성만 가능하다고 확립되어 있다. 즉, 프레데리크 9세가 아들이 없을 때 크누드는 왕세제가 되고, 다음 계승자는 크누드의 장남 잉골프 왕자에게 넘어가는 거였다.
[6]
크누드 이름을 마지막으로 사용한 왕은
덴마크 역사에서 유일하게
대왕 칭호를 받았던
발데마르 1세의 장남
크누드 6세(1163~1202)였다. 왕위계승법이 바뀌지 않았다면 크누드 왕자는 크누드 7세가 되었을 것이다.
[7]
크리스티안 10세의 첫 손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