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레온 포카스 (영어: Leo Phokas, 그리스어: Λέων Φωκᾶς) |
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직위 | 마기스테르 |
반란 대상 | 로마노스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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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 마케도니아 왕조의 반란자. 로마노스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2. 행적
아랍과의 전쟁에서 맹활약한 동로마 제국의 명장 대 니키포로스 포카스의 아들이다. 형제인 대 바르다스 포카스도 뛰어난 장군이었고, 바르다스의 아들 니키포로스 2세와 레온 포카스도 훗날 탁월한 지휘관이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와 형제, 그리고 조카들과는 달리 군사적 재능이 별로 뛰어나지 않았던 듯하다. 당대 사료에도 그가 출세한 것은 군사적 명망이 대단한 포카스 가문의 뒷배 덕분이라고 평했다.그는 콘스탄티노스 7세의 섭정을 맡던 조이 카르보노프시나 황후의 총애를 받아 마기스테르를 역임했으며, 917년 불가리아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이끌었다. 크리미아 케르손의 군사 총독 요안니스 보가스는 시메온 대제의 동맹 세력이었던 페체네그족을 매수하여 북쪽에서 불가리아를 침공하게 했다. 로마노스 레카피노스가 이끄는 동로마 함대는 페체네그족을 다뉴브 강 건너편으로 수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여기에 그가 이끄는 제국 육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불가리아로 쳐들어갈 예정이었다. 일이 잘 되면 불가리아는 사방에서 협공을 받게 될 테니, 시메온은 강화를 제의하는 것 외엔 대안이 없을 터였다.
그런데 사단이 일어났다. 함대 지휘관 로마노스 레카피노스는 요안니스 보가스와 만나자마자 서로 자신의 권한이 우월하다며 심한 말다툼을 벌였다. 그러더니 로마노스가 군대 수송을 거부해버렸다! 이로 인해 페체네그족은 자신들을 수송할 제국 함대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지쳐 고향으로 돌아가버렸다. 한편 그가 이끄는 육군은 수도를 떠나 흑해 연안을 따라 행군했다. 이들은 불가리아로 진입했다가 8월 20일 새벽에 앙키알로스 항구의 외곽에 진지를 차렸다. 시메온은 이들을 기습해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이날 제국군은 거의 전멸했고 그를 비롯한 소수의 병사들만이 가까스로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했다.
917년 가을, 시메온이 군대를 이끌고 동부 트라키아를 유린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까지 쳐들어왔다. 조이 황후는 다시 그에게 군대를 맡겼으나, 그는 카사시르타이의 서쪽 외곽에서 또 다시 시메온에게 완패했다. 하지만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넘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불가리아로 철수했다. 조이는 2차례의 참패로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워지자 자신과 아들을 지켜줄 후견인을 모색했다. 그녀는 그를 황궁으로 불려들어 조언자로 삼았다. 황제의 가정교사 테오도로스는 레온이 적임자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로마노스 레카피노스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에 로마노스는 919년 3월 어린 황제를 받들어 모시겠다고 선언하고 함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했다. 결국 조이는 실각했고, 로마노스는 자신의 아름다운 딸 엘레니 레카피니와 콘스탄티노스 7세의 결혼식을 아야 소피아에서 치르고 자신은 바실레오파토르가 됨으로써 황제의 후견인이 되었다.
레온은 이 모든 소식을 접하자 자신의 근거지인 크리소폴리스에서 반기를 들었다. 그는 제위를 찬탈하려는 바실레오파토르의 손아귀에서 어린 황제를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에 로마노스는 사제와 창녀를 비밀 첩자로 활용하여 황제의 위조 서명이 있는 문서를 널리 퍼트리게 했다. 그 내용은 콘스탄티노스가 장인에게 전권을 위임했으며, 그는 반역자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사제는 곧 체포되었으나 창녀는 임무를 잘 완수해 레온의 병사 수백명이 무기를 내려놓게 만들었다. 레온은 거사가 실패했다는 걸 깨닫고 도망치려 했다가 비티니아의 어느 마을에서 붙잡혀 두 눈을 뽑히고 쇠사슬에 묶인 채 콘스탄티노플로 끌려왔다. 이 가련한 반역자는 그 후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받으며 노새를 타고 광장을 돌았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