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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3 14:22:25

니콜라 뤼크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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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 뤼크네르
Nicolas, Count Luckner
파일:Nicolas_luckner.jpg
본명 독일어: 요한 니콜라우스 그라프 루크너
(Johann Nikolaus Graf Luckner)
출생 1722년 1월 12일
바이에른 선제후국
사망 1794년 1월 4일 (향년 71세)
프랑스 제1공화국 파리
작위 백작 (Count)
군사 경력
군종 육군
복무 바이에른 선제후국
하노버 선제후국
네덜란드 공화국
프랑스 왕국
프랑스 제1공화국
최종 계급 원수
주요 참전 7년 전쟁
프랑스 혁명 전쟁
주요 서훈 흰독수리 훈장

1. 개요2. 일생
2.1. 초기 경력2.2. 7년 전쟁2.3. 프랑스군 장성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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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출신의 장성. 50여 년간 바이에른, 네덜란드, 하노버, 프랑스 등지에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 프랑스 혁명 전쟁에 참가해 수많은 전투들을 치른 파란만장한 군 경력의 소유자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뤼크네르는 1722년 1월 12일 동부 바이에른의 햠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햠의 도시 재무관이었던 사무엘 뤼크네르였다. 뤼크네르는 1737년경 파사우의 예수회 학교에서 공부했고 잉골슈타트 대학에 입학해 그곳에서 공부를 이어갔다. 1741년, 뤼크네르는 두 명의 햠 시민이었던 페터르 알트만과 안톤 메릴립과 함께 바이에른군에 입대하여 기병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한창이던 1743년 경, 뤼크네르는 의용군 중위로 전근했고 이후 기병 대위로 진급했다.

얼마 후 바이에른 선거후 카를 7세가 바이에른군을 네덜란드 공화국에 파견했을 때,뤼크네르는 이 군대에 함께하여 프란지파니 후사르 부대의 일원으로서 네덜란드에서 프랑스군과 맞서 싸웠다.또한 그는 네덜란드에서 부유한 아내와 결혼해 당시 덴마크에 속했던 지역인 홀슈타인의 토지를 물려받았다. 이후 1748년 전쟁이 끝나자, 뤼크네르는 바이에른 군대를 떠나 홀슈타인에 있는 자신의 영지로 향했다.

2.2. 7년 전쟁

1757년, 뤼크네르는 7만 탈러를 투자해 후사르 의용대 54명을 길려낸 후 이들을 이끌고 하노버군에 입대했다. 이후 그는 기병 대위로서 그의 이름을 딴 '뤼크네르 후사르' 부대를 창설했다. 12월 6일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이 하노버를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군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감행하고 있을 때, 뤼크네르는 헤르만스부르크 방면으로 이동했다. 12월 9일, 그는 보급 마차 24대를 탈취했고 12월 12일 게르센에서 프랑스 기병대와 하루 종일 맞붙었으며, 12월 31일 200명의 프랑스 후사르들과 60명의 하마 기병들을 공격해 그 중 66명을 생포하는 전공을 세웠다.

1758년 7월 17일, 뤼크네르는 중령으로 진급했고 1759년 7월 12일엔 대령으로 진급했다. 그해 5월 28일 프랑스군이 독일 서부 일대에 대한 공세를 벌이고 있을 때, 그는 휘하 부대를 이끌고 도르스텐에서 자리를 잡았다. 1760년 1월 19일, 뤼크네르는 딜렌부르크, 홀베르크, 마르부르크, 하츠펠트에 전진기지를 설치했다.1월 25일 소장으로 진급한 뤼크네르는 3월 17일 풀다로 진군해 길사 장군의 분견대와 합류했다. 그러던 3월 19일 프랑스군이 풀다와 노이호프 사이의 고지에 자리를 잡았다는 걸 알게 된 뤼크네르는 노이호프를 향해 향진했고 슐뤼히테른으로 후퇴한 프랑스군을 습격해 모조리 몰아냈다.

5월 19일, 이제 1만 명의 기병군단을 통솔하게 된 뤼크네르는 그로스셀하임과 클리셀하임, 그리고 마르부르크와 아메네베르크 사이의 여러 마을에 기병대를 분산 배치시켰다. 5월 23일, 뤼크네르는 기센과 버즈바흐 사이의 프랑스 보급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500명의 후사르들과 함께 출격했다. 5월 24일 아침, 그는 부섹과 쉐펜베르크를 따라 행군하면서 어떠한 프랑스군도 만나지 않은 채 버즈바흐로 가는 고지에 도착했다. 이후 그는 400피트 상공에서 버즈바흐를 정찰한 후 그곳에 150명의 프랑스 후사르들이 있는 걸 파악했다. 이에 그는 공격을 결심해 휘하 기병대에게 돌격 준비를 갖추게 했다. 그러던 중 13명의 프랑스 후사르들이 고지 근처를 정찰하다가 그들을 발견했다. 뤼크네르는 즉시 그들 대부분을 체포했지만 2명은 가까스로 탈출해 버즈바흐에 적이 인근 고지에 있다는 급보를 전했다.

이에 버즈바흐 수비대가 황급히 후퇴하자, 뤼크네르는 그들을 추격해 프리트베르크 방향으로 도망치는 적을 숲에서 따라잡아 1명의 장교와 20명의 병사들을 포로로 잡았다. 이후 뤼크네르는 병력을 두개로 나누어 기마대는 숲 속으로 들어가게 했고 브라운슈바이크 후사르 부대는 후퇴하는 프랑스 부대를 추격하여 여러 포로들과 30대의 보급 마차들을 포획하게 했다. 이 전투에서 뤼크네르의 부대가 입은 손실은 전사자 2명, 부상자 5명이었다. 또한 그는 5월 25일 4명의 장교들과 100명의 장병들을 포획해 키르치하인에 있는 그의 숙영지로 끌고 갔다. 7월 1일 1,500명의 프랑스 기병대가 프리츨라에서 역습을 가했지만, 뤼크네르는 이를 격퇴하고 패주하는 적을 프리겐하인까지 추격했다.

7월 4일 연합군 총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는 뤼크네르를 바일트룬겐으로 파견했다. 7월 6일, 퀴크네르는 프랑켄베르크에서 프랑스군을 공격해 격퇴시켰다. 그 후 7월 8일, 페르디난트는 브로이 공작 빅토르 프랑수아의 프랑스군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작센하우젠과 코르바흐 고지의 길목을 차단함으로서 그들이 생제르맹 백작 루이 클로드의 군대와 합세하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뤼크네르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자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의 지휘하에 7월 10일 코르바흐 고지로 지나가려는 프랑스군에 맞서 코르바흐 전투를 치렀으나 패배를 면치 못했다. 하지만 그는 7월 14일 엠스도르프 전투에서 브라운슈바이크 공자의 인솔하에 크리스티안 바론 폰 클라우비츠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을 기습해 막대한 타격을 입힘으로서 나흘 전의 패배를 복수했다.

7월 23일 프랑스 우익 예비군이 오데르샤우젠에서 진군해 스탱빌 공작 자크 필립 드 슈아쇨 공작의 군단과 접점을 이루자, 뤼크네르는 에데르 강을 건너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8월 6일, 그는 하스테에서 모링겐으로 후퇴한 뒤 8월 8일 아인베르크에 주둔한 오스트리아 자원병들을 공격해 하스테로 후퇴하게 했다. 이후 9월 23일 뤼크네르의 군단과 프랑스 기병대의 분견대는 네르텐 근처에서 맞붙었다. 뤼크네르는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중위와 107명의 병사들을 포로로 생포했다. 또한 11월 11일, 뤼크네르는 모링겐에서 출발해 노르트하임을 지나 기볼데하우젠으로 진군했다. 11월 12일, 뤼크네르는 로얄 나사우 후사르 분견대를 공격해 듀더스타트로 후퇴하도록 했다. 11월 28일, 뤼크네르는 아른슈타인 성 공략에 착수했으나 실패했고 11월 29일 프리트란트를 향해 후퇴했다.

12월 14일, 뤼크네르는 라이네 강을 건너 힐리겐슈타트로 진군했다. 이에 브로이 공작 빅토르 프랑수아는 12월 22일 이들에 맞서기 위해 친히 1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진군했고, 12월 23일 힐리겐슈타트에서 뤼크네르의 3,500 기병대를 공격했다. 뤼크네르는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300명이 넘는 손실을 입히고 장교 1명과 병사 34명이 포로로 잡히는 손실만 입은 채 샤르펜슈타인으로 철수했다. 이후 12월 24일 프랑스군이 힐리겐슈타트에서 후퇴하자, 뤼크네르는 즉시 그곳을 점령했다.

1761년 4월 24일, 프랑스 분견대 3천명이 괴팅겐에서 우슬라로 진군해 펠드헤븐 마을에서 영국 보병 대대를 기습해 100여 명의 포로를 확보했다. 그러자 뤼크네르는 척탄병 부대와 후사르들을 이끌고 현장에 도착해 이들을 몰아내고 50명의 드래곤들을 생포했다. 5월 1일, 프랑스 분견대가 다시 괴팅겐에서 모링겐으로 진군했지만 뤼크네르에게 격파되어 짐의 일부를 버린 채 패주했다. 5월 5일, 뤼크네르는 프랑스 기병 300명이 괴팅겐에서 출격했다가 중도에 모링겐에서의 패전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후퇴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들을 추격하기 위해 100명의 후사르들과 함께 쫓아갔다. 그는 얼마 안가 그들을 따라잡아 뉴크위그 마을에서 격파하고 1명의 장교와 30명의 기병, 그리고 61마리의 말들을 포획했다.

6월 16일, 뤼크네르는 괴틍겐 요새 아래에서 적을 급습해 100명이 넘는 적병을 사살 또는 부상시키고 1명의 대위와 14명의 부사관들을 생포했다. 6월 29일, 뤼크네르의 경기병데는 베이저 강을 건너 베버룽겐을 향해 진군했다가 프랑스군의 반격이 임박하자 일단 후퇴하여 7월 2일 블룸베르크에 주둔했다. 7월 13일 아침, 뤼크네르는 후사르 부대를 이끌고 차세르 드 모네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선봉대가 진을 치고 있는 잔데르를 향해 공세를 개시해 리페로 몰아낸 뒤 후방으로 돌아갔다. 7월 17일 새벽, 아우구스트 프리드리히 폰 슈페르켄 장군이 파견한 군대와 합세한 뤼크네르는 리페를 지나 노이하우스에서 프랑스 선봉대를 공격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프랑스 선봉대는 길고 완강한 저항을 펼친 끝에 후퇴했고, 뤼크네르는 이 전투에서 150명의 프랑스군 포로들을 확보했다. 이후 프랑스 선봉대는 프란츠 크사버가 이끄는 군대와 다리에서 합세해 새 방어진을 쳤다.

7월 19일 브로이 공작 빅토르 프랑수아가 파견한 대규모 분견대가 노이하우스로 쳐들어오자, 뤼크네르는 후퇴를 개시해 7월 29일 블룸베르크로 행진했다. 7월 30일 저녁, 차세르 드 모네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 선봉대는 리프스프린지 근처에서 뤼크네르의 기병대에게 급습받았다. 이에 프랑스군은 근처의 울타리에 의지해 잠시 저항했고, 곧 구원병이 도착하면서 뤼크네르의 기병대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뤼크네르는 8월 1일까지 스트롬베르크 일대에 주둔했고 8월 11일 하멜른에서 베이저 강을 건너 프레이테크 대령의 군대와 합세했다. 8월 14일 아침, 뤼크네르는 비켄센에서 하멜른 수비대 2개 대대와 접점을 만든 후 데셀 고지 정상으로 올라갔다. 그는 프랑스 우익 부대에 자신의 후사르들을 파견하고 모든 경기병대를 프랑스 좌익 쪽으로 파견했으며 프레이테크 대령의 별동대를 예비대로 남겨놓았다. 뤼크네르 후사르 부대는 적 우익의 일부 분견대를 격파했고, 뤼크네르는 뒤이어 적에게 포격을 가해 전열을 흐트러지게 했다. 결국 프랑스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솔링 숲으로 후퇴했다.

8월 15일 오전 8시, 뤼크네르는 데셀 근처에 그의 군단을 집결시킨 후 오후 4시까지 우슬라로 진군했다. 그후 그는 소링 숲에서 나온 적을 향해 포격을 퍼부어 도로 숲으로 물러나게 한 후 스톡하우젠 중령이 이끄는 아이젠바흐 후사르 부대를 출격시켜 이들을 추격하게 했다. 프랑스군은 이 추격전으로 인해 44명의 장교가 전사해고 759명의 포로를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후 뤼크네르는 베이저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들을 모조리 파괴해 프랑스 주력군이 베이저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고자 획스터로 진군했다. 8월 17일, 그는 베이저 강 반대편에 있는 프란츠 크사버의 군단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이에 브로이 공작 빅토르 프랑수아는 1개 보병 여단을 크사버에게 파견해 뤼크네르가 증원군과 합세하기 전에 가능한 빨리 강을 통과하라고 지시했다.

8월 18일 새벽, 크사버 왕자는 명령을 받들어 야음을 틈타 강을 도하해 뤼크네르의 군단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뤼크네르는 이미 상황을 파악하고 후퇴한 뒤였기에 그들은 적을 만나지 못했다. 이후 뤼크네르는 자신을 추격하는 프랑스군을 피해 동쪽으로 후퇴하다가 8월 25일 괴팅겐 요새 아래에서 프랑스군 보급부대를 기습하려 했지만 적이 인근에서 포격을 가하는 소리를 접하자 계획을 포기하고 9월 중순에 힐데스하임으로 후퇴했다. 이후 10월 10일 하멜른 근처의 하스텐벡 숲에 진을 친 그는 그날 밤 11시에 야음을 틈타 힐데스하임 쪽으로 행진했다. 10월 12일, 뤼크네르와 브라운슈바이크 공자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프랑스군의 위협에 시달리는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을 구원하기 위해 파인 인근에 이르렀다. 10월 13일 아침, 뤼크네르와 브라운슈바이크 공자는 증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을 향해 나아갔다.

10월 13일 밤에서 14일 새벽, 브라운슈바이크 공자는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으로 가는 길목인 외페르를 차단하고 있는 프랑스군을 1,000명을 기습해 10명의 장교와 300명의 병사, 그리고 대포 1문을 포획했다. 이후 뤼크네르는 아무 탈 없이 파인으로 진군했고, 브라운슈바이크 공자도 곧 6개의 보병 대대를 이끌고 브라운슈바이크로 진군했다. 10월 15일, 뤼크네르는 힐데스하임에서 흩어져 있떤 병사들을 결집시킨 후 11월 4일 리터에 이르렀다. 이후 프랑스군과 한동안 대치하던 그는 적이 후퇴하자 이를 추격해 11월 13일 노르트하임 인근에서 뤼메 강을 건너고 있던 스탱빌 공작의 프랑스군 후위를 기습해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이후 뤼크네르는 그동안의 공적으로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12월 초 아인베르크에서 겨울 숙영지를 건설했다.

1762년 4월 6일, 뤼크네르는 히링슈타트에 500명의 후사르 부대를 배치했다. 이 사실을 알게된 로스트랑즈 후작은 즉시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 1,800명의 기병대와 2,000명의 보병대를 이끌고 괴팅겐에서 출격했다. 뤼크네르는 이러한 사실을 척후병으로부터 확인받은 뒤 1,60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진격했다. 뒤늦게 이를 깨닫게 된 프랑스군은 도로 괴팅겐으로 퇴각했지만, 뤼크네르는 이들을 추격해 적병 30명을 죽이고 80명의 포로와 100마리의 말을 포획했다. 이후 그는 5월 15일부터 22일까지 연합군과 함께 아인베르크에서 하스테로 진격했다. 5월 23일이나 24일, 뤼크네르는 괴팅겐을 향해 정찰대를 파견했다. 이 정찰대는 얼마 후 프랑스 선봉대를 만나 교전을 벌여 80명의 병사들과 말 100마리를 포획했다. 6월 초, 뤼크네르와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브라운슈바이크와 하노버 지방을 지키기 위해 아인베르크와 획스터에 주둔했다.

6월 21일, 프랑스군이 프란츠 크사버가 이끄는 별동대를 베이저 강 동쪽으로 파견해 하노버를 침공하게 했다는 소식을 접한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뤼크네르 장군의 분견대를 파견했다. 뤼크네르는 6월 22일 밤부터 6월 23일까지 6개 척탄병 대대, 드래곤 4개 부대, 후사르 8개 부대를 이끌고 진군하여 6월 23일 정오 즈음에 우슬라에 도착했다. 이후 베이저 강을 건너 고츠뷔렌에 이른 그는 6월 24일 빌헴스타흘 전투에 참가했다. 그 후 프랑스군이 패주하자, 뤼크네르는 6월 28일 연합군 선봉대 12,000명을 이끌고 출격해 7월 6일 샤프호프에서 작년에 수차례 접전을 치렀던 차세르 드 모네 장군을 생포했다. 7월 13일, 뤼크네르의 군단은 펠스베르크 근처의 프랑스 전초기지를 공격하기 위해 바일드룽겐에 이르렀다. 그러나 펠스베르크 근처에 주둔한 적의 군세가 예상보다 강하자, 뤼크네르는 홈베르크에서 잠시 멈춰섰고 7월 14일 적의 좌측 방면으로 우회기동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7월 15일 우테르하우젠으로 후퇴했다.

이후 뤼크네르는 뉴케르헨 근처에 진을 쳤다가 7월 26일 헤스펠트로 진격해 오후 9시에 공세를 개시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뤼크네르는 풀다로 진군해 그곳에 남아있던 프랑스군 수비대 400명을 생포하고 많은 양의 보급품, 포도주, 소 300마리, 7만 플로린들을 포획했다. 이후 그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와 함께 라인강 상부 지대에 있는 프랑스군과 여러 차례 소규모 전투를 치렀고, 11월 평화 협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지겐하인을 포위한 아군을 엄호하고 그곳으로 기동 중이던 프랑스 경 기병대를 격퇴시켰다. 그후 프랑스가 파리 협약을 체결하고 전쟁에서 이탈하기로 하면서 전쟁은 마침내 종결되었다.

2.3. 프랑스군 장성

7년 전쟁이 끝난 후 뤼크네르 후사르 부대는 해체되었고, 뤼크네르는 홀슈타인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몇년간 살았다. 그러다가 1767년, 그는 프랑스 육군의 초대에 응해 프랑스로 가서 중장으로 임명되어 부르고뉴 연대의 지휘권을 맡았다. 이후 그는 1778년 루이 16세에 의해 남작의 작위를 수여받았고 1784년 덴마크 왕에게 백작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그러던 중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1790년 7월 10일 프랑스 정부에게 프랑스 시민권을 발급해줄 것을 청해 승낙을 얻어냈다. 이후 그는 1791년 프랑스군 원수가 되어 프랑스 육군 총사령관을 맡았다.

1792년, 퀴르네르는 라인강 육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플랑드르를 향한 첫 작전을 수행했다. 이때 클로드 조제프 루제 드 릴은 라인군의 행진가 로써 라인군을 위한 전투가를 작사, 작곡해 사령관 뤼크네르에게 헌정했다. 훗날 이 곡은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가 되었다. 이후 뤼크네르는 플랑드르의 여러 도시들을 공략했지만 곧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의 역습에 패전하고 릴을 향해 후퇴해야 했다. 이후 라파예트가 망명하자, 뤼크네르는 샤롱쉬르샹파뉴의 예비군을 창설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국민 공회는 그가 적을 상대로 너무 소극적이라고 판단했고 피에르 쇼데를로 드 라클로 장군에게 뤼크네르를 보좌하게 했다가 얼마 안가 그를 대신해 군대를 이끌 것을 명령했다. 이에 자존심이 상한 뤼크네르는 총사령관 직에서 사임한 뒤 자신에게 연금를 지급할 것을 요구하기 위해 파리로 향했다. 그러나 이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국민 공회는 그가 국가에 반기를 들었다며 불온인사로 낙인찍고 긴급 체포한 뒤 혁명재판소에 기소했다. 그는 재판에서 무죄를 호소했지만 끝내 사형 판결을 받고 1794년 1월 3일 파리에서 단두대에 의해 참수되었다. 향년 71세. 그 후 1795년 뤼크네르의 아들은 아버지의 복권을 정부에 요청해 승낙을 얻어냈고, 뤼크네르가 프랑스에서 획득했던 영지들은 가족들에게 돌아갔다.

3. 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