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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7-03 15:18:47

니시자와 히로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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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자와 히로요시(西澤廣義 : 1920년 1월 27일~1944년 10월 26일)

1. 개요2. 누에를 치던 산골 소년3. 해군 입대와 조종사에 도전

1. 개요

일본 해군 전투조종사로, 태평양 전쟁에서 연합군 항공기 120대를 격추시켰다고 전해지는 에이스 파일럿.

2. 누에를 치던 산골 소년

1920년 1월 27일, 퇴역군인의 4남 1녀의 자식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 자란 고향은 나가노현의 카미미노치군 오가와촌(南小川村)로, 뒤로는 시로우마 산자락을 끼고 아래로는 시나노 강이 흐르는 산골 마을이었다. 그의 부모들은 농사를 짓는 한편 누에를 치는 양잠 일에 온 식구가 매달려 있었다. 니시자와 소년은 철도 들기 전부터 누에들에게 뽕잎을 먹이는 것을 배웠고 머리가 굵어진 후부터는 소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뽕잎을 따서 나르거나 견사를 뽑는 등 비단을 짜는 일 전반에 관해 배우며 식구들을 도왔다고 한다.

1934년 3월에는 미나미오가와 소학교(南小川小学校) 고등과를 졸업한 니시자와 소년은 14살이 되었고, 4월에는 아버지의 권유와 연줄로 오카야에 있는 생사 공장에 취직하면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1934년의 지구촌은 겉보기로는 평화로와 보였지만, 유럽에서는 나치즘 파시즘의 기세가 날로 커지고 있었고 일본 육군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일본 영토의 3배나 되는 만주를 집어삼켰고, 일본 해군도 길었던 해군 휴일의 침묵을 깨고 해군 조약을 휴지통에 던져넣을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 무렵 일본 해군은 군축 조약에서 대수롭지 않게 취급되는 항공모함의 가능성을 탐구하면서 해군 항공대를 확충시킬 준비를 서서히 하고 있었다. 비행정이나 수상기 정도를 함재기로 굴리던 일본 해군항공대는 전보다 훨씬 많은 비행기와 조종사가 필요해졌다.

3. 해군 입대와 조종사에 도전

니시자와가 16살이 되었을 때는 일본 해군은 조약의 일방적인 파기를 외치고 본격적으로 항모 기동부대를 창설하고 건함 경쟁과 함대 전력 확충에 나서고 있을 때였다. 저잣거리에는 해군 비행사를 모집하기 위한 포스터가 온통 나붙고 귓전에는 군함행진곡이 쾅쾅 울려퍼졌다. 니시자와가 다니던 공장 같은 노동자 밀집 구역에는 아예 해군 모병사관이 순회하면서 조종 연습생에 지원하라며 해군 입대를 독려했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니사자와는 눈부시게 흰 해군 정복을 입고 해군단검을 찬 모병사관이 부러웠고, 반복되는 지겨운 노동에서 벗어나 드넓은 하늘을 날고 싶어졌다. 5월에 해군 비행예과연습생 시험에 응시한 그는 1936년(쇼와 11 년) 6월 1일, 요코스카 항공대(横須賀航空隊)에 을종 비행 예과련 7기생(204 명)으로 합격하여 해군 4등 항공병이 되었다.

당시 일본 해군의 조종 훈련 과정은 길고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 2년 후인 1938년 8월 15일에 가스미가우라 항공대(霞ケ浦 海軍航空隊)에서 육상비행기반 71명 중에서 16등으로 교육을 수료한 그는 전투기 수료자 20명 중 하나로 선발되었다. 해군항공대의 체치기가 계속되는 동안 예과련으로 선발된 인원 10명 중에 1명만 전투기 승무원이 된 것이다. 일본 해군이 태평양 전쟁 서전에 보인 활약은 모두 이런 해군의 체치기를 통과해 고르고 골라 뽑은 인재들이었던 것이고, 니시자와 히로요시 일등수병 또한 그중에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