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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6 22:03:52

노엘 호사

<colbgcolor=#dddddd,#010101><colcolor=#000000,#dddddd> 노엘 호사
Noel Rosa | Noel de Medeiros Rosa
파일:노엘호사.jpg
출생 1910년 12월 10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사망 1937년 5월 4일(향년 26세)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국적
[[브라질|]][[틀:국기|]][[틀:국기|]]

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성장2.2. 데뷔, 스타가 되다2.3. 삼바 디스전2.4. 결핵, 사망
3. 사생활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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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질 싱어송라이터. 일명 브라질 대중가요의 모차르트로, 27세란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었음에도 250곡이 넘는 왕성한 작곡 활동으로 현재까지도 기억되고 있는 인물이다.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1910년 12월 11일, 리우데자네이루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노엘 호사. 하지만 출산이 난산이었던 탓에 집게를 썼으나 이로 인해 얼굴에 부상을 입었는지 턱이 매우 작고 삐뚤은 모습을 취하게 되었다.[1]
Batuque é um privilégio
Ninguém aprende samba no colégio
바투케[2]는 특권이네
고등학교에선 삼바를 배우는 사람이 없어
훗날 작곡된 Feitio de Oração의 구절.

10대가 된 노엘 호사는 만돌린을 배우게 되고 음악과 삼바에 흠뻑 빠지게 된다. 만돌린은 곧 기타로 바뀌게 되고 의학 공부를 하면서도 밤에는 술집에 가서 삼바 가수들과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는 생활을 하였다.

2.2. 데뷔, 스타가 되다

Bando de Tangarás - Vamos Fallá do Norte
1929년, 어느 정도 가수들 사이에서 이름이 알려진 노엘 호사는 Braguinha와 가수인 Almirante가 주축이 된[3] Bando de Tangarás(탕가라스의 갱)에 합류했다. 이렇게 첫 앨범도 녹음하고 솔로 활동으로도 'Minha Viola'와 'Festa No Céu'를 녹음해 발표하는 등 슬슬 활동을 시작하며 기세를 타기 시작했다.

1931년, 끝내 의과 대학에 입학했다.[4] 하지만 이미 자신의 길은 의사가 아닌 음악에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몇달만에 자퇴하고 새로운 신곡을 발표한다.
Com que Roupa?
그 노래가 바로 'Com que Roupa?'. 유쾌하면서도 신랄한 가사, 밝고 경쾌한 멜로디로 이 노래를 통해 노엘 호사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가사는 가난하고 남루한 브라질 사람이 갑작스럽게 초대 받은 파티에 무슨 옷을 입고 가냐며 고민하는 내용으로 가사를 작사한 1929년 대공황 직후 브라질의 경제 상황을 풍자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대중들의 많은 공감을 받았다.
Positivismo
노엘 호사는 정형적인 시를 쓰는 것이 아닌, 그 틀을 깨는 작사가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매우 뛰어난 문학적 솜씨를 발휘했으며, 어떨땐 뛰어난 지식을 선보이다가도 신랄하게 풍자하기도 하는 작사가이자 가수였다. Positivismo는 실증주의를 말하는 노래로 이 노래를 함께 작사한 오레스테스 바르보사는 노엘 호사에게 문학의 왕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2.3. 삼바 디스전

Wilson Batista - Lenço no pescoço Noel Rosa - Rapaz folgado
1933년, 노엘 호사는 브라질 삼바 역사에 길이 남을 디스전을 벌이게 된다. 백인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데다가 의과 대학을 중퇴하는 등 상당한 엘리트 코스를 밟은 노엘 호사는 자연스럽게 밑바닥에서 성장한 흑인 가수인 윌슨 바티스타와 완전히 대척점에 있었고 끝내 윌슨 바티스타는 Lenço no pescoço로 노엘 호사를 디스하며 디스전의 서막을 올렸다. 둘은 9곡의 명곡을 통해 다양한 디스를 펼쳤고 윌슨 바티스타의 Terra de Cego를 마지막으로 노엘 호사가 반격하지 않으며 디스전은 끝이 났다. 몇년 후 노엘 호사가 사망하며 윌슨 바티스타가 후회했다는 후일담이 있으며 현재는 둘의 디스전의 노래를 쭉 부른 앨범도 존재한다.

2.4. 결핵, 사망

Quem sofreu mais que eu não nasceu
Com certeza Deus já me esqueceu

Mesmo assim não cansei de viver
E na dor eu encontro prazer
나보다 고난을 더 많이 겪은 자는 태어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은 날 이미 잊으셨느니라

하지만 난 삶에 지치지 않았고
고통 속에서도 즐거움을 찾았네
말년인 1937년에 작곡한 'Eu Sei Sofrer'의 구절
A cruel realidade
Ensinou-me o interesse
Mas todo o bem dura pouco
Todo mal tem sempre fim
이 잔인한 현실이
나에게 관심을 주고 있지만
모든 좋은 것은 오래 가지 않으며
모든 나쁜 것은 항상 끝나네
'Amar com sinceridade'의 구절

Com Que Roupa 이후 노엘 호사는 매년 수십곡의 노래를 작곡하고 발표하며 활발하고 왕성한 활동을 했으나 1930년대 초에 폐결핵에 걸린 상태였다. 도저히 견디지 못한 노엘 호사는 요양을 위해 벨루오리존치로 이사했지만 방탕한 사생활이 겹치며 몸은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어 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절대 작곡 활동을 멈추지도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죽어가는 것을 본인도 알고 있었는지 후기 노래들 중에는 상당히 우울한 가사도 많이 찾아볼 수 있는 편이다.
영화 Noel, poeta da Vila에서 묘사된 그의 죽음[5]
본인의 고통을 작사에 쏟아내던 그였지만 고향인 리우데자네이루에 돌아오자 몸이 갑자기 건강해진 것 같았기에 완치된 것 같다며 약을 끊고 즐겁게 지내려고 했지만 며칠만에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한채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고작 26세라는 나이였다.

3. 사생활

Dama Do Cabaré
노엘 호사의 사생활은 매우 난잡했다. 수많은 여자친구가 있었고, 수많은 유부녀의 애인이기도 했다. 1934년, Lindaura Martins와 결혼했다. 의외로 아내는 사랑한 것 같았지만 불륜을 안하겠다는 건 아니었고, 카바레의 매춘부 Juraci Correia de Araújo, 일명 쎄시(Ceci)를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상단의 'Dama Do Cabaré'는 쎄시에게 바친 노래로 수년간의 연애 끝에 노엘 호사는 쎄시와 결혼하고 싶어했지만 스캔들인데다가 가족도 당연히 반대할 것이었기 때문에 대신 집을 주고 그곳에서 같이 사는 것으로 대신했다. 하지만 쎄시는 본인이 살기 위해서 노엘 호사에게만 의존하고 싶지 않았고 차라리 아내로써 살고 싶었기 때문에 결국은 노엘 호사와 헤어졌다.[6] 비슷한 시기에 노엘 호사는 아버지의 죽음[7]까지 겹치며 우울증으로 몇달을 보냈다. 아내도 뚜껑이 열려 이혼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고[8] 아이가 생기나 했지만 유산, 아내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자 노엘 호사는 아버지가 되지 못했다는 슬픔과 죄책감에 고생했다고 한다.

술도, 담배도, 여자도 너무나 사랑했기에 결핵이 악화되어 요양을 갔으면서도 여자와 술과 담배는 그와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물론 노래도 함께였지만, 그의 방탕한 생활은 결핵을 급격히 악화시킨 주요 요인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9]

4. 여담


[1] 현재는 유전병인 피에르 로빈 증후군으로 추정하는 중이다. [2] 타악기를 동반한 일부 아프리카-브라질 춤의 총칭. [3] 나머지 멤버들의 경우는 Braguinha가 영입한 아마추어들이다보니 비중이 떨어졌다. [4] 노엘 호사의 천재성을 알 수 있는 부분. 열정적으로 음악 활동을 했음에도 의과 대학에 입학할 정도의 성적을 받아냈다는 것이다. [5] 죽기 직전, 절친에게 부탁해 자신이 사랑한 여인에게 들려달라며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하는 장면에서 전환되고, 이 장면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6] 노엘 호사의 쎄시에 대한 사랑이 질투로 변질된 것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7] 자살이었다. 노엘 호사의 아버지도 본인의 어머니, 즉 노엘 호사의 친할머니의 자살로 정신적으로 많이 괴로워했었다고 한다. [8] 정작 노엘 호사는 그렇게 불륜을 했으면서도 아내를 사랑한다며 이혼하지 않았다. 얼마 안 가 아이가 생겼던 걸 보면 진짜로 사랑한 건 맞은 것으로 보인다.. [9] 실제로 1932년까지만 해도 초기이니 깨끗하게만 산다면 괜찮을 것이란 의사의 조언도 있었으나 정작 본인은 사생활을 그대로 고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