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농민당의 포스터 | |
[ruby(労, ruby=ろう)][ruby(働, ruby=どう)][ruby(農, ruby=のう)][ruby(民, ruby=みん)][ruby(党, ruby=とう)] ([ruby(労, ruby=ろう)][ruby(農, ruby=のう)][ruby(党, ruby=とう)]) | |
슬로건 | |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ff0000> 영문 명칭 | Labour-Farmer Party |
한글 명칭 | 노동농민당 |
창당일 | 1926년 3월 5일 |
해산일 | 1928년 4월 10일 |
전신 | 농민노동당[1] |
후신 | 노농당 |
대표 | 스기야마 아소지로 -> 오야마 이쿠오 |
이념 | 사회주의 |
정치적 스펙트럼 | 좌익 |
당원 수 | 7, 967명 (1926년)[2] |
해산이유 | 결사 금지로 인한 강제 해산 |
언론지 | 노동농민신문(労働農民新聞) |
[clearfix]
1. 개요
일본 제국의 무산정당.2. 역사
2.1. 결성과 우파·중간파의 탈퇴
1926년(다이쇼 15년) 3월 5일에 세워져, 전년 12월에 결성된 전신인 농민노동당이 공산주의와 연결되어 있다는 의혹으로 당일 금지되었기에, 당초에는 극좌파를 배제한 형태로 창당되었다. 중앙집행위원장에는 일본농민조합위원장이었던 스기야마 모토지로가 취임한다. 그러나, 창당 후에 지방 지부가 조직되어 가는 과정에서 좌파가 유입, 친공산주의 입장을 취하는 좌파 지방당원과 반공주의 입장을 취하는 우파의 간부가 대립하고, 1926년(다이쇼 15년) 12월에는 우파가 탈당하여 사회민중당(위원장은 아베 이소오)를 결성했다. 전후로 중간파가 일본 노농당(후의 위원장이 아소 히사시)을 결성했다. 노동농민당(위원장은 오야마 이쿠오)은 좌파가 주도권을 잡았다.2.2. 제1회 보통선거에서의 약진
분열 후의 노동농민당은 오야마 이쿠오 위원장, 호소사코 가네미쓰 서기장이 지도하고, 대 중화민국 비간섭·노동법 제정 등의 운동을 진행했다. 최초의 보통선거가 된 1928년(쇼와 3년)의 제1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권력의 간섭은 엄격했고, 가가와현에서 입후보한 오야마 이쿠오 진영에 대한 탄압은 강렬했다. 이때의 현지 운동 선수로서, 당시 농민 조합의 지도에 들어간 후의 소설가 시마키 겐사쿠가 있었다. 그러나, 전국에서 무산 정당 최다인 28만 표를 획득하고, 교토부에서 미즈타니 나가사부로와 야마모토 노부하루의 2명의 당선자를 낸다. 그러나 야마모토는, 치안유지법의 개정안을 둘러싸고 제국 의회에서의 질의로 특별고등경찰(특고)의 고문행위를 폭로한 적도 있어, 우익의 반발을 받아, 의회 개최 중에 우익 사상을 가진 청년에게 암살되었다.2.3. 결사 금지와 그 후
선거 직후의 일본 공산당원이 대량으로 검거되는 3.15사건이 일어나, 공산당 활동가가 많은 노농당으로부터의 입후보자로 출마한 것을 가지고, 노농당은 결사 금지 처분이 되었다. 그러나 결사 금지 직후에 오야마·세사코 등은 '백도해산·백도결당'을 내걸고 '신당 조직 준비회'를 결성, 노농당 재건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그 후 공산당계와의 대립을 거쳐 신로농당 창당에 이른다).그 후, 노동 농민당의 흐름은, 중간파·우파에 합류하여 사회대중당에 참가하는 자, 노농무산 단체 협의회를 거쳐 좌파의 일본 무산당에 참가하는 자, 일본공산당에 참가하는 자와 갈라졌지만, 전후에는 그 대부분이 일본사회당을 결성, 사회당 좌파라고 불리는 그룹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