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일제강점기 제주도 북제주군 출생, 사회주의 항일운동가이자 조선로동당 서울시당 위원장. 호는 현우(玄友)이며 창씨개명한 이름은 본 이름에서 택 자를 추가한 김택응빈(金澤應彬)김삼룡 계열의 사회주의자이다. 6.25 전쟁이 나자 1950년 8월 북한 치하에서 조선로동당 서울시당 위원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연합군이 서울을 수복한 채로 휴전하여 패전 책임을 물어 남로당계가 숙청될 당시 같이 숙청당했다. 그 이후로 전하는 말은 없다
임경석의 역사극장 주인공이 되었다. 제주 학생 김응빈은 왜 일본인 교사를 구타했나
2. 일생
1930년 3월 제주공립보통학교를 나와 4월에 제주공립농업학교(현 제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931년 3월 제주공립농업학교 재학중 동맹휴학에 참가하여 제주도경찰서에 검거되었다. 1933년 일본 오사카(大阪) 나니와(浪花)상업학교 3학년에 편입되었다. 1936년 1월 도쿄(東京)에서 목포유학생친목회 강연회에 참석하였다가 한때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었다. 그해 3월 나니와상업학교를 졸업하고 4월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 정치경제과에 입학하여 1939년 3월 졸업했다. 그 뒤 한국으로 귀국하여 경성콤그룹에 가담하고 섬유노조 책임자가 되었다. 그러다가 1941년 말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3. 광복 이후의 행적
1945년 9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준비대표자회의에서 전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하반기에 조선공산당 서울시책을 지냈다.권력 잡으면 반박헌영파를 다 죽여버릴거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공산당 연석회의에서 반박헌영파에게 욕을 먹는다. 이 회의에서 제일 욕먹는 것은 그와 친한 김삼룡.
1948년 소련 공산당 최고당학교에 유학했다. 1950년 8월 조선인민군 점령하에서 조선로동당 서울시당 위원장을 지내고, 9월에 금강정치학원 원장이 되었다. 11월 남조선유격대 제1지대장이 되어 약 1000명의 서울, 경기도 출신 유격대원을 지휘했으나, 1953년 8월 5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에서 박헌영 등과 같이 종파분자로 지목되어 당에서 제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