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9fdaee,#104b60> 김월송 金月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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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7년 5월 15일 |
조선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임하면 천전리 (현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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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0년 10월 9일 (향년 72세)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금강산 구룡폭포 | |
묘소 | 애국렬사릉 |
1. 개요
구한말의 의병장, 북한의 정치인. 본명은 김형식(金衡植).2. 생애
자는 응엽(應燁), 초명은 회식(晦植)이고 호는 월송(月松)이다. 고종 14년(1877)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내앞마을)에서 백하(白下) 김대락(金大洛)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 병수(秉銖)의 딸이다. 그는 내앞마을의 중흥조 김진(金璡)의 둘째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의 12대 손이다.어려서 부터 한학을 익히고 유학을 가학으로 배웠다. 조부 우파 공으로부터 한학과 글씨를 전수하여 능문능필(能文能筆)하였을 뿐 아니라. 풍채는 헌헌장부(軒軒丈夫)로서 육척장신이었으며, 문, 사, 철을 두루 갖춘 문중의 촉망받는 젊은이였으며 1902년 형인 명식(明植)이 일찍 사망하자 형식은 백하 김대락의 유일한 아들로서 협동학교 운영과 만주망명 등 독립운동으로 닥쳐오는 집안의 풍운과 고난을 헤쳐나가는 기둥이 되었다.
1907년 내앞마을에 협동학교가 설립되자, 월송은 교사에 취임하였다. 그가 애국 계몽운동기 혁신적인 중등학교 과정을 가르칠 정도로 신학문을 어떻게 익혔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부친 백하 김대락이 신사상을 받아들인 것이 아들 월송의 간곡한 진언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신문화에 대한 개명의식이 강했다.
학교의 이름이 協同이 아니라 協東學敎로 된 이유는 개교 당시, 안동의 동쪽 7개면(임동면, 임현내면, 임북, 임서, 길안, 동후, 와룡면)의 인력과 재력을 협력하여 설립했다고 해서 協東으로 지었다 한다. 내앞마을 가산서당에서 출발한 협동학교는 설립 1년 후에 경북 북부지방에서 몰려드는 유학생으로 넘쳐나 숙식을 해결할 방도가 없었다. 그때 월송의 부친 김대락 공이 기와집 50여 칸의 저택을 교실과 기숙사로 제공하고 자신은 옆집 초가에서 생활하니, 안동과 원근에 칭송이 자자하였다. 강의실과 기숙사를 함께 갖춘 협동학교는 전국 어느 학교에 못지않는 훌륭한 시설이었다.
당시 황성신문 1909년 3월 19일자 논설은 “근일 안동에서 보내온 소식에, 임하면 천전리에 사는 김대락 씨가 교육을 일으킬 사상으로 자기소유의 새로 지은 50여 칸 가옥을 내놓아 교사를 이루게 하고 자기는 작은(초가)집에 이주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나는 이것으로 족하다.”라고 하였다.
더욱 주목할 만한 사실은 문중의 원로 김대락과 대종손 김병식(초대 교장)이 협동학교 신교육의 선봉장이 됨으로써 천전 의성김씨 문중을 혁신유림으로 전환시키는 결정적 구실을 했고 독립운동의 산실이 되었다는 점이다. 같은 시기(1908년) 고모부 석주 이상룡이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결성하자 월송은 종형 근암 김만식과 함께 대한협회의 계몽운동과 협동학교 교육에 온 정성을 쏟았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서간도로 망명을 계획하고, 그해 12월 24일(음) 그 추운 겨울에 66세의 연로하신 아버지를 모시고, 만삭이 된 질부와 질녀 그리고 대소가 식솔 30여 명을 거느리고, 내앞(川前)마을에서 출발하여 서울에서 10여 일 묵은 후 정월 초에 금천(황해도 소도시)에서 신의주는 기차로, 압록강은 빙판을 걸어서 천신만고 끝에 만주 환인현 횡도촌에 도착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동시 법흥동 임청각에서 살던 고모부 이상룡의 가족과 그 외 내앞마을 일송 김동삼 가족과 안동일원의 여러 문중이 뒤따라오고, 평해에서 황만영 가족과 주진수 가족 외 여러 집. 영덕군 영해에서 박경종 외 일족과 밀양에서 윤세복(맏아들 윤필한이 뒤에 월송의 둘째 사위가 됨) 가족, 상주에서 강남호 가족 외 여러 집이 이주해 왔다.
서울에서도 참판 이석영& 이회영 6형제, 이동녕, 이관직 등 그 외 여러 집과 많은 지사들이 모여들었다. 서로 의론하여 흥경. 통화. 유하. 해룡. 휘남 등에 정착키로 하였으나 유하현 삼원포에 주로 살았다.
삼원포 시가지에서 약 20리 떨어진 추가가 대고산 아래서 이상룡, 이회영, 이동영, 김창환 부자 등 300여 명이 노천회의 결과, 농업개발과 군사교육, 기타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교육을 목표로 삼은 경학사를 조직하고, 이어서 신흥강습소(뒤에 신흥중학교, 신흥무관학교로 발전)를 세워 청년들을 독립운동의 중견인재로 양성하기로 했다.
상해임시정부에도 관여하다 만주에서 김일성의 부친인 김형직을 만난 김월송은 1930년부터 해방 때까지 중국 동북지방에서 반일지하투쟁을 통해 항일유격대 원호사업을 펼쳤다. 조선독립동맹 북만주지부 책임자로 활동한 기록이 남아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김월송은 조선의용군의 정당인 독립동맹 위원장 김두봉의 초청을 받아 조선독립동맹 북만주지부 책임자의 자격으로 평양에 갔다. 1946년 완전히 월북해 애국투사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김일성은 1946년 6월 21일 김월송을 만나 "선생은 청년시절부터 조선 독립에 뜻을 두고 국내외에서 일제를 반대하여 용감히 싸운 애국자"라며 "선생은 저를 믿고 저는 선생을 믿고 서로 합심하여 하루속히 부강한 민주주의 새 조선을 건설하자"고 말했다.
하지만 김월송이 남한에서 통일적 민주주의 정부 건설을 위해 내려보내달라고 제의하자 "테러와 학살이 감행되는 남조선에 당장 내보낼 수 없다. 여기서 우리와 함께 일을 하다가 정세가 허락되면 남조선에 나가시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만류했다.
1948년 4월 19일 평양에서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등이 참석한 남북연석회의에 개회식의 의장(사회)을 맡았다.
북한 정권 수립 이후에는 금강산 장안사 국영양로원에 휴양 중 6.25 전쟁 와중인 1950년 10월 유엔군의 북진 소식이 전해지자 구룡폭포에서 투신자살하였다. 이때 절명시를 마지막으로 남겼다고 한다.
此山應有仙 이산에 응당 신선이 있어도
肉眼不分看 육안으로 분간하기 어렵다
白髮雲聳間 백발이 구름 사이로 솟으니
人謂我神仙 사람들은 나를 신선이라 이르네
肉眼不分看 육안으로 분간하기 어렵다
白髮雲聳間 백발이 구름 사이로 솟으니
人謂我神仙 사람들은 나를 신선이라 이르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으며 1990년 8월 15일, 처음으로 조국통일상을 추서받았다. 2016년 조선의 오늘에 김월송 찬양글이 올라오는 등 현재에도 북한에서 좋은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조동걸 국민대 교수는 그를 두고 "군자 같은 인격자"라고 평가했다.
3. 참고문헌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
- 조선대백과사전.
- 월간 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