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김외덕(金外德) |
본관 | 청도 김씨 |
출생 | 1912년 10월 2일 |
경상남도 양산군 동면 석산리 (현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석산리)[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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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93년 9월 30일 |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곡동 부곡반도맨션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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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김외득은 1912년 10월 2일 경상남도 양산군(현 양산시) 동면 석산리에서 태어났다.일찍이 상경하여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그는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1930년 3월 경성부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했다가 학교 당국으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고 귀향하였다.
그후 1931년 4월에 조직된 양산농민조합에 가입하여 소년부원으로 활동하였다. 양산농민조합은 1932년 2월 20일 양산사회단체회관에서 제3회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소작권 영구확립·지세 및 공과금의 지주 부담·소작료 4할 납부 등을 결의하였으나 신영업(申榮業)을 비롯한 16명의 조합간부들이 곧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에 그는 김장호(金章浩)와 함께 검거된 조합간부들을 구출할 것을 결의하고 최학윤(崔學潤)·최해금(崔海金)· 최달수·김태근(金泰根) 등 3백여명의 조합원들을 이끌고 그해 3월 16일 양산경찰서에서 조합간부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운동을 폈다. 이때 일본 경찰의 발포로 인하여 조합원 윤복이(尹福伊)가 순국하였고, 일단 양산협동조합 사무소로 피신한 조합원들은 다시 검거된 조합간부들을 호송하는 도중에 구출할 계획을 세웠으나 일본 경찰의 급습을 받아 그를 비롯한 170여명의 조합원이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1932년 10월 13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죄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
그후 1993년 9월 30일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곡동 부곡반도맨션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