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07 16:32:02

김영원(독립운동가)

<colbgcolor=#0047a0><colcolor=#fff>
파일:김영원.jpg
출생 1853년
전라북도 임실군 운암면 선거리
(現 전북특별자치도 임실군 운암면 선거리)
사망 1919년 8월 26일 (향년 66세)
대구형무소
부모 부 김성집, 모 진주 하씨

1. 개요2. 생애3. 참고 문헌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53년경 전라북도 임실군 운암면 선거리에서 부친 경주 김씨 김성집과 모친 진주 하씨 하진팔의 딸 사이에서 출생했다. 자는 화경, 호는 원암 또는 삼혁당이며, 족보명은 김두희, 김병원이다. 계림군 김균의 현손 김기가 임실에 입향한 이래, 경주 김씨는 대대로 임실군에 세거하며 명문가로 자리잡았다. 고조부 김진욱 대에 그의 가계가 임실군 운암면 선거리로 이거하였고, 김진욱은 통정대부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증조부 김유정은 선략장군 병조참의를 지냈으며, 조부 김만현은 성균진사를 지냈다. 다만 부친 김성집은 관직을 지낸 바 없다.

김영원은 유학자 집안에서 자라며 전통 한학을 숙지하였고, 과거에 응시할 준비를 하였다. 1878년과 1879년에 무성서원 도내색장과 도내장의에 임명되었으며, 1879년 사직대제 제관으로 차정되었다. 그러나 1882년 과거 응시를 단념하고 선거리 시복동에 삼요정을 건립하여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때 박준승 한영태가 삼요정에서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박준승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 되며, 한영태는 천도교 임실교구장으로서 임실 일대의 3.1 운동을 지휘했다.

1873년 최시형이 임실군 조항치에서 동학을 가르칠 때 참석하면서 동학을 접했고, 1889년 2월 24일 동학에 입교했다. 1892년 삼례취회에 참여하였으며, 1893년 동학을 인정해 달라는 상소문을 조정에 올릴 때 함께 하였고, 보은취회에도 참여했다. 1894년 3월 24일 백산대회에서 기포자로 참여했으며,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참패한 뒤 회문산에서 6년간 칩거 생활을 하였다.

1894년 7월 천도교 접사에 임명되었고, 8월에 접주로 임명되었고, 1903년 북접 도접주로 임명되었다. 1904년 손병희의 지시로 천도교가 조직한 진보회에서 신생활운동의 일환으로 삭발을 추진했다. 이때 김영원 등은 임실 청웅면 남산리에서 500 명의 삭발식을 이끌었다. 또한 1906년 8월 15일 청웅면 양지리에 삼화학교를 건립했다.

삼화학교는 1909년에 폐교되고 천도교 교리강습소로 전환되었다. 이를 추진하기 위하여 사마재학교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추진위원장 및 재단이사 최승우 위원, 황희영, 박성근, 김영원, 박준승, 한영태 등은 1909년 12월에 천도교 347교리강습소로 개칭하여 학교를 다시 열었다. 초대 교리강습소장에 김영원을 임명하였고, 2대 황희영, 3대이종근을 거쳐 김영원은 4대 교리강습소장을 지냈다.

1907년 교령에 선임되었고, 1914년 천도교 임실교구장에 임명되었다. 이즈음 교주 손병희 주관으로 진행된 봉황각 연성 수련에 참여하기도 했다. 1916년 임실교구를 청웅면 양지리에서 임실읍 성가리로 이전했고, 김영원이 제6대 교구장을 맡아 천도교 포교 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한영태에게 임실군 천도교 교구장을 물려준 직후인 1919년 2월 27일, 임실군 운암면 지천리 천도교 교구실에서 최승우, 김영원, 한영태 등이 3.1독립운동 거사준비위원회를 개최했다. 이들은 봉화책, 선언서책, 동원연락책 등을 구분하여 각자 역할을 나누었고, 3월 1일 봉화를 신호로 3월 2일 일제히 각면 소재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제1봉화는 운암면 국사봉, 제2봉화는 청웅면 백련산, 제3봉화는 덕치면 회문산, 제4봉화는 삼계면 원통산, 제5봉화는 성수면 생암산, 제6봉화는 신덕면 치마산으로 정하였다. 실제로 봉화가 올랐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후 3월 2일 보성사에서 인쇄된 기미독립선언서가 전주를 거쳐 임실군 천도교 교구에 도착했다. 한영태는 즉시 강계대, 한준석, 최양옥[1], 박판덕, 우성오, 황성진, 박성근, 그리고 김영원 등 천도교 신자들을 통해 임실군내 각면에 배포하도록 했다.

김영원은 독립선언서 20매를 가지고 운암면 임석리, 선거리, 학산리 등지에 배포했으며, 독립만세시위를 벌이는 군중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4월 7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 이에 불복하여 공소하였으나 1919년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면서, 상고취의를 다음과같이 밝혔다.
조선의 독립은 단지 일본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다. 함께 화하고 덕을 같이하여 동양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내가 천도교를 믿음으로써 전도사를 담당하고 선언서 몇 장을 올려붙였는데, 1년 징역에 처해짐을 천만 억울하여 이에 상고하니 백방이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1919년 5월 29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면서 징역 1년이 확정되었다. # 이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19년 8월 26일에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김영원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3. 참고 문헌



[1]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은 최양옥과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