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5f5f5,#050505><colcolor=#333,#ddd> 김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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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71년 11월 4일 |
서울특별시 | |
사망 | 1991년 5월 2일(향년 20세) |
대구직할시 중구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 화상병동 301호 | |
사인 | 분신 |
학력 |
서울
대원고등학교 (졸업) 안동대학교 ( 민속학과/명예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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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학생운동가.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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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90년에 안동대학교 민속학과에 입학했고 학생회 산하 '민속문화연구회'를 결성해 초대 회장직을 역임했다. 이때부터 김영균은 본격적으로 교육문제와 사회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 동년 8월에 조국통일 범민족대회 통일선봉대로 참가하기도 했으며 여름 농촌활동에도 자주 참가했다.[1]
이후 우루과이 라운드 반대 집회에도 참석했으며 경북농민대회에서 마당극 '새벽을 밟으며' 공연을 진행했으며, 1991년 4월에는 민속학과 부학생회장과 솔뫼 교지편집위원회 대외사업부장을 겸임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했다.
이후 강경대 열사가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그에 대해 분개한 박승희 열사가 분신자살하는 등 운동권은 다시 한 번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김영균 역시 이에 호응하여 1991년 5월 1일 ‘고 강경대열사 추모 및 공안통치 분쇄를 위한 범안대인 결의대회’ 도중 ‘공안통치 분쇄, 노태우정권 타도’를 외치며 분신했다. 이후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화상의 정도가 심하여 생명이 위독한 상태였고 결국 분신 다음날 사망했다. 2001년 명예졸업장이 수여되었다.
[1]
당시 농촌 일손돕기 봉사활동은 운동권 사람들이 자주 참여했던 봉사활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