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98년 11월 7일 |
경상남도
밀양군 부내면 서문내리 (현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 서문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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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78년 4월 30일 (향년 79세) |
상훈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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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8년 11월 7일 경상남도 밀양군 부내면 서문내리(현 밀양시 내일동 서문안)에서 태어났다.1919년 3월 윤세주· 윤치형 등은 경기도 경성부에서 있었던 고종의 인산 행렬에 참여했다가, 우연히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귀향하여 이 사실을 밀양군 동화학교(同和學校) 교장 전홍표에게 전했다. 그리고 이들은 3월 13일 밀양면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의논했다.
이에 김소지는 전홍표의 지도에 따라 권재호·김병환(金鉼煥)·이장수(李章守)· 윤방우· 윤보은 등과 함께 밀양면사무소와 부북면사무소 등지에서 등사판을 몰래 빼내어 아북산(衙北山)에서 밤을 새워 수백 매를 인쇄하고, 수백 장의 태극기를 제작했다.
거사 당일인 3월 13일 오후 1시 30분, 그는 윤세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미리 준비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장터에 모인 수천명의 시위 군중들에게 배포하고는 시위대의 선봉에 서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1919년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78년 4월 30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김소지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