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金德生고려말 조선초의 무신.
2. 생애
고려시대의 무신이자 역시 조선 개국공신 중 한명인 김운보의 차남이다. 우왕 연간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송거신[1]과 함께 이방원을 따랐다. 그러다가 김덕생 인생에 결정적인 사건이 터진다. 낭장으로 있던 태조 4년, 정안군 이방원은 의안대군 이화와 함께 사냥을 나갔다가 표범을 만나게 된다. 이 때 낭장 송거신이 표범을 자기 쪽으로 유도하고, 김덕생은 그 표범을 쏘아죽인다. 이에 대한 고마움으로 이방원은 둘에게 말을 선물했고, 태조도 말을 선물한다. 조선왕조 실록 태조4년기사그리고 김덕생의 생전 기록은 여기서 끝난다. 조선왕조 실록에서는 추증되기 전 김덕생을 호군(護軍)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이 추증된 관직인지 죽기전 관직인지는 알 수 없다.
3. 이후 공식적 기록
-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2번의 사건이 벌어지는데, 바로 1차 왕자의 난과 2차 왕자의 난이다. 이 때, 1차 왕자의 난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이 임명되고, 2차 왕자의 난으로 좌명공신(佐命功臣)이 임명되는데, 김덕생과 송거신은 모두 이 명단에 없다. 이 때문에 송거신은 분명하게 이 사건에서 이방원의 직접적 부하로 활동하지 않았고, 김덕생의 경우는 활동을 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생사도 불분명하다. 그리고 태종 1년, 좌명공신을 추가로 임명하면서 송거신이 4급 공신으로 임명된다. 이유는 순전히 표범사살사건 때문이다. 김덕생의 이름은 여전히 없다.
- 태종 13년 김덕생의 사위 오치선이 관직에 오른다. 김덕생은 이 기사에서 이미 사망한 것이 확인된다.
- 세종 2년 기사에 상왕이 된 태종은 다시 한번 김덕생의 자손을 등용하라고 한다. 관련기사
- 세종 18년 송거신이 김덕생이 후손이 없음과 자신보다 공로가 많음을 언급하면서 다시 끌어올리는 상소를 한다. 그 내용으로 김덕생이 태종 1년 이전에 사망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 상소를 결정타로 해서 김덕생은 송거신과 같은 좌명공신 4급으로 추존되고, 가정대부에 추증된다. 관련기사.
- 세종 24년 김덕생은 동지중추원사로 추증되고, 그 조카로 후사를 잇게된다. 이 때 김덕생의 말년에 대한 언급이 세종의 입으로 다시 등장한다. "불행하게도 일찍 죽고 또 사자(嗣子)가 없어서 포상하는 은전이 지금까지 거행되지 못하고 진실로 궐전(闕典)이 되었으니, 마땅히 후사를 세워서 그 제사를 받들게 하고, 또 제전(祭田)과 노비를 주어 길이 후세까지 미치게 하여 그 공을 보답해야 하겠다" 관련기사
- 이후 김덕생에 대한 예우는 단종실록에도, 성종실록에도 등장한다.
4. 김덕생 행장 관련
임금님 목숨을 구한 죄로 무사 김덕생이 처형됐다?김덕생과 관련해서 가장 잘못 알려진 것이 행장이다.
위 기사에 언급된 요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태종이 가마를 타고 후원으로 행차를 했다. 그때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는데, 호랑이는 거침없이 태종을 향해 달려들었다. 위기일발의 순간, 김덕생이 번개처럼 뛰어나와 활을 쏘았다. 호랑이는 즉사했다. 김덕생 덕분에 태종은 목숨을 건졌다. 그런데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감히 임금님을 향해 화살을 날린 것이 가당하냐는 비난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김덕생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김덕생은 변명보다 실력을 보여주었다. 호랑이 그림을 그려 놓고 활로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임금님이 위태롭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지만 이런 노력도 헛되어 결국 처형되고 말았다. 얼마나 억울했는지 목이 잘린 시신이 쓰러지지 않고 서 있었다.
대역죄인 김덕생은 정식으로 매장되지도 못하고 임시로 한양 근처에 묻혔다. 속절없이 세월이 흘러갔다. 억울한 한을 품은 김덕생은 귀신이 되어 세종대왕 앞에 나타났다.
"소신은 김덕생으로 황천에서 원한을 품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부디 제 해골을 고향에 묻게 해주시고 자손에게 벼슬을 내려 이 원한을 풀게 해주십시오."
세종대왕은 김덕생에게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종2품)라는 벼슬을 내려주고 김덕생의 시신도 고향으로 보내주었다. 그 후에 김덕생의 귀신이 묻힌 곳에 개구리들이 시끄럽게 울어서 괴롭다고 하소연해서 근처에서 경작과 방목을 금하게 하고 대신 논밭 60결을 내려주었다.
김덕생은 변명보다 실력을 보여주었다. 호랑이 그림을 그려 놓고 활로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임금님이 위태롭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지만 이런 노력도 헛되어 결국 처형되고 말았다. 얼마나 억울했는지 목이 잘린 시신이 쓰러지지 않고 서 있었다.
대역죄인 김덕생은 정식으로 매장되지도 못하고 임시로 한양 근처에 묻혔다. 속절없이 세월이 흘러갔다. 억울한 한을 품은 김덕생은 귀신이 되어 세종대왕 앞에 나타났다.
"소신은 김덕생으로 황천에서 원한을 품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부디 제 해골을 고향에 묻게 해주시고 자손에게 벼슬을 내려 이 원한을 풀게 해주십시오."
세종대왕은 김덕생에게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종2품)라는 벼슬을 내려주고 김덕생의 시신도 고향으로 보내주었다. 그 후에 김덕생의 귀신이 묻힌 곳에 개구리들이 시끄럽게 울어서 괴롭다고 하소연해서 근처에서 경작과 방목을 금하게 하고 대신 논밭 60결을 내려주었다.
이 내용은 명백한 역사기록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김덕생은 태종 1년 이전에 죽은 것이 분명하다. 송거신이 좌명공신 4급에 추가될 때, 같은 공을 세운 김덕생은 명단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 조선왕조 실록에는 태종 5년 경복궁 근정전에 호랑이가 나타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전의 다른 호환 기록을 남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태종 시기 사관들은 태종이 말에서 떨어진 다음에 사서에 기록을 남기지 말라고 한 것까지 기록했다. 태종시기 사관들의 집념은 무서울 정도였고, 태종은 실록의 완성도를 위해서 이를 허용했다. 김덕생건만 기록되지 않았을 가능성은 없다.
- 김덕생의 복권과정이 김덕생의 귀신이 나타났다고 했지만, 실록에서는 인척인 송거신이 김덕생을 높이기 위해서 상소를 올린 것이 결정적 계기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된 것은 김덕생의 행장이 김덕생의 후손인 김중태가 송거신의 후손인 전 호조참판 송징은을 찾아가서 행장을 작성해 줄 것을 요구하여서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행장 문서에도 있지만, 이 시기 행장은 자신들의 조상을 높이고, 그 음덕을 얻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쓰여졌다. 왜냐하면 이 시기가 숙종대인데, 숙종은 소설책인 육신전을 바탕으로 사육신을 복권한 인물이었다. 즉, 뒤에 작성된 행장이라도 여차하면 먹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행장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다. 정조 10년, 김덕생의 공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데, 이 때 판중추부사 김익이 찬성하면서 한 말이 정확하게 행장의 내용이다. 관련기사
김덕생 행장 내용은 19세기의 민담집인 이유원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도 같은 내용이 나오는 등, 특수한 목적으로 쓰여진 행장이 민담집을 통해서 민담처럼 유포되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
송거신의 사촌 여동생이 김덕생과 결혼하였기 때문에, 이 둘은 인척지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