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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13 06:50:21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은 시작되었다!/조선/주요 가문


1. 중원계2. 요동/예맥/청구계3. 유목/북방계

1. 중원계

이 시기까지의 중화로 지칭되던 그 범위 내의 인물들로, 현 조선 왕가는 주나라/위나라/송나라의 인증으로 여기로 분류되고 있다. 다만 고향인 구도 양평에 기거하고 있는 기씨도 만만치 않게 많은 듯하다.

* 기(箕) : 기취, 기라, 기비, 기지, 기총[1][2]
두 말이 필요 없는 이 조선의 왕가. 자성 기씨. 기자조선으로 유명한 기자의 후손을 자칭하고 있다. [3]다갓이 밀어주고 어장주가 공인한 신대생물 급 인재풀의 소유 혈통(...)[4]으로, 구현령이 발생하기 이전에도 말도 안 되는 능력치의 소유자들이었지만, 이후 등장하는 왕가 이외의 방계들은 진짜로 나름 밑에서부터 실력을 보여 올라온 이들이다. 기지의 숙청 이후 구도 양평에 있던 기씨를 조사해서 양평에 사는 기씨들의 세력은 약해진 모양. 참고로 승상의 유래를 형성하면서 작중 최초의 승상을 배출한 성씨이기도 하다.[5]
구도 양평이 근거지.

* 악(樂) : 악자, 악조, 악월, 악시, 악구, 악의
위나라의 장군 악양의 딸인 악자가 조선에 출사하면서 만들어진 문중으로, 원래는 악자만이 조선에 있었으나 일족들을 조선으로 옮기고, 아예 영수를 조선이 먹음으로써 조선에 일족이 모여살게 되었다. 악양, 악자 부녀나 악조, 악월 부녀 등 무가의 이미지가 강한 편이다. 그렇다고 악구 같이 문관이 없었냐면 그건 또 아니긴 하지만... 역시 본업은 무가.
원래는 조나라령이었으나 조나라가 거절하고 위무후가 악양에게 준 영지인 영수가 근거지다.

2. 요동/예맥/청구계

작중 요동과 요서를 기준으로 조선 동부로 분류되는 지역들에서 유래된 인물들이다. 어쨌거나 조선의 시작은 이곳에서부터 이루어져서인지 주요 가문도 가문이지만 기라성같은 인재도 많이 나온다는 특징이 있다. 주로 세후 때 사성받아서 시작된 가문들이 많은데 이는 주로 요동계 가문들이 세후가 구 귀족들을 숙청해대면서 변법을 밀어붙일 때 활약해서 권력을 얻은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한 예시로써 기이 치세 초반에 문예가 관할하고, 실시한 추은령[10]을 실시 할 때만해도 문씨나 고씨는 구 귀족들에 비하면 신진이였고,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하고 구귀족들을 도태시키기 위한 측면도 있었다.

3. 유목/북방계

조선의 위치가 아무래도 유목민들의 터전을 마주하고 있는 탓에 필연적으로 교류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조선의 사람으로써 유입된 인물들을 기반으로 한다.
다만 일단 중원계 국가를 표방하는 조선의 사정 상 보통 이들은 오랑캐라 불리우는 계통이기에[16]장왕 기유 대에 이르러 최초로 이 쪽 출신의 삼공이 나올 정도로 그들이 인정받는 것은 꽤나 오랜 세월에 걸친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였다.*투(秺 또는 鬪 ?):비비오(투제), 투찬, 투나조옹의 심복으로 데뷔한 비비오 때 처음으로 중앙에 입문한 가문. 임호 기미부주에서 기원했다. 투씨라는 성이 초나라에서 유명했다보니 사실 초나라 투씨라는 개드립이 나오기도 한다.(...) 작중 조선에서 유목계 최초의 대사마대장군을 배출하였다.[17] 후일담 시점에서 그 사마씨와 함께 오왕서를 편찬하게 된다.

[1] 장왕 기유의 첫째 딸로, 너무나도 병약했던 탓에 일찍 죽어 AA도 회수되었다. [2] 왕들은 이곳에 서술하지 않았다. 또한 외국인이 된 경우 그 나라의 등장인물로 서술되므로 참고할 것. [3] 기자는 상나라 왕족이였으므로, 상나라의 후계를 자칭하고 있고, 마찬가지로 상나라 왕족의 후손인 송나라와는 친척국가로 여겨진다. 진상은 조선비사 참조. [4] 둔재로 판정된 기람(위나라의 공자 위신의 남편)조차 최소 능력치가 87이다. [5] 문예 다음의 조선상으로 정해진 기취는 자신의 능력 상 도저히 업무가 혼자서는 감당이 안 되어서 그 비서직으로 나름 죽이 맞던 친척에 조정에서부터 그 재능을 주목받던 기라를 임명할 것을 조건으로 달았다. 이 때 그 직책명에 대해 기라와 문예 등이 생각한 것이 그대로 낙점된 것. [6] 그 조괄의 부친 되는 조사가 맞다. 실제 역사에서는 한자만 같은 공가 작위조차 없는 먼 방계라 이러한 대우를 받을 여지 자체가 없지만, 작중의 조씨는 조선에 의해 나라가 망하여 공가 작위까지 주나라에게 회수된 경험이 있어 일족의 번성을 중시하며 그 범주도 꽤나 넓게 잡게 되었고, 이 논리에 의해 조승에 의해 천거된 전적마저 있다. 쉽게 설명하자면 연의에서 유비가 황숙의 지위를 획득한 것과 비슷하다. [7] 이 당시에는 조선이 지금만큼 초원에서의 영향력이 강하지 않았고, 거용관 밖의 대는 상당히 위험한 장소였다. 이 때문에 주나라로부터 작위를 회수당했다. [8] 시조인 고정이 아래 요동계 고씨와 별개의 구 조나라 출신 평민이었다. [9] 조무령왕 시절 조나라의 내정을 돌봐왔던 인물로 삼국지에도 동명이인이 있다. [10] 귀족들에게 분할상속을 강제하는 법률 [11] 특이사항으로 이쪽은 명가 최초로 양자 계승이다. 이유는 내용을 참고. [12] 정치적 처세에 아예 무관심한 것은 아니다. 고질의 공이 차후 후계 한명의 등용을 보장함을 요구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자, 고씨의 유망주이던 고나가 고질의 친자가 아니었기에 불가하다면 양녀로 들여서라도 보장하고자 한 사려도 존재했다. 이는 고질이 자식 3명 전부의 출사를 요구한 무령군과 신경전을 벌이던 사이였기에 이미지메이킹을 하며 무령군을 디스한다는 속내가 읽히는 일이었지만, 명가라 하여도 능력주의에 따는다라는 기치를 강조하는 사례가 될 것이므로 장왕은 모른척 넘어갔다. [13] 이거 사실 크와트로 바지나를 곽달호라 부른 것이며, 스어도 샤아 아즈나블의 이름이 잘못 들어와서 '스어 아즈나브르'라고 소개된 것이다. [14] 이게 왜 문제가 되었냐면, 당시 장왕 기유는 그저 이름이 이상하였기에 그래도 차마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바꿔 주진 못하고 대신 성씨를 준 것이다. 이 행동이 가지는 의미를 모른 채 저지른 그 결과 하기는 작정하고 장왕의 심복으로써 키워지고 있는 취급을 받아 혼삿길에 차질을 받기까지 했다. 물론 이후 그 오해에 걸맞는 출세를 하긴 했으니 이제 와서는 한때의 해프닝이지만. [15] 안월은 30년 동안 대부에 머물렀으나 공손앙을 뜯어말려 지나친 법치를 억제한 공로를 시작으로 말년에 7경(당시에는 6경)까지 오르며 동시에 당시 일개 현령인 고정과 인연을 맺었고, 사후 조회가 3일간 파해질 정도의 인덕을 갖추어 조문객이 발이 끊길 줄 몰랐다. 안타는 그 고정의 친구로, 불미스러운 사건[19]으로 인하여 어장 최초로 벼슬을 강등당한 일이 있었으나 어머니를 확연히 뛰어넘는 재능을 바탕으로 절치부심한 끝에 결국 친구의 뒤를 이어 조선상에 오른다. 양수에 이르러서는 아예 태어날 때부터 능력치가 90 아래인 게 없는 것도 모자라 100을 넘어 추가 트레잇까지 붙는 능력치가 셋인 수준의 성장기를 보내고 30대도 되기 전에 어사대부의 바로 아래 관직까지 치고 오른다. 이는 현재 역대 조선의 인물들 중 최상위의 능력치이기도 하다. [16] 물론 이것은 예맥/요동계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경우 애초에 중원계보다도 오래전부터 조선의 구성원이었기에 이 문제로 고생하는 일은 유목/북방계에 비하면 없다고 봐도 될 정도로 가벼웠다. 당장 최초의 삼공(당시 이 시기부터 존재하던 삼공은 대사마대장군 하나뿐.)과 조선상이 요동계였다. [17] 최초의 유목계 7경(당시는 6경)은 마위인데, 젊어서는 출신 때문에, 여건이 좋아지고는 너무 나이가 많아 혼사를 치루지 못하여 자손을 남기지 못하였다. 승진을 마다하고 조선의 군마를 개량시키던 것도 있지만, 그의 출세가 늦어진 것도 포함하여 유목민과 하층민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은 세후, 늦게 봐도 유후 때부터 시작된 기나긴 싸움이었다. [18] 일반적으로 그 전에 이변이 발생하지 않는 한 5차전을 초장기전으로 보며, 이후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공자 측이 공세역량을 모두 소진해 물러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