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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8 08:11:26

금용문

파일:금용문.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우명(禹命) / 청원(淸園)
본관 봉화 금씨[1]
출생 1882년 8월 27일
경상도 예안현 동하면 구단리
(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귀단리)
사망 1961년 11월 18일
경상북도 안동군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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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금용문은 1882년 8월 27일 경상도 예안현 동하면 구단리(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귀단리)에서 아버지 금대기(琴岱基)와 어머니 청주 정씨 정진규(鄭晋逵)의 딸 사이의 3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했다.

그는 1919년 3월 17일 예안면장 신상면 등의 주도로 발발한 예안면에서의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해 수천 명의 군중과 함께 면사무소 뒷편에 있는 선성산에 올라가서 일본인들이 세워놓은 소위 대전기념비(大典紀念碑)를 쓰러뜨리고 태극기를 높이 들며 독립만세를 외친 다음 3개 시위단으로 나누어 거리를 행진했으며, 뒤이어 경찰주재소로 달려가 군중과 함께 유리창과 문짝을 파괴했다.
파일:금용문(1919년).png
1919년, 경성감옥에서 촬영된 사진.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19년 3월 3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소요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이에 공소하였으나 1919년 5월 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위 혐의에 대해 공소가 기각되어 당일 경성감옥에 입소하여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27일 특별사면으로 출옥한 뒤에는 안동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1년 11월 18일에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금용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관찰공파-참군공파 27세 용(鏞)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