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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17 23:40:14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


테살로니키 대주교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
Γρηγόριος Παλαμάς | Gregory Palamas
파일:Gregor_Palamas_by_North_Greece_anonym_(15th_c.,_Pushkin_museum).jpg
<colbgcolor=#542d2c,#542d2c><colcolor=#deb952,#deb952> 이명 Γρηγόριος Παλαμάς
Gregory Palamas
출생 1296년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사망 1359년[1] 11월 14일 (향년 63세)
동로마 제국 테살로니키
직업 성직자( 대주교), 수도자, 신학자, 철학자
종교 정교회
사제 수품 1326년, 테살로니키
요안니스 14세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주례
성인명 가톨릭(한국): 그레고리오 팔라마스
정교회(한국):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
축일 11월 14일
1. 개요2. 생애3. 신학4. 헤시카즘과의 연관5.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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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시키아는 정신과 세상의 조용함, 저급한 것의 망각, 고상한 것의 신비스런 깨달음, 생각들보다 더 나은 것에 대한 생각을 포기함을 말한다. 자신의 마음을 거룩한 헤시키아를 통해 깨끗하게 하고, 형언할 수 없는 방법으로 모든 생각과 인식을 초월하는 빛과 결합된 사람은 마치 거울을 보듯 자기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본다.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
동로마 제국 대주교, 수도자, 그리고 신학자

그는 아토스의 수도자였으며, 생애 말년에는 테살로니키의 대주교였다. 헤시카즘 영성의 가장 대표적인 옹호자로 알려져 있다.

1368년,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였던 필로세오스 1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가톨릭 교회 성공회에서도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

2. 생애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는 1296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콘스탄티노스와 어머니 칼로니는 소아시아에서 태어났으나, 튀르크의 진군으로 인해 그곳을 떠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피신했다. 팔라마스에게는 마카리오스, 테오도시오스, 에피하리 및 테오도티를 비롯한 다섯 형제가 있었다. 아버지 콘스탄티노스 팔라마스는 안드로니코스 2세의 조신이었는데, 팔라마스가 7세일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부터 팔라마스는 황제의 보호를 받게 되었고, 마그나우라 궁정 대학에서 수사학, 물리학, 논리학 등을 공부했다.

황제는 팔라마스의 재능을 보고는 그가 황실을 위해 일해주길 바랐지만, 팔라마스는 21세의 나이에 아토스로 물러났다.[2] 그는 먼저 파피키오 산[3]에 갔다가 아토스의 바토페디 수도원에 들어가 성 니코데모스 원로의 지도를 받으며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니코데모스 원로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새 원로인 니키포로스의 지도를 받으며 8년간 영적 투쟁을 계속했다. 니키포로스 원로도 세상을 떠나자 그는 아토스의 대 라브라 수도원으로 갔는데, 그곳의 수도원장에 의해 성가대 선창자로 봉사했다. 그러나 기도와 금욕에 더 전념하고자 했던 팔라마스는 글로시아라는 스케테[4]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3년간 은수 생활을 하며 헤시카즘을 가르쳤다.

1326년, 튀르크의 침략 위협으로 인해 팔라마스는 테살로니키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테살로니키에서 그는 일종의 영적 집단의 일원이 되었는데, 그 집단의 창시자는 시나이의 그레고리오스[5]의 학생이자 수도원 밖에서 기도의 실천을 전파하는 것을 목표로 한 이시도로스였다. 후에 팔라마스는 10명의 다른 사제들과 함께 베레아로 떠났고, 그곳에서 5년간 머물면서 엄격한 은수 생활을 했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잠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떠났고, 1331년 세르비아의 베레아 공격으로 인해 다시 아토스로 돌아갔다. 그는 잠시 동안 에스피그메누 수도원의 원장을 맡았으나, 엄격한 규율에 대한 수도자들의 불만으로 인해 1335년에 사임했다.

이때 헤시카즘은 바를라암[6]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아토스 산을 방문하는 동안 헤시카스트들을 만나고 그들의 관행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또한 팔라마스의 글을 읽게 되었는데, 서방의 스콜라주의를 공부한 바를람은 헤시카즘에 충격을 받았고 구두와 글로 이를 반박하기 시작했다.

이에 헤시카스트 측에서는 팔라마스가 논쟁을 벌였는데, 그는 아토스 산의 동료 수도자들에게서 바를라암의 공격으로부터 헤시카즘을 수호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리스 철학에 대해 잘 알고 있던 팔라마스는 바를라암의 공격을 방어하는 여러 저술을 썼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열린 여섯 차례의 시노드에서 헤시카즘을 변호했으며, 궁극적으로 1351년 제5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바를라암을 비롯한 공격자들을 물리쳤다.

3. 신학

팔라마스는 동방교회 마지막 대 영성신학자로 평가받는다. 그의 신학은 하느님의 본질과 에너지를 구별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는 하느님의 본질은 인간이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신비로운 것이지만, 하느님의 에너지는 창조 세계와 인간에게 작용하며 체험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인간은 하느님의 에너지를 통해 하느님을 경험하고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팔라마스의 신학은 당시 비잔틴 학계에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바를라암과의 논쟁은 유명하다. 바를라암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기반으로 하느님의 본질과 에너지를 구분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팔라마스는 이를 강력히 반박하고 시노드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정통 교리로 확립시켰다.

4. 헤시카즘과의 연관

팔라마스는 헤시카즘 운동의 가장 중요한 신학자 중 한 명이다. 헤시카즘은 '고요함'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헤시키아'에서 유래된 영성 수련법으로, 끊임없는 예수 기도를 통해 마음을 정화하고 하느님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팔라마스는 헤시카즘을 통해 인간이 하느님의 에너지를 경험하고 신비로운 합일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5. 영향

팔라마스의 신학은 정교회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러시아 정교회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그의 신학은 현대에도 많은 신학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으며, 정교회 영성의 핵심 요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 1357년으로 보기도 한다. [2] 이때 팔라마스는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에게도 수도 생활을 권유했고, 가족 모두가 이것을 받아들였다. 그의 가족들은 2009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에 의해 시성되었다. [3] 아토스와 같이 수도자들이 모여 생활하던 산이다. [4] 은수 생활에 더 초점이 맞춰진 작은 수도 공동체. [5] 스미르나 출신의 수도자. 헤시카즘이 등장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6] 칼라브리아 출신의 수도자.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열성적으로 지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