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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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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전신:경성제대 규장각도서2.2. 서울대학교 도서관 규장각도서2.3. 서울대학교 규장각2.4.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2.5.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3. 소장자료4. 전시실5. 기타

1. 개요

파일:서울대학교규장각.jpg
▲ 서울대학교 규장각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 奎章閣韓國學硏究院

서울대학교의 학내 기관 및 연구기관.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 있다.

정식 명칭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2006년 2월 1일자로 서울대학교 학내 기관인 기존의 규장각과 한국문화연구소를 통합하여 설치된 기관이다. 홈페이지 주소는 https://kyu.snu.ac.kr/.

이름 그대로 조선시대 규장각을 전신으로 삼고 있으며,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던 주요 고문헌과 경성제국대학 및 서울대학교에서 수집한 한국의 각종 고문헌, 일제강점기의 행정 문서 등을 보관, 전시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국학진흥원 등과 함께 한국학 연구기관이다.

2. 역사

출처

2.1. 전신:경성제대 규장각도서

한일합방 이후 조선총독부에서는 조선의 구관제도(舊慣制度)를 조사하며 조선의 고전적을 다수 수집하였는데, 규장각의 자료를 포함해 당시 조선 관청에서 보관 중인 고전적을 통째로 인수하였다. 이 고전적들은 처음에는 총독부 참사관실 등에서 조사하고 정리하여 보관하였고 후에 일부는 이왕가로, 나머지는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된다.

해방 후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된 고전적은 서울대학교에서 인수한다. 이런 이유로 현재 규장각에는 본래 규장각 장서 이외의 자료도 많이 소장하고 있다.

2.2. 서울대학교 도서관 규장각도서

1945년 8월 광복으로 일제는 물러가고, 규장각도서를 포함한 경성제국대학의 도서는 경성대학으로 이관되었다. 1946년 10월에 서울대학교가 개교함으로써 구 경성제국대학이 보관해온 규장각도서도 규모나 보관장소를 바꾸지는 아니하고 소관처만 서울대학교 부속도서관으로 변경하였다.

6.25 전쟁 당시 규장각도서도 큰 위기를 맞았다. 6월 28일에 조선인민군 서울을 점령했는데, 당시에는 규장각뿐만 아니라 한국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피난 대책이 전무했다. 그 기간 동안에 규장각도서의 일부가 포장, 반출되는 사건이 있었으나 원상 복구되었다.

1950년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했지만, 중공군이 개입하여 서울을 도로 뺏길 위기에 놓이자 한국 정부는 1950년 12월 10일부터 28일 사이에 3차에 걸쳐 규장각도서 중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일성록』, 『승정원일기』 등 8657책을 군용 트럭에 실어 부산으로 이송하였다. 이 도서들은 포장된 채로 부산의 관재처 창고, 경남대한부인회 창고, 경남도청 창고 등을 전전하다가 정부가 환도한 지 몇 달이 지난 1954년 6월에 서울대학교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이때 이송되지 못하고 서울에 남은 도서들도 수두룩했으나 모두 무사하였다.

1960년대에는 규장각 도서를 본격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1962년 11월에 규장각도서의 보존, 관리 및 활용에 대한 사항을 심의하는 규장각도서위원회가 총장 직속의 기관으로 설치되었다. 곧 『규장각도서한국본서명색인(奎章閣圖書韓國本書名索引)』 1부 4권, 이듬해(1963) 8월에는 『규장각도서중국본서명색인(奎章閣圖書中國本書名索引)』 1부 1책을 완성했고, 1964년 9월부터 66년 6월에 이르는 1년 반 남짓한 기간에 소장 고문서 5만 2천여 건을 정리했다.

1975년에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서울대학교 부속도서관이 확대 개편되어 명칭이 서울대학교 도서관으로 바뀌었고, 그 안에 규장각 도서 전담관리 부서인 규장각도서관리실이 설치되었다. 규장각도서는 관악캠퍼스 중앙도서관 2층에 특별 서고를 마련하여 보관하였다. 광복 이후 서울대학교가 구입한 고도서(古圖書)와 당시에 이미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기증된 일사문고(一蓑文庫), 가람문고, 상백문고(想白文庫)와 경제문고(經濟文庫)의 고도서 총합 6380여 책이 규장각도서로 분류되었다. 경복궁 회랑에 보관되었던 교서관(校書館) 책판 1만 7821장도 편입되었다.

2.3. 서울대학교 규장각

1989년에는 현재 사용되고 있는 규장각 전용 건물(103동)이 준공되어 1990년 6월에 새 건물로 이사하고, 9월에 개관식을 거행하였다. 1992년 3월에는 서울대학교 설치령의 개정으로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규장각도서관리실이 서울대학교 부속기관 규장각으로 독립하였다. 독립 기관으로서 기구가 정해지면서 도서관리와 열람 업무를 담당하는 사서와 더불어 상근 연구직 학예연구사가 임용되어 자체 인력에 의한 연구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규장각의 사업이 대폭 확대되고 수행 인원이 증가함에 따라 2003년 5월에 규장각 건물의 연면적을 2배 이상으로 확장하는 공사를 시작해 2004년 12월에 완공하였다.

2.4.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는 한국문화에 대한 연구를 협동적으로 수행하고 그 성과를 보급함으로써 민족문화의 계발과 대학교육의 질적 향상에 기여할 목적으로 1969년 2월 12일에 문리과대학 부설기관으로 설립되었다.

1975년 서울대학교 종합화계획에 따라 문리과대학이 해체되고 캠퍼스가 관악으로 이전하면서, 1976년 2월에 한국문화연구소는 인문대학 부설기관이 되어 연구소 사무실과 도서실을 갖추게 되었다. 1979년 7월 13일에 한국문화연구소는 대통령령 제9535호에 의해 법정연구소로 승격되고, 서울대학교 직할연구소가 되었다.

2.5.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05년 6월에는 이태진 한국문화연구소 소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규장각 및 한국문화연구소 발전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서울대학교 내의 한국학 인력의 효율적 활용을 통한 한국학 발전을 위해 규장각과 한국문화연구소 두 기구를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통합하기로 결정한 후, 구체적인 조직과 운영계획을 논의하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설립안’을 대학본부에 제출하였다. 이에 따라 2006년 2월에 규장각과 통합하여 현재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설치되었다.

3. 소장자료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분류:규장각 소장품 문서
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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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2014년 2월 기준으로 한국 고문서, 고서 자료 총 32만 7736점을 소장했다. 한국국학진흥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1]과 함께 공공기관의 한국학 연구지원을 중점적으로 받는 명실상부한 3대 축으로 한국 사학도, 특히 조선시대를 전공하는 사학도에게는 그야말로 성전이나 다름없다. 조선시대 관련 논문을 쓴다면 반드시 한 번쯤은 들러서 자료를 수집해야 하는 곳이다. 조선왕조실록 정족산본도 이 규장각에서 보관한다. 규장각 소장 고서는 서울대학교 도서관 소장 고서와도 완전히 별도로 관리된다.

무턱대고 간다고 해서 바로 고문헌 원본을 볼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규정상 대체본 열람이 우선이기 때문에 마이크로필름(MF)나 복사본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대체본이 없어 원본을 봐야 한다면 열람 예정일보다 며칠 정도 빨리 예약 신청하는 것이 열람에 편리하다. 또한 고문헌 이미지, PDF 등이 홈페이지에서 제공되는 경우가 있으므로, 규장각 홈페이지에서 미리 확인해보기를 권장한다. 게다가 아직도 제대로 정리, 연구되지 않은 문헌이 있을 정도로 그 양이 방대하다.[2]

이 규장각 덕분에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는 한국 사학계에서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규장각에 재직했거나 재직 중인 박사급 연구원들의 실적이 한국 사학계 전체의 연구실적으로 증명된다.[3] 타 대학원의 연구자들도 규장각 자료를 활용하기 위하여 직접 서울대까지 발품을 팔거나 관악산에 당도한 걸 환영하오 낯선 이여. 적지 않은 돈을 자료 복사에 쓰곤 한다. 한편 규장각 소장 고문헌들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서울대학교 안의 모든 자료, 기자재 중 가장 먼저 소개(疏開) 및 남쪽으로 이관하도록 하는 대상이라는 설이 있는데, 진위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4] 규장각과 더불어 조선왕조실록을 보존중인 국가기록원 역사기록관이 한반도에서 서울과 가장 멀리 떨어진 부산에 위치한 것도 유사시 보존에 가장 유리한 위치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행정 문서도 일부 보관하고 있다. 조선총독부가 1926년에 경성제국대학에 이 문서들을 이관했고, 이 문서들을 서울대학교가 접수했다.

4. 전시실


지하1층에 위치하고 있다. 주기적으로 리뉴얼하는 듯하니 휴무 여부를 미리 확인하고 가는게 낫다.

5. 기타

서울대 규장각 건물의 건물번호는 103동이다. 전반적으로 개성이 부족한 서울대의 기타 건물에 비해 상당히 외관이 개성 있는 편이다.

서울대의 학내 기관이지만 서울대 학생이라고 해도 이런 곳이 있는 줄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중앙도서관을 기준으로 인문계와 자연계의 생활 권역이 많이 다르기도 하고 졸업 사진을 찍을 때 아니면 가 볼 일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과학대학을 기준으로 하면 바로 코앞에 있기 때문에 이곳 학생들은 이런 시설이 있다는걸 모르는게 이상하다. 알긴 아는데 4년 내내 들어갈 일이 없다 서울대입구역이나 대학동 방향의 셔틀버스, 서울 버스 5516의 정류장에서 두리번거리다가 보이는 기와 지붕 얹은 건물이 규장각이니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다. 그리고 연구 기관임에도 이상하게 초등학생이나 10대들이 많이 보일 때가 있는데, 전시 공간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서울대 견학을 오는 팀에서 거쳐가는 경우라서 놀라지 않아도 된다. 서울대학교 영재원 학생들이 체험학습으로 방문하기도 한다.대부분 아이들은 벽에 크게 붙어있는 대동여지도 앞에서 인증샷 찍는 게 큰 의미.

[1] 이쪽은 대한 제국기에 설치한 황실 도서관을 전신으로 삼는다. [2]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따르면 2014년 2월 기준으로 각종 고문헌이 32만 7736건이다. 타 국가 기관으로 자료가 이관되거나 이후 계속 유입되는 자료가 있으므로 수치에는 변동이 있을 수 있다. [3] 규장각은 연구 논문을 수록한 3건의 연속 간행물(『한국문화』·『규장각』·『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을 발행하는 기관이기도 하다. 규장각을 거친 연구자들이 쓴 논문과 규장각 자료를 주로 활용한 논문이 많이 수록되고 있다. [4] 사실 유사시에 급히 내려보내야 할 필요성은 충분하다. 실제로 한국 전쟁 이전 장서각에서 소장하고 있던 조선왕조실록 적상산 사고본은 한국 전쟁 때 북한에 털렸고 지금도 북한에서 소장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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