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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주대학교/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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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1970년대
2.1. 동아리들 강제 해체2.2. 유신철폐 벽서
3. 1980년대
3.1. 공주의 봄3.2. 금강회 사건3.3. 교육문제 학내 시위
4. 1990년대5. 2000년대
5.1. 제1차 교명변경 마찰
6. 2010년대
6.1. 인수합병과 통합시도6.2. 제2차 교명변경 마찰6.3. 신천지 위장동아리 청산6.4. 공주대 총장 공석 사태6.5. 조국 전 장관의 딸 인턴 관련 논란
7. 2020년대
7.1. 스마트수산자원학과 동물 학대 논란
8. 기타 사건 사고

1. 개요

국립공주대학교의 사건 사고를 다루는 문서이다.

국립공주대학교 총학생회와 관련된 사건 및 사고는 해당 문단 참고.

2. 1970년대

2.1. 동아리들 강제 해체

1973년도 창립된 연극써클인 ‘상황’은 학생들에게 민중의 삶과 고통, 지식인의 양심과 소명의식이라는 고민을 던져주며 현실 참여적인 입장에서 활동하도록 특히 많은 영향을 주었다. 창단 첫해인 1973년 신춘문예당선작 ‘부활절’, ‘타의’를 대본으로 하여 공연 하였다. 1974년도에는 황석영작 ‘돼지꿈’을 공연하였으며 11월 22일에는 상황의 회원이 중심이 되어 33명이 닉슨 대통령 방한에 맞춰서 공주사대 처음으로 본관(현 교양관) 202호 강의실을 3일 동안 점거농성을 하기도 하였다.

연이어 1975년도에 서울대와 이화여대의 연극반이 당시 대본을 읽는 것조차 금기시 되었던 김지하의 ‘금관의 예수’ 작품을 연극으로 준비하려다가 붙잡혀가는 사건 이 발생하자 ‘금관의 예수’ 대본(혹은 팜플렛)을 500여부 찍어서 전국적으로 배포하였다. 당시 배포를 담당했던 운반책은 시인 고은과 작가 황석영이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도 극단 상황은 김지하의 ‘금관의 예수’를 공연하였고, 이 사건으로 학생들이 무기정학 등의 처분 받았다. 이때 맺은 인연으로 그 해 고은과 황석영이 공주사범대 문학써클인 수요문학회가 주최한 문학의 밤 행사에 초청을 받았으나..

학내 문학 써클인 수요문학회는 1950년대 말에 모임을 갖기 시작하여 1970년대 초반에 활발할 문학활동을 하면서 때때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노출하였다. 1975년 5월 13일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가 공포되어 학내 학생들의 모든 단체 활동이 일체 중지되었는데, 유신하에서 ‘문학의 밤' 행사는 당연 사찰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당해 수요문학회의 주최로 열린 연례행사인 ‘5월 문학의 밤' 도중에 회원이던 최교진 학생이 유신하의 시국상황을 비판적으로 묘사한 시를 낭송한 후 박정희 대통령 사진을 가리키며 “나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수 있으나 독재자에 대한 경의는 표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행사 종료 직후 국가원수 모독혐의로 체포되어 1주일 조사 끝에 구류 29일을 받고 학교에서 제적되었다. 최교진은 공주경찰서에서 풀려난 지 4일 만에 군에 입영 조치되어 삼청교육을 받았으며, 1980년도에 가서야 학교에 복학할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20년 전통의 수요문학회가 강제 해체되었다.[1] 기존의 연극써클인 ‘상황’ 역시 김지하, 황석영 등의 문제작들을 계속 공연하여 학생과나 학내 사찰 경찰에 의해 학내 불순서클로서 항상 주목을 받으며 탄압받았고, 결국 이로 인해 해체되었다.

따라서 1976년 ‘황토’로 이름을 변경하고, 동아리 등록을 새로이 하였고, 그 해 경남 고성으로 고성 오광대 전수를 들어갔는데 이것은 충남지역에서는 최초의 탈춤전수로 기록된다. 이는 기존의 모더니즘계 연극이나 현 실적 해석이 결여된 서구 고전극 대신에 민중의 이야기를 담는 리얼리즘 정신을 표방, 절실한 민중의 몸짓을 공유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고민이나 의지에 대한 실천적 대안을 가지지 못하고 당시 암울했던 국내 상황과 더불어 밖으로 확산되기보다는 동아리 의식, 동료의식으로 모아지면서 폐쇄적이기까지 한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1980년 당시 비밀리에 유통되던 김지하 작 ‘구리 이순신’을 무대 에 올리고 ‘오적’, ‘비어’ 등의 작품화를 시도하였고, 이를 계기로 공주사범대 최초의 가두시위와 격렬한 학내시위 및 집회에 문화패(탈반, 연극반)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된다. 결국 ‘황토’는 전신인 ‘상황’이 해체된 것과 비슷한 해체과정을 거치고 말았다.[2][3]

2.2. 유신철폐 벽서

1979년 5월 경부터 공주사대 학생들은 79학번을 중심으로 미등록 동아리인 ‘곰나루’를 만들어 활동했는데, 이 동아리 회원들로 중심이 된 유신철폐운동이 대자보의 형태로 전개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79년 10월 13일 새벽 대학의 본관(지금의 교양관 건물)과 과학관(지금은 사라진 구 교양관), 식당(중앙도서관자리)등의 건물 벽에 ‘유신철폐' 등 엄격히 금지된 구호를 페인트로 벽서한 사건이다.

본관 현관에 부착된 “유신과업 이룩하여 멸공통일 이룩하자”라는 글자 중 ‘유신’자를 페인트로 지우고, 동시에 과학관 등에는 ‘유신철폐’, ‘학원의 자유화’, ‘민주회복’등의 구호를 붉은 페인트로 벽서하였는데, 이 사건은 경찰의 수사로 수 일 후 발각되어 주동자로서 사회계열의 이상헌, 정선원, 이영복, 권선길, 교육학과의 김익중 등이 10월 16일부로 구속되기에 이른다.[4]

3. 1980년대

3.1. 공주의 봄

1980년 4월부터 공주사범대 학생들이 학원자율화와 민주화에 대한 성토대회를 개최하는 등 시위를 계속하자 학교가 장기간 휴교를 하고, 그 과정에서 관련 학생 다수가 구속, 제적, 군입대 등의 제재조치를 받게 되고 학교는 9월에 들어서야 정상화 된 사건이다.

4월 28일 오전11시부터 다음날 밤 11시까지 이틀간에 걸쳐 학생회는 시국에 관한 성토대회를 열고 ‘계엄령의 즉각 철폐’, ‘정부주도 개헌작업의 즉각 중단’, ‘군사교육제도 의 대폭개선’, ‘구속된 민주인사의 즉각 석방’, ‘복권.복직의 실현’, ‘노동3권의 보장’, ‘대학 내 외부세력배제’, ‘교수재임명제의 철폐’, ‘교수협의회에 의한 학장 직선’ 등을 요구하며 새 민주체제의 출범을 촉구하는 대대적인 학내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의 움직임이 장기적인 국면을 보이고, 동시에 그 추이가 학내의 제반문제에까지 확산될 기미를 보이자 교수협의회는 4월 25일 총회를 열고, 최근의 학내외 상황을 검토한 후, “대학생들의 총의에 의하여 선출된 학생회에 대하여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를 보내며 금후 본 대학의 민주적 발전을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할 것”과 동시에 “비민주적 비지성적 방법을 통한 교권의 침해는 용납할 수 없다”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4월 28일 이후 학생회 주도의 학내시위가 길어지자 교수협의회(회장 윤여헌 교수)는 다시 총회를 열고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에 적극 공감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이틀간의 학생회 주관의 시위를 일단 정리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학생들의 학내시위는 학원자율화 정치적 문제이외에, 학내문제 특히 일부 학과에서 특정교수를 배격하는 차원으로까지 진행되고 있었다. 이 문제는 4월 29일 학생회 주도의 학내시위가 종식된 이후에도 계속되자, 5월 1일 학과장 회의를 개최하고 1주일간의 휴교를 결정하였다.

민병조 학장은 이 문제의 해결이 이루 어지지 않을 경우 학장직을 사퇴할 것을 공언함으로써 특정 교수 퇴진 요구를 둘러싼 학내문제는 매우 첨예한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5월 6일 학생들은 특정 교수 거부가 최종목표가 아니었다는 점을 전제, 진정한 대학 발전을 위하여 “대학 내 비양심적 요소에 대한 철저한 배격과 반민주 세력 척결”을 위하여 끝까지 노력할 것을 당부하는 성명과 함께 교수 퇴진의 요구를 철회함으로써 일단 문제는 진정되었다.

그러나 5.18등의 후유증으로 휴교조치가 지속되어 휴교조치가 해제된 것은 111일 만이었고, 봄에서 여름을 거쳐 가을에 접어든 9월 5일에야 긴 휴교 끝에 개강이 이루 어졌다. ‘공주의 봄’에서 학생들 앞에 서있었던 장재인, 정관영, 이상헌, 김관제 등 여러 학생들은 휴교 중 구속되고, 제적처리 되어 있었고, 일부 학생들은 ‘순화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군부대의 ‘교육’을 체험하였다. [5]

3.2. 금강회 사건

일련의 사건으로 ‘곰나루’ 동아리원 지도부가 징계를 당하였으나, 1980년 4월 16일 짧았던 서울의 봄과 공주의 봄을 기점으로 이들은 다시 ‘금강회’를 구성하여 민주화투쟁을 주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연이어 이어지는 1981년 11월 13일 금강회의 학생들은 좌경용공 분자로 몰려 구속됐다.

사회과학 책을 읽고 토론하던 학생들이었지만, 경찰서로 연행된 그들에겐 몽둥이질과 통닭구이[6] 등 무지막지한 고문이 가해졌다. 그리고 검찰 공소장엔 “<역사란 무엇인가>란 이념서적[7]을 탐독하고”란 혐의가 적시됐다. 전두환이 집권한 직후였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공안정국을 조성해 대학가 서클과 젊은 교사 및 직장인들의 독서모임을 공산주의에 동조저한 용공분자로 몰았다. 피해자들에겐 이적표현물 학습과 반국가단체 찬양고무, 이적단체 구성 같은 혐의가 씌워졌는데 그 예로 영화 변호인으로 유명한 부산지역 부림 사건, 충남 금산지역 아람회 사건, 대전 한울회 사건, 82년 군산 오송회 사건, 광주 횃불회 사건이 대표적이며 모두 고문으로 조작된 사건들이다. # #2

3.3. 교육문제 학내 시위

공주사범대 학생들이 교원임용 국가고시에 대해 반대하기 위하여 1986년 5월부터 1987년 5월까지 기간동안 산발적으로 학생총회와 시위를 벌렸다. 최초 1986년 5월 12일 목련사 앞 잔디밭(현 중앙 도서관 자리)의 학생총회에서 학생들은 학교에 대하여 9개항의 요구사항을 결의하고 시위를 벌였다. 다음날 국문학의 밤이 끝난 후 일부 학생들은 도서관을 점거하고 철야농성을 하였다.

5월 14일 교원적체문제의 해소, 문교부의 교원 임용시험 실시설에 대한 학교측의 반대 입장 표명, 졸업정원제의 폐지, 학생 공식기구의 인정과 활동보장 등 학생들의 요구 사항에 대하여 학교측에서는 교무과장(박기석교수), 학생과장(이춘우교수)의 긍정적 답변이 있었고, 이에 학생들은 일단 해산하였다. 위의 9개항 중 졸업정원제, 발령적체, 교원임용 시험문제 등은 이후 학내상황의 보다 핵심적인 이슈로 정리된다.

2학기가 시작되자 학내의 상황은 매우 격화하였다. 게시판을 통하여 정치문제, 교육 문제에 대한 대자보가 연이어 게재되었으며 유인물의 배포, 강의실에서의 벽서 등이 확대되었고 9월 10일에는 약 20여명의 학생들이 목련사 앞 잔디밭(뒤의 민주광장, 현재 중앙도서관)에서 ‘어용교수 퇴진’, ‘상대평가제 폐지’, ‘교원적체 해소’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하였다.

다음날 9월 11일 오전 11시 30분경, 학내시위 주동 자로 제적 혹은 무기정학의 징계상태에 있던 4명의 학생이 행정관 2층에 소재한 교무 과장실을 점거하여 농성에 들어갔으며, 일부 학생에 의한 학내시위는 계속되었다. 이날 오후 7시 30분경, 학내시위의 진압을 위하여 소방차와 경찰이 교내에 진입하였고, 교무과장실을 점거 농성중이던 학생4명이 경찰의 작전에 의하여 연행되었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현장에 모여 있던 학생들이 흥분, 전경들과 투석전을 벌였으며 학생들은 교문 밖으로 진출, 가두시위를 시도하였다.

이들 학생들은 교문(현재의 후문)을 통하여 신관동으로 나가 2킬로 정도 떨어진 신관파출소까지 가서 연행 학생의 석방을 요구하 며 화염병과 돌을 투척함으로써 파출소의 유리창과 출입문이 파손되었다. 이어 학내로 철수한 시위학생들은 사복경찰이 상주해 있던 수위실과 이발소 및 행정관 1층에 돌과 화염병을 투척함으로써 교내 기물의 일부가 불타는 등 아수라장이 되었다.

밤 11시경, 마지막까지 남은 약 20여명의 학생들은 도서관 2층을 점거, 철야농성에 들어갔으며 12일 오후, 재집결한 학생들은 가두시위를 결정하고 교문밖으로의 진출을 다시 시도, 대기중인 전투경찰과 교문주변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학생들은 화염 병과 돌을 투척하고, 심지어 학내 보도블럭을 깨뜨려 투석전을 벌였다.

1986년 9월 10일 이후 수일간의 학내시위는 엄격한 상대평가제 실시문제, 교원 적체 문제 등 여러 구호가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지난 수년간 정치적 굴레에 의하여 억압적 이었고 경직되어 있던 대학 행정 당국과 정부에 대한 반발이었으며 1980년 봄 이후 가장 격렬한 학내시위의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후 대학사회에서의 민주화운동, 이념투쟁 및 교원적체 문제 등의 현안과 연결되면서 계속적인 학내시위의 현상이 되풀이 된다.

1986년의 학내사태는 이듬해 1987년이 되자 보다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이 같은 학내사태를 격화시킨 것은 문교부의 교원국가고시 실시안의 구상이었다. 단순한 학내의 문제가 아닌 전국의 국립사범대학 및 한국의 교원양성 문제 전반으로 확대 되었던 것이다. 국가고시에 의한 문교부의 교원임용 구상이 신문에 보도되자 교수 및 학생 등 학내 의 모든 구성원이 앞으로의 파장을 염려하며 소연하여졌다. 문교당국에서는 이 사실을 부인하고 나섰지만, 이같은 부인은 별로 신용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학생회(학생회장 류웅주)에서는 4월 10일 ‘민주광장’에서 학생정기총회를 열고 각과의 공청회를 통하여 수렴된 의견을 종합하였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4개항의 방안이 정리되었다.
1. 전국 국립사범대학의 공동적 노력으로 교원임용 국가고시안 철회를 요구할 것.
2. 근거없는 교원임용국가고시안에 대하여 보도한 조선일보와 한국일보에 해명기사를 요구할 것.
3. 학교당국과 학생들은 합법적 방법으로 국가고시안 철회를 요구할 것.
4. 문교부의 국가고시 실시방침에 대한 전 교수의 공식적 의사 표명을 요구할 것.

이에 학생회에서는 이를 문서화하여 학교 당국과 문교부에 올리고, 만약 이같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전면 수업을 거부하기로 결의하였다.

1987년 4월30일 문교부는 학생회측의 공문에 대한 간접적 답신을 통하여 “문교부는 이 안(교원임용국가고시제를 말함)에 대해 검토한 바가 없으나 교육개혁심의회에서 검 토한 바가 있으며, 만약 이를 시행한다 할지라도 현재 학생에게는 소급 적용하지 않는 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즉 문교부로서는 국가고시안 실시가 아직 문교부의 검토사안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 실시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음으로써 앞으로 검토 될 수 있는 사안이며 동시에 실시될 가능성이 없지도 않다는 해석이 가능한 공문이었다.

국가고시안 철회를 중심으로 한 교육문제에 대한 의견개진은 이것이 국립사대의 공동적 문제라는 점에서 전국 국립사대간의 연대가 요구되었다. 학생회에서는 전국국립 사대학생연합(약칭 ‘전사련’)을 결성하고 5월 7일 전남대에서 발대식을 가지고 공동위 원장에 공주사범대 류웅주 학생회장을 선출하였다. 그리하여 5월 11일부터 16일까지의 1주간을 “식민교육 청산하고 민족 민주교육 쟁취하자”는 구호와 함께 학내 민주권리 쟁취 및 전사련 공동실천주간으로 정하고, 교원대학철폐,[8] 국가고시 철회, 발령적체 해소, 교원임용 유보조치 즉각 철회 등 의 이슈를 내걸고 수업거부를 결의하였다.

축제(대동제)가 열리는 5월에 학내시위는 전면적이고 장기적인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제18회 웅진대동제는 학교측의 허가과정 때문에 당초의 예정보다 늦어진 5월 6,7,8일 3일간 거행되었다. 대동제 행사는 행사의 내용을 둘러싸고 매년 학생측과 학교당국간 의 갈등이 있었던 터였다. 대동제 행사는 곧 이어지는 학내시위의 전단계적 성격을 갖는 것이기도 하였다. 대동제 첫날인 5월 7일 ‘한삼’의 탈춤공연이 끝난 후 약 200여명 의 학생이 ‘국가고시 철폐’를 외치며 교내 시위를 벌였고, 5월 8일에는 대동제의 본놀이 약 300여명이 횃불행진을 하고 ‘국가고시 철폐’를 외치며 신관동 삼거리까지 가두진 출을 하기도 하였다.

대동제가 끝나자 전사련의 결의에 의하여 이루어진 수업거부 등이 캠퍼스를 뒤덮었다. 5월 12일부터 시작된 학생들의 수업거부는 14일 동안 지속되었으며 정상적인 학사 활동은 모두 마비되었다. 전국 국립사범대학이 연결하여 벌인 이 시위에서는 문교부의 국가고시안 철회, 발령적체 해소, 교원대학 철폐 등이 구호로 내세워졌으며 상대평가제의 폐지, 국가고시안에 대한 대학 측의 공식적 반대 입장 표명 등이 요구되어 졌다. 5 월 11일 오후 1시 비상학생총회를 열어 23개학과의 수업거부가 결의되었고, 가두시위와 철야농성 등으로 이어졌다. 격렬했던 학생시위와 학교 측과의 3차례 면담이 이루 어지면서 5월 27일에는 학장 담화문이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이 담화문에서는 국가고 시안 철회 등의 문제는 문교부에 지속적으로 요구할 것이며, 상대평가제를 완화하며 구속자의 석방도 학부모와 공동 노력한다는 내용을 확인하였고, 28일에는 학생들이 마침내 정상수업에 복귀하였다.

1987년 5월의 사태에서는 경찰의 교내진입으로 학생회 간부들이 연행되고, 학생들이 수업뿐 아니라 교생실습마저 거부하는 등 심각한 양상으로 치달았으나, 상대평가제 폐 지 내지 완화, 대학언론 자율의 보장, 국가고시안에 대한 학장의 공식 건의안 제출을 약속함으로써 3주 만에 정상으로 복귀하였다. 시위 기간 중 연일 계속된 투석전으로 최루탄과 사과탄의 매운맛이 학내외를 진동시켰다.[9]

4. 1990년대

5. 2000년대

5.1. 제1차 교명변경 마찰

최초 교명변경의 마찰의 계기는 2005년 천안공업대학을 통합하면서 제3의 교명으로 변경하기로 합의한 것에서 비롯되었다.[10] 이는 당시 총장의 독선적 결정인 ‘이면합의’로 알려져 있으며,[11] 2004년 7월 16일부터 진행된 ‘교직원 및 학생 설문조사’에서 나온 공주대 유지란 결과를 무시하는 행위였다.[12]
천안공업대학과 본 대학 통합추진 기본 합의서 서명(2004. 02.) - 통합대학교의 교명은 양 대학이 합의하여 제3의 이름으로 한다.
공주대학교와 천안공업대학 통합시안 교육부 제출(2005. 01.) - 통합대학교 교명: 공주대학교, 통합 이후 교명은 교명연구위원회의 검토와 합의 후 교육인적자원부에 제출함

결국 이에 따라 2006년 이후 교명 변경을 본격 추진하자 공주 시민과 대학 구성원들이 반발해 총장실을 점거하고 단식농성을 벌이는 등 극한 대립양상을 보였고 천안·예산 지역 주민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안캠퍼스에서 교명선정위원회를 열어 교명변경을 신청했으나, # 교육과학기술부는 나라명이 들어간 교명은 승인할 수 없다며 신청을 반려해버렸다. 어쨌든 통합시안대로 제출은 했기에 공주대란 이름은 유지된채 갈등사태는 일단 마무리됐다.

6. 2010년대

6.1. 인수합병과 통합시도

2011년 초에 평택시에 있는 한국복지대학교 의왕시 한국철도대학을 인수하려고 시도했다. 성공했다면 평택캠퍼스와 의왕캠퍼스까지 등장할 가능성도 있었다. 무려 6캠퍼스 체제라니… 그러나, 철도대는 교명 변경을 약속한 충주대학교와 통합했고, 한국교통대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한국복지대학교의 경우는 결국 공주대학교와 통합할 것으로 보였는데, 본교 학생들의 극심한 반대가 있었으며, 교육부도 이미 공주대는 다수의 캠퍼스를 보유하고 있으므로 통합 신청을 불허했다.

국가의 강력한 국립대 통폐합 정책과 더불어 충남대학교측에서는 전부터 대학본부를 공주로 옮기겠다는 등의 합의안을 제시하고 공주대학교와의 통합을 지속적으로 요구해왔었다. 그리고 2011년 2월 경에 충남대학교 총장이 한 번 더 공주대, 공주교대까지 통합한다는 공약으로 당선되었고, 별 다른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다시 통합을 시도하게된다.

그러나, 서로의 전통과 주장에 대한 당위성을 피력했고, 3개 대학 학생회 모두 반대했었으며, 기존 충남대를 교명으로 하자는 충남대와 새로운 교명을 주장하는 공주대 간의 이견이 컸고, 대학본부 위치도 충남대는 세종시, 공주대는 공주캠퍼스를 각각 주장 하는 등 입장차를 좁히지 못한 채 무산되었다.

6.2. 제2차 교명변경 마찰

2011년 9월경 천안발전회에서 교과부에 공주대 교명변경 청원서를 제출했고 예산군과의 공조에 나서면서 다시 교명 변경 논란이 일어났다. 계속된 천안발전회의 노력[13]에 힘입어 2012년 1월경에는 교과부에서 공주대에 개선안 제출을 요구하고, 학교는 교명 변경 추진계획서에서 교명 재창출추진위원회를 구성해 내년 8월 최종변경 교명(안) 승인을 요청하겠다는 일정을 제시했다.[14] 그리하여 잠잠했던 교명변경 문제가 수면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2012년 8월경 공주대 교명변경 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천안발전회의 지원을 통해 공과대학(천안) 측에서 교명변경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고, 산업과학대학(예산)도 이에 공조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던 와중 2012년 11월 학생회 선거에서 중선관위의 주도로 교명변경 찬/반 투표를 하였는데, '행복대' '가온대' 등 교명후보군 덕택인지 약 72.2%의 반대라는 결과가 나왔다.[15] 그러나 제2차 교명재창출추진위원회 회의에서는 이러한 투표결과를 무시했고, 대학 본부는 또 다른 교명 재창출 설문조사 사전설명회를 강행했다.

게다가 공과대학(천안캠) 교수 측에서 교명 변경 촉구 성명서를 대놓고 홈페이지에 올렸다. 부총장을 겸임하고 있는 공과대학 학장이 대표자로 되어있어서 공과대학은 교명 재창출에 찬성하는 입장임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따라서 대학본부는 교명 재창출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설문 조사 대상에서 학생들을 전원이 아닌 학생 대표들[16] 만 참여할 수 있도록 한정짓는 바람에, 1만명 이 넘는 재학생을 제쳐두고 1백여 명 정도의 아스트랄한 표본을 제시했다. 게다가 설문조사가 실명과 학과를 밝혀야 참여할 수 있고 이메일을 통해 이루어졌다. 공주대학교 총동창회는 이런 설문조사를 받아드릴 수 없음을 밝히고 불참을 종용했는데, 덕분에 전체 52.3%라는 저조한 참여율을 기록했다. 그래서 사실상 반대자를 빼고한 투표니 당연히도 교명 재창출 찬성 의견이 무려 86%가 나왔다. 그리고 대학 본부는 설문조사 결과대로 재창출을 주도하기로 했다.

이어지는 2012년 12월 한달동안 학생사회에서 총학생회에 대한 비판여론이 일었는데, 당시 총학생회장이 교명 재창출을 주도하는 공과대학(천안캠) 출신이라 학우들의 반대여론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는것 아니냐는 비판론이 제일 크게 일었다. 설상가상으로 대선과 맞물려 총학생회장의 정치참여 의혹과[17] 총학생회 간부가 음주 후 재학생과 졸업생에게 공개적으로 폭언을 한 사건까지 일어났다.[18] 위와 같은 사건들로 인해 총학생회의 신임도는 대폭락하는 상황[19]에 처한 채로 2012년의 임기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2013년 차기 총학생회마저 재학생들이 못 미더워 하는 상황이었다.[20]

그리고 학교측은 홈페이지에 당당하게 '교명재창출' 관련 문건을 게시함으로써, 재창출 완료 시기로 예정된 2013년 8월까지 교명재창출에 전력투구할 것임을 천명했다. 학교측은 '재창출 의견에서 기존 교명으로 재창출 하자는 의견이 제일 많으면 그렇게 진행할 것' 이라고 했지만 학생들은 불신했다. 이 과정에서 공대(천안) 학생회와 소속 학부들은 교명을 바꾸면 천안시 내에서 취업이 잘 된다느니 천안에서 장학금 등의 지원금을 준다느니 등 가짜뉴스로 대자보를 쓰는 등 거짓 선전과 선동을 진행했다.[21] 그 결과 2013년 교명투표에서 최종 교명으로 한국대[22]가 선정, 공주대학교 구성원을 3개 그룹으로 나눠 실시한 투표에서 2개 그룹이 유효투표수의 3분의 2 이상을 지지한 이름을 새 교명으로 정하기로 했다.

제1그룹 전임교원은 548명 중 469명이 참여(투표율 85.58%)해 한국대 359표(76.55%)였다. 제2그룹 직원 및 조교의는 372명 중 327명이 참여(87.90%)해 한국대 209표(63.91%)였고, 제3그룹인 재학생은 1만6131명중 1만2018명이 참여(투표율 74.50%)한 가운데 한국대 3870표(32.24%), 무효 14표였다. 즉, 교원 찬성 확정, 학생들은 반대 확정이었으나, 교직원이 63%가 교명변경 찬성 36%로 최종 부결[23]되었기 때문에 교명은 공주대로 재창출되었다. # 사실 여기서 한국대가 뽑혔다해도 교육부가 또 반려 했겠지만.

결국 공주대 재창출로 결론이 났기 때문에, 천안시 곳곳에 변경요구 현수막이 걸려있다가 제거되는듯 싶었으나 터미널을 기점으로 다시 걸렸다(…) 14년 5월에도 공과대 쪽에서 다시 이슈로 떠오르게 하려고 하고있다. 아마도 천안시의 압박 때문에 계속 수면위로 떠오를 듯 싶었으나....2015년 총학생회장이 사범대 출신[24]으로 선출된지라 수면 위로 떠오르더라도 교명변경이 통과되는 것은 쉽지 않아보인다. 2016년 총학이 공과대학 소속으로 뽑힘에 따라 교명변경이 다시한번 수면 위로 떠올랐지만 금세 잠잠해졌다. 왜 총학생회장은 거의 매번 공대생인거 같지[25]

6.3. 신천지 위장동아리 청산

공주대에서 신천지가 유명세를 떨치게 된 시점은 2011년부터이다. 지금의 포교유형과 비슷한 수법으로 MBTI 및 심리테스트를 가장하여 사람들과 만난 후 연락처를 수집하고 이후 소규모 만남을 통해 좋은 선배처럼 행세를 하다가 공부를 해보자며 뜬금없이 성경을 읽고 학외 신천지센터에 데리고 가는 방식이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00년대 중반부터 동아리 "뜨인돌"을 통해 숨죽이며 세력을 넓혔고, 동아리들을 대상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스펙트럼을 넓히고자 동아리연합회를 먹는 계획을 2010년까지 점차적으로 시행하였다.

2011년 동아리연합회장을 선출하는 선거에서 당시 YMCA 동아리회장이었던 송XX 후보를 내세우게되는데, 선거운동과정에서 기독교동아리인 CCC가 후보자 자질에 대한 문제제기를하며 '후보자 신천지 의혹 논란'에 휩싸이게 된다. 당시의 동연 선관위는 긴급회의를 통해 사태파악 및 진상조사에나섰으나 결국 물증이 없었고 의혹만으로 후보자를 결격시킬 수 없음으로 ‘후보자 자격발탈 안건’은 부결되었다.

이 당시에는 기독교 관련 동아리들의 갑질횡포도 심했고 운동권 학생회가 워낙 막장으로 치달아, 그 당시 나온 송xx 후보가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결국 개표결과 2011년 다이나믹 동아리연합회장으로 당선되었고, 제일 먼저 동아리연합회 회칙에 아래의 항목들을 추가시킨다.

물론 이 조항은 겉으로만 보면 정말 당연한 소리였고, 그 당시 판을치던 기독교 분과와 운동권의 갑질과 소리지르기식 주장에 지친 타 분과 동아리는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다.. 이 조항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몰랐으니까.
제5조(회원의의무)
1. 건전한 동아리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타 동아리에 대한 근거없는 비판은 지양한다.
제6조(징계)
1. 타 동아리 이미지 훼손, 동아리활동 인신공격, 동아리회원 모집 유치에 저해가 되는 행위 및 언행은 심의를 통해 징계.

2011년 3월 24일, 격론 끝에 위의 회칙 변경 안건이 통과되었고 C.C.C 및 기타 종교동아리들의 의혹 및 문제 제기가 원천적으로 막히게 된다. 권력을 잡은 연합회는 회칙을 근거로 ‘문제제기 시 징계’를 통해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무력화 시키며 말을 듣지 않을 시 징계하는 행태를 2014년도까지 반복한다. 신천지가 장악한 동아리연합회는 2011년도부터 약 4년간 집권하며 자신들의 세력을 뒷받침하는 위장동아리를 개설했는데 그 동아리들이 ‘쎄아’, ‘나래하늬’, ‘헨젤과그레텔’, ‘지니’,‘탁상공론’, ‘뜨인돌’이다. 이로인해 동아리들 내에서는 서로를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현상으로 나타났고 신입생 및 재학생들은 동아리에 대한 인식은 ‘신천지’로 귀결되는 안타까운 현상이 약 4년간 이어졌다.

그런데 2015년 동아리연합회장 선거에서 신천지가 내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김XX 후보와 이를 반대하는 박XX회장이 경선과정에서, 신천지 동연쪽이 비공식적으로 김XX 후보를 밀어주었다는 부정선거 의혹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여 3각 캠퍼스 모두 우세한 숫자로 박XX 회장이 당선되는 일이 벌어졌다.

박회장의 이노베이션 동아리연합회는 동아리사회의 중요 간부급 인원들과 이 문제를 논의하고 해결할 방안으로 ‘위장 동아리의 등록취소’를 내세웠다. 신천지 내부고발자의 자료를 바탕으로 11~14년도 동아리연합회장, 동아리연합회 간부 및 위장동아리 회장이 신천지에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던 명단 및 사진을 증거자료로 제출하여 각 동아리 회장들에게 공개했다.

보다 정확하게는 ‘신천지 명단은 기독교쪽의 의견이었으므로 이것이 오피셜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당연하지만 단순히 종교활동을 하는것 자체는 자신들의 자유였고, '동아리 명목'에 맞지 않는다고 해봐야, 그 동아리를 동아리연합회가 '탄압'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었기에, 실질적으론 종교적 영향력은 크게 의미가 없었다.(적어도 비종교인들에게는) 문제는 이 시기 종교분과장도 그 사실을 인정하며 비종교분과를 설득할 방향을 고치고, 신천지 동아리를 다른방식으로 노려보게 된다.

바로 '신천지 동아리' 활동을 할거면 종교분과에 등록해서 활동하라. 그렇지 않으면 실질활동 점검 후 학생복지과에 보고가 들어갔을때, 동아리 지원금등에 대하여 패널티를 입는다. 라는 내용으로 돌려깎는 노선을 변경하는것. 실제로 해당 문제는 학교측에서 여러번 이야기가 나왔고, 당시 편집국장을 기조로 종교분과장이 설득을 하게 되었는데, '우리활동을 왜 니들이 간섭하냐?' '지금 싸우자는거냐?' '말 ㅈ같이하네' 등등 위장동아리 측에서 상당히 적대적이고 원색적인 비난을 하며 자신들의 수준이 얼마나 낮은지를 증명했으며, 쌓여있던 '기독교 측 기준' 자료와 종교분과장이 가져온 '신천지 출신 인원의 고백' 거기에 '신천지 위장동아리'와 연관이 깊던 2011년도 동아리연합회 간부출신의 졸업생의 증언내역 까지 2015년 편집국장이 입수하게 되면서, 상황이 반전된다.

요컨데 단순히 신천지 활동을 하는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소통도 안되는데다가 거짓 명목을 내세워 다른짓을 하니 별로 관심없던 사람들 조차 크게 문제가 있고 잘못되었다 느낀것이다. 결국 위장동아리들은 즉각 반발하고 고소.고발을 통해 대처하겠으며, 명예훼손과 허위사실이라고 주장하여 반목이 이어졌다. 그러다 연합회의 공식 회의기구인 '동아리대표자회의'를 통해 위와 같은 두 가지로 맹렬히 공격당하고 여론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조성되자, 위장동아리 중 하나였던 '뜨인돌'의 회장이 이런 발언을 하게 된다.
"뜨인돌에서 이름을 신천지로 바꾸겠다. 우리는 종교동아리로서 분명하게 활동하겠다”

당시 회장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폭소... 참고로 동년 9월에 종교분과장 서명으로 '정식으로 인정된 종교에 한하여' 종교분과 동아리 개설을 허가하는 안이 학교에 올라간적이 있다. 이걸 박회장이 알랑가는 모르겠지만.

여튼 2015년 4월 20일 제3차동아리대표자회의에서 ‘쎄아’, ‘나래하늬’, ‘헨젤과그레텔’, ‘지니’, ‘탁상공론’, ‘뜨인돌’은 공주대학교 동아리의 역사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참고로 이 동아리들은 각각 '탁구,제과,기독교 등' 으로 명목을 위장한 상태로 들어온 '신천지활동을 주 목적'으로 하는 동아리로 실명을 남겨둔다. ‘기독교 동아리인 줄 알았는데 사이비 종교 동아리라니’(국민일보)

6.4. 공주대 총장 공석 사태

공주대는 박근혜 정부가 뚜렷한 이유 없이 총장 후보자의 임용제청을 거부한 첫 사례로, 2019년 5월까지 무려 62개월간 총장 직무대행 체제로 운영했다. 직무대행 체제로는 유일무이한 최장기간이였다.

공주대는 최초 총장임용추천위원회 투표에서 최다 득표한 김현규 교수를 1순위 후보자로, 최성길 교수를 2순위 후보자로 교육부에 추천했으나, 교육부는 14년 7월 두 사람 모두 부적합하다며 공주대에 재추천을 요구했다. 이에 일각에선 청와대가 친정부 성향의 '코드인사'가 아닌 국립대 총장 후보자들에 대해서는 임명을 반대한다는 설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결국 김 교수는 아무런 이유 없이 임용제청을 거부한 교육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1심 재판부는 김 교수 손을 들어줬다. 교육부는 즉시 항소했으나 패소하자 지난 2015년 9월 대법원에 상고했다. 상고 이후 2년 9개월 만인 2018년 6월 19일 대법원은 김 교수가 승소한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교육부 패소 판결을 내리면서 총장 후보자로 부적격하다고 판단해 임용제청을 하지 않을 경우 부적격 사유를 구체적으로 제시할 의무가 있다며 결정 이유를 밝혔다. 문재인 정부 들어 공주대, 한국방송대, 전주교대 등 총장 장기공석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직권으로 임용제청 절차를 진행한 한국방송통신대, 전주교대와 달리 공주대는 대법원 소송을 이유로 마지막까지 총장 임용제청을 보류하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미 교육부는 지난 17년 11월 6일에 기존 총장 후보자 가운데 1순위에 대해서 '적격' 판정을 내린 적이 있다. 이에 따라 공주대는 적격 후보자 수용여부를 1개월 내 교육부에 회신하는 2단계 절차로 온라인 투표를 통해 대학 구성원의 의견을 수렴을 진행했었다. 하지만 1순위인 김 교수는 '대학본부가 주관하는 온라인 투표 여론조사를 중지해 달라'는 가처분신청을 법원에 내었다.[26] 그럼에도 진행된 2017년 12월 4-5일 김현규 후보의 총장 임용 수용여부에서 대학 구성원(교수, 직원, 조교, 학생)의 투표결과 88%가 해당 후보의 임용을 반대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반대결과를 수용하라며 총 사퇴도 하려고했다.

해당 교수는 총장 후보 시절 천안으로의 본부 이전과 교명 변경, 학과 구조조정을 주요 공약으로 내새운 바가 있어서 지역사회와 동창회를 비롯하여 반대하는 쪽이 적지 않다. 그래서 온라인 투표 여론조사가 부당하다 판단나도 ‘대학의 의사확인’ 절차를 반드시 밟아야하기 때문에 이를 둘러싼 학내 진통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게다가 공과대학 출신인 총학생회장이 김 후보에대해 지지 의사를 밝히며 삭발시위를 사전에 공주대 구성원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은채 해서 이에 대한 여론도 좋지 못한 상황이다. 이 부분은 2018 총학 논란 문단을 참조 바람. [27]

그러다 최근 공주대는 제7대 공주대 총장임용후보자 선거 공고를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선거는 2019년 1월 29일부터 30일까지 이틀간 후보자 등록을 했고 합동연설회 등을 거쳐 2월 15일에 토표를 치른다. 또한 간선제였던 방식을 학내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는 직선제로 바꾸어 선출한다. 교육부가 대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기존 1순위인 김 교수를 최종 부적합 결정을 내렸고, 김 교수는 현재 교육부를 상대로 소송을 벌이고 있던 상황이라 선출되더라도 법적 다툼에 휘말리지 않고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느냐에 관심이 쏠렸다. 그러나 김 교수는 30일 교원 전체에게 보낸 메일에서 "총장선거 중지 가처분 신청을 하지 않겠다"며 "새 총장을 중심으로 우리 대학의 저력을 보여달라"고 밝혀 선거는 문제 없이 치를 수 있었다. # 그럼에도 현 정부가 총장선거 선출자에 대한 미임명으로 인해 아직까지 총장은 권한대행인 실정이었으나,[28] 뒤늦게 제7대 총장에 원성수 교수가 임명됐다고 5월 31일 밝혔다. 그리고 별다른 일 없이 4년간 임기를 마치고 임경호 총장에게 이임했다.

6.5. 조국 전 장관의 딸 인턴 관련 논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조민 공주대학교 국제조류학회 페이퍼 초록 제3저자 등재 논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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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2020년대

7.1. 스마트수산자원학과 동물 학대 논란

“잡았다 놔주는 게 학대냐”…공주대 축제 송어잡기 논란(한겨레)

2023년 5월 25일 국립공주대학교 예산캠퍼스 대동제에서 스마트수산자원학과(수산생명의학과 개편 예정) 학생회는 ‘아∼재밌다 송어잡기!’ 대회를 열었다. 대학 본관 앞에서 오후 6시부터 4시간 동안 대회는 진행됐고, 100초 동안 송어를 가장 많이 잡은 참여 팀에게 경품을 줬다. 이에 대해 학생들의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이었으나, 일부 학생들은 유희적 도구로 동물을 활용한 것은 윤리적이지 못한 행위이자 동물 학대라 주장하며 논란이 되었다. #

스마트수산자원학과 학과장은 “잔인한 방법이 학대지 우리 학생들은 잡았다가 다시 놔준 건데 그것이 학대라고 하면 양식하는 사람들도 다 고발해야 하지 않나?”라며 전혀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와 유사 사례로 화천산천어축제가 동물 학대라며 동물보호단체에서 최문순 군수를 동물보호법 위반으로 고소했으나, 춘천지방검찰청 서울고등검찰청은 산천어는 축제를 위해 양식돼 동물 학대로 볼 수 없다며 항고까지 불기소 처분을 내린 바가 있다.

8. 기타 사건 사고[29]



[1] 하지만 수요문학회는 1978년도에 율문학회라는 이름으로 다시 활동, 한누리 문학 동인회를 거쳐 지금은 한누리 문학회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이다. 이처럼 정치.사회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으로 창작활동을 펼쳤던 수요문학회 회원 중 다수는 졸업 후에도 대전지역 무크지 <삶의 文學>을 통해 더욱 더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였으며 개인시집을 발표되었으며,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참여자 다수가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2] 이는 1983년(혹은 1984년)에 ‘두레’라는 이름으로 다시 부활하였으나 지금은 그 명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3] <공주대학교 50년사>, 공주대학교50년사편찬위원회, 1998, 130p. <충남지역문화운동소사>, 충대신문, 1988.6.6 [4] <공주대학교50년사>, 공주대학교50년사편찬위원회, 1998, 131p. [5] 공주대학교50년사, 공주대학교50년사편찬위원회, 1998, 132-137쪽. [6] 전기통닭을 굽듯 사람을 꼬치에 매달아 놓고 돌려가면서 두들겨 패는 고문 수법 [7] 실제로는 이념서적도 아니며, 역사를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에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것을 읽어봤을 정도로 기본서 중 기본서이다. 한마디로 개념 자체가 없다는 말. 물론 그의 전공영역이 소련사였기 때문에 이것만 보고 불온서적 결정을 내린 측면도 있다. [8] 왜 교원대(84년 대통령령 공포)가 여기 들어가나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정부가 별도의 교원양성기관으로 기존의 사범대학과 교육대학과의 관계와 차별성이 충분히 정리되지 않은채 정치적으로 설립하였다는 점에서 논란이 없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81년 제정된 교육세법은 82년부터 86년까지 5년간 1조 5천억원을 교육환경을 개선하고자 하였던 시한부 목적세임에도 불구하고 목적 이외의 용도로 전용되었다는데서 문제 제기가 이루어진 것이다. [9] <공주대학교50년사>, 공주대학교50년사편찬위원회, 1998, 160-164p. [10] 참고: 예산농업전문대학 통합시 합의서(1991. 09. 02.)에는 교명 변경 약속 없었음. 공주문화대학 통합시 합의서(1999. 10. 22.)에는 교명 변경 약속 없었음. [11] 공주대-천안공전간 통합시 작성된 이면합의서는 법적구속력이 없다는 답변을 교육부로부터 들었다한다. # [12] 1) 교직원(61.8% 참여) - 공주대 유지 48.15%, 신행정수도 37.04%, 제3안 14.81% 2) 학생(1,020명 참여) - 공주대 유지 88.62%, 신행정수도 7.94%, 제3안 3.43% [13] 천안시에 산학협력과 사업협력을 중단할것을 요청하기도 했고, 더 나아가 천안시 공주대 교명변경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정례회를 열고 교통표지판에서 공주대 명칭을 제거하라고 요구했다. # [14] 여기서 중요한건 교명 재창출이란 무조건 교명을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현 교명보다 더 나은 교명이 창출된다면 변경하겠다는 의미이다.(제1차 교명 재창출추진위원회 회의자료) 그래서 결국 공주대로 재창출 되었을 때 공대(천안캠)측도 일시적으로 승복한거다. [15] 투표 참여 인원 5974명 중 반대 인원 4296명, 찬성 인원 1678명을 기록함.(투표 규정상 1~3학년 재학생 한정이었고, 3개 캠퍼스 학생 모두 참여했다) [16] 총단위 학생회 (총학생회, 총여학생회, 총예비역회) 임원진 + 각 단과대학 학생회 임원진 + 각 학과 대표 [17] 평소 '총학생회장의 입장에 서서 정치적인 의견 표명 또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해왔었는데, 의혹이_실제로_일어났습니다.txt [18] 학교 홈페이지 게시판에 총학생회와 총학생회장을 성토하는 여론속에서 총학생회장이 담배꽁초를 버리다 미화원 아저씨에게 혼났다는 목격담이 올라왔는데, 당시 총학생회 기획국장이 술 마시던 상태에서 목격담을 쓴 글쓴이에게 비속어가 섞인 폭언을 했고, 뒤이어 목격담의 글쓴이와 동명이인인 졸업생이 사무국장을 성토하면서 휴대폰 번호를 공개하자 바로 전화가 와서 '글 지워 XX야' 라고 외쳤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 # [19] 당시 총학생회 별칭인 'SUM'을 비꼬아서, 공식홈페이지 열린광장에서는 '총학생회가 숨만 쉰다', '숨! 기만 한다' 고 비판하였다. # [20] 게다가 차기 총학생회장도 공과대학 출신이다. 그리고 이는 어느정도 사실이었다. # 사실 공주대 학생들은 학생사회에 관심도와 참여도가 적고 선거도 나오기만 하면 찬성을 찍어주는 듯 한 양상을 보여, 누가 총학생회장을 하든지 신경을 별로 쓰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21] 아쉽게도 학교측에서 2016년 이전의 글들을 모두 삭제하였다. 당시 자료(접속불가) 해당 링크에 적힌 내용은 한 학우가 천안시에 정보공개를 요청해 밝혀진 것들로 천안시의 장학금이나 학교지원비는 교명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고, 천안시는 교명이 바뀌는 여부와 관련해 지원할 계획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애초에 국립대학이므로 학교는 국비로 운영된다. 아울러 교명이 바뀌어 천안캠에만 이득이 가면 다른 캠퍼스는 어떡하란 얘기인가? [22] 참고로 한국대학교는 예전 2010년에 같은 국립대학인 서울과기대의 교명 후보 중 하나였으며, 교육부에서 반려시킨 전례가 있다. [23] 2개 그룹을 동시에 만족하는 유효투표가 없음. [24] 원래 사범대쪽에서 교명변경에 대한 반대가 심한데다 2015년 총학생회장은 2014년에 사범대 학생회장이었다. [25] 아닌게 아니라 12년, 13년, 16년, 17년(인사대로 전과), 18년, 19년도까지 총학생회장이 공대에서 나왔다. [26] 교수사회 내부에서의 정치 문제가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 [27] 결국 이 점이 문제되어 탄핵 발의를 하기도 했으나 어째서인지 금방 취소되었다. [28] 국립공주대학교 총장은 장관급 인사로 대통령의 임명이 있어야만 한다. [29] 별도의 문단이 필요할 정도로 큰 사건은 아니나 자잘한 사건 사고들을 기술해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