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 반란 지도자 · 할거정권 군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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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양흘 | |||
{{{-2 남조 황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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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 제2대 |
구양외 | 구양흘 | |
{{{-2 주군: 남진 황제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남진 제2대 양산군공 歐陽紇 | 구양흘 |
|
봉호 | 양산군공(陽山郡公) |
성씨 | 구양(歐陽) |
휘 | 흘(紇) |
자 | 봉성(奉聖) |
부친 | 구양외(歐陽頠) |
생몰 | 538년 ~ 570년 |
재위 | 563년 ~ 57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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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 진나라의 인물로 담주(潭州) 임상현(臨湘縣)[1] 출신이다. 아버지는 남진의 대사공을 지낸 구양외(歐陽頠), 아들은 당나라의 서예가인 구양순이다.2. 생애
563년, 부친 구양호가 죽자 구양흘은 양산군공(陽山郡公)에 봉해지고 도독교광(都督交廣)을 비롯한 19주 제군사 및 광주자사(廣州刺史)에 임명되었다. 또한 남방인 백월(百越) 지역을 10년 동안 다스리면서 그곳에서의 평판이 올라가는 등 선정을 펼쳤다.그러나 진선제는 구양흘이 그 세력을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입조(入朝)하게 했다. 구양흘은 입조하면 해코지를 당할까 두려워 반란을 일으켰지만 570년 장소달(章昭達)의 수군에게 패해 붙잡혔다. 이후 건강(建康)으로 압송된 후 구양순을 제외한 일가가 처형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