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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5 23:16:40

괴담의 원리


1. 개요2. 시리즈 목록
2.1. 나를 흉내내는 것2.2. 그것은 삼행시를 모른다2.3. 행복한 우리집
3. 설명

1. 개요

나폴리탄 괴담 마이너 갤러리의 모 유저가 작성한 나폴리탄 괴담 시리즈. 이 괴담을 작성한 유저는 나폴리탄 괴담 마이너 갤러리의 파딱이 주최한 '제1회 낲갤 백일장'에서 17점으로 우승을 달성한 유저로, 시리즈를 포함해 현재까지 총 6개의 괴담을 작성했는데 6개 작품 모두 댓글마다 호평을 받기 일쑤다. 오죽하면 진짜 프로 작가가 취미로 갤러리에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니냐는 말도 있을 정도.

2. 시리즈 목록

현재까지 총 3편이 작성되었다.

2.1. 나를 흉내내는 것

[ 스압 주의 ]
> 1

엄마가 밥 먹으러 오라고 부르는 소리가 얼핏 들린 것 같아서 나는 거칠게 헤드셋을 벗었다.
평소에는 옆방에서 누나가 부르는 소리도 안 들리는데, 왜 1층 부엌에서 엄마가 밥 먹으러 오라고 부르는 소리는 이렇게 잘 들리는지.

일어나서 스트레칭 한 번 하고 문고리를 잡은 순간.

“곧 가요. 엄마!”

닫힌 문밖에서 내 목소리가 들린다.
다다다닥.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소리가 난다.

“…엄마….”
“오늘….”

엄마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듯한 말소리. 발밑에서 조금 작게 들린다.

나는 비틀었던 문고리를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조심 놓았다.
1층으로 뛰어 내려간 무언가가 나인 척하고 있다.


2

어쩌지.
나는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눈을 질끈 감고 고민했다.

나가봐야 할까.
혹시 누군가가 장난치는 걸까?
하지만 그건 정말 내 목소리였는데. 가끔 디스코드에서 다른 녀석 마이크로 들리는 진짜 내 목소리.

그리고 수상한 건 목소리뿐만이 아니다.
나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차가운 마루에 귀를 가져다 댄다.

“…학교에서…글쎄….”
“…손목….”

1층에서 도란도란한 가족들의 대화가 들린다.
녀석은 마치 나인 것처럼 내 가족들과 떠들고 있다. 나는 두려움에 떨면서 그 대화를 엿들어 보려고 노력한다. 귀를 아플 정도로 바닥에 바싹 붙인다.

“맞아….”
“…나는….”

우웅.
갑자기 주머니에서 느껴진 진동에 놀라서 입을 틀어막고 허리를 바싹 구부렸다.
진정하고 폰을 꺼내보니 우리 가족 단체 톡방에 메세지가 와 있었다.

[엄마 : 부엌에 있는 거 엄마 아니야. 엄마 지금 방 안에 있어.]


3

엄마도 엄마를 흉내내는 무언가를 인지하고 방에서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우린 톡방에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결국 부엌으로 나가 보기로 결정했다. 이런 괴상한 일을 겪는 게 나 뿐만이 아니라는 것. 그 사실이 내게 상당히 큰 용기가 되었다.

끽. 나는 방문을 열었다.
문이 끼익하고 열리는 소음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들렸다. 맨날 보던 하얀 벽과 [멍청이 출입금지]가 적힌 누나방 문이, 오늘따라 굉장히 낯설다.

심장이 쿵쿵 뛴다.

조용했기 때문이다.
고요하다.
방 안에 있을 때는 끊이지 않고 두런두런 들려오던 말소리가 문을 열자마자 뚝 끊겨서 그렇다.

나는 문득 그런 광경을 떠올린다.
가족끼리 모두 모여서 떠들다가 갑자기 아무도 없을 윗층에서 소리가 들린다. 말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문 아빠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쉿하고 모두를 조용히 시킨다.
그리고 식탁에 둘러앉은 모든 이들이 온 신경을 집중한다.
내 소리를 향해서.

나는 숨이 턱 막힌다.
피부에 찬바람이 닿아 한껏 오므라드는 것 같고 당장이라도 밑에서 위로 올라오는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가 들릴 것 같아서, 숨을 들이켜도 폐가 반 밖에 안 차는 것처럼 갑갑하고 어떻게든 이 순간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아아아아아!”

나는 될대로 대라는 식으로 괴성을 지르며 계단을 구르다시피 내려간다.


4

“아, 깜짝이야. 멍청아. 왜 갑자기 지랄인데?”

식탁 의자에 앉은 누나가 나를 보며 인상을 썼다.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러니?”

그 옆에 앉아있던 엄마가 물었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던 아빠도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횡설수설하며 물었다.
엄마가 대답했다.

“네가 여기서 밥을 먹고 있었냐고? 뭔 소리하니, 얘는. 밥 먹자고 하니까 제일 먼저 뛰어왔으면서.”

누나가 킬킬대며 거들었다.

“멍청이. 먹다말고 화장실 급하다고 뛰어가더니 어디에 머리 부딪친 거 아니야?”

나는 계단 옆 화장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문이 활짝 열린 화장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을 하나 더 했다. 누나가 대답했다.

“엄마는 밥 먹다가 어디 안 갔다 왔냐고? 멍청아. 엄마가 너냐?”

나는 미소짓고 있는 엄마의 얼굴을 보다가, 폰을 꺼내서 가족 단톡방을 본다.

[삭제된 메세지입니다.]
[삭제된 메세지입니다.]
[삭제된 메세지입니다.]
[삭제된 메세지입니다.]

엄마와 나눈 톡이 모두 지워져 있다.


5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입맛이 없어서 밥은 먹지 않았다. 부모님은 내가 너무 조금 먹는 게 아니냐고 걱정했다.
하지만 난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알 길이 없어 가족들과 있고 싶지 않았다. 방문을 잠가버리고 헤드셋을 뒤집어 썼다.
귀신에 홀린 것이라면 빨리 끝나기를 기도하며 게임을 킨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창문 밖이 깜깜한 걸 보니 밤이다.
나는 헤드셋을 벗었다.

달칵.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달칵달칵.
무언가가 내 잠긴 방문을 열려고 한다.

“아빠. 방문이 잠겼어요.”

내 목소리로 우리 아빠한테 도움을 요청하면서.


6

나는 침대 아래로 숨었다.
문밖에 있는 것과 마주치면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 직감 같은 게 아니다. 보다 실제적인 감각이다. 뜨겁게 끓고 있는 냄비 주변의 후끈한 공기를 느끼고, 저 냄비를 만지면 손을 다치겠구나 알게 되는 것에 가까운.

“아빠. 문이 잠겼어요.”
“그렇구나.”
“누가 안에서 찰칵하고 잠근 것처럼.”
“부술까?”

아빠의 목소리와 내 목소리가 번갈아 들린다.
나는 혹시 몰라 벽에 닿을 때까지 몸을 밀어넣어 침대 아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숨었다.

꽝. 부서지는 소리.
문이 열렸다.
나를 흉내낸 그것의 하얀 발이 발목까지 보였다.

“고마워요. 아빠!”

그것은 문을 닫지 않아서 난 아빠의 두 발도 볼 수 있었다. 아빠의 발은 문앞을 조금 서성거리다가 계단 쪽으로 움직였다.
내 방은 문이 계단 방향으로 나있기 때문에 사람이 내 방을 바라보며 계단을 내려가면 점차 눈높이가 낮아져 침대 밑까지도 볼 수 있다.

그런 이치로 나는 계단 중간에 우두커니 선 아빠와 눈을 마주쳤다.
두려움에 젖은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던 아빠가 돌연 크게 외쳤다.

“아들!”
“네. 아빠!”

그것이 대답했다.

“아빠가 항상 말했지! 괜히 집 돌아다니다가 이상한 거 마주치면 큰 일 난다!”

아빠는 엄청 큰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아빠가 언제요? 그리고 그렇게 크게 말 안 해도 다 들려요.”

그것이 내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알겠지! 아들! 꼭 명심해라! 마주치지 마! 나오지 마!”

하지만 아빠는 집이 떠나가라 같은 내용으로 몇 번 더 소리를 질렀다. 그것은 짜증을 내며 문을 닫았다.
문고리가 고장난 문은 완전히 닫혔다가 약간 밀려 나왔다. 나는 그 작은 틈으로 계단을 살폈으나 아빠는 그새 없어졌다.

“아빠도 참. 저게 무슨 말이야. 집에 이상한 것이 숨어있기라도 한 것처럼. 장롱 안에, 책상 아래, 에어컨 뒤에, 침대 밑에. 냉장고 안에, 서랍에 고이 접혀서, 세탁기 안에, 거울 속에.”

그것이 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방 안을 돌아다녔다. 침대 위를 올라갔다가, 책상 위로 올라갔다가, 서랍을 열고 그 안에 발을 넣어보기도 했다.
나는 새하얀 발이 뒷걸음질로 돌아다니는 걸 본다.

그것은 뒤로 걷는다.


7

꼬박 밤을 새웠다.
깜빡 졸기라도 하면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낼까봐 두려워서였다.
나는 문밖을 경계하며 침대 밑에서 기어 나왔다.
그것은 학교 간다면서 아침에 나가버렸다. 귀를 바짝 바닥에 붙이고 부모님과 녀석이 함께 나가는 소리를 확실하게 들었다.

이 집에는 지금 누나와 나뿐이다.

나는 [멍청이 출입금지]라고 써있는 문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일단 메세지를 보내보기로 한다.

[나 : 누나. 지금 어디야?]

까톡.
아래에서 메세지가 왔다는 알림이 들렸다.
나는 소리를 따라 거실로 내려갔다. 에어컨 뒤에 누나의 폰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는 걸 찾았다.
잠금화면을 열 순 없지만 화면 상단에 가장 최근에 온 메세지들이 있다.

[엄마 : 멍청이랑 같이 내려와. 밥 먹게.]
[아빠 : 지금 식탁에 앉아 있는 거 아빠 아니야.]
[멍청이 : 누나. 지금 어디야?]


8

나는 누나의 폰을 손에 쥐고 고민하다가 문득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부모님 방에서 아빠의 골프채를 찾아 들고 누나 방문을 두드렸다.

“어?”

문을 연 누나는 겁에 질린 눈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그리고 입을 연다.

“재희 너 지금 뭐하는 건데?”

나는 골프채를 휘둘렀다.


9

며칠 후.
나는 카페에 앉아 있다.
오픈채팅을 통해 약속을 잡은 ‘괴담박사’와 만나기 위해서였다.
잠시 창밖을 구경하고 있으니 갈색 코트 차림의 깡마른 남성이 내 맞은편에 앉았다.

“재희씨 맞지요? 저 괴담박사입니다.”
“직접 체험한 괴담을 알려주면 돈을 주신다는 게 정말인가요?”
“그럼요. 그럼요.”

괴담박사는 씨익 웃으며 손바닥을 비볐다.

“나는 그것들의 원리를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실은 벌써 두 개나 알아냈죠. 당신과의 대화가 세 번째를 알아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원리. 원리라고요.”

내 마음이 조금 들뜬다. 나는 실제로 얼마 전 괴상한 것들의 원리를 알아내어 극복한 적이 있다.

“그러면 제 이야기가 분명 도움이 될 거에요.”

나는 괴담박사에게 내가 이겨낸 끔찍한 시련에 대해 설명했다.
괴담박사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 말을 끝까지 경청하고는, 이야기가 끝나자 박수를 짝 쳤다.

“돈을 드릴 순 없겠군요. 아쉽지만 당신의 이야기는 내게 어떠한 영감도 주지 못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하지만 돈 대신, 내가 간신히 알아낸 두 가지 원리를 알려드리지. 도움이 될 겁니다.”
“돈 주세요.”
“첫 번째 원리.”
“돈 달라고요.”
“항상 인간이 패배하고 괴담이 승리한다.”

나는 거기까지 듣고 진실을 깨닫는다. 두 번째 원리를 듣지도 않았는데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됐다. 이건 실제적인 감각의 영역이 아니라 육감 혹은 직감의 그것이다.
나는 집으로 달려가서 세탁기 안을 들여다 보고, 누나 방 서랍을 열어 보고, 냉장고를 열어 봤다.
그렇구나.
나는 문이 활짝 열린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 속으로 들어간다.

2.2. 그것은 삼행시를 모른다

[스압주의 ]
> 1

[방송 : 관리사무소에서 알립니다.]

에브리 파크 아파트 101동 곳곳의 스피커가 잡음과 함께 울렸다.

[방송 : 당장 귀가하시고, 절대 집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집밖으로 나오거나 문을 열지 마십시오. 이건 실제 상황입니다.]

나는 친구들과 아파트 옥상에서 망원경을 설치하다가 그 이상한 방송을 들었다.
우리 넷은 서로를 보며 뭔 이상한 일도 다 있다고 웃었다.
잠시 후.

다다다닥.
계단과 연결된 옥상 문 안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발소리는 점점 커졌고, 다급한 숨소리와 허둥거리며 벽을 치는 소리, 그리고 마침내.

쿵쿵!

[누군가 : 저기요! 거기 사람 있죠? 열어줘요! 빨리! 문 좀 열어봐요!]

별 구경을 방해받지 않으려고 미리 잠궈둔 옥상문을 누군가가 두드린다.

[누군가 : 제발요. 제발. 제발. 부탁합니다. 와요…. 저 죽으면 안 돼요….]

문을 마구 때리고 긁고 문고리를 힘껏 비트는 소리, 절규.
그 처절함에 나는 몸이 굳어서 친구들의 눈치만 살폈다. 친구들도 당혹스러운지 멀뚱히 서서 입을 여는 사람조차 없었다.

[누군가 : 안 돼…. 안 돼….]

문을 긁는 소리는 점점 약해지고, 악을 지르는 괴성도 점차 줄어들 때.

다다다닥. 뛰는 소리.
달칵. 계단 창문 같은 걸 여는 소리.
잠시 정적. 그리고.

철퍽!
옥상문 반대편이 아니라, 아파트 아래에서 들려오는… 무언가 으깨지는 소리.

나는 직감적으로 그 소리의 정체를 알 수 있어서, 도무지 아래를 내려다 볼 수가 없었다.
용기 있게 고개를 내밀고 밖을 내려다 본 C는 눈을 질끈 감고 구역질하기 시작했다.

결국 아직까지 구토를 하고 있는 C를 제외한 우리는 다 같이 내려다 보았다.
반 쯤 뭉개진 시체가 부서진 몸을 질질 끌고 다시 아파트 안으로 기어 들어오고 있었다.


2
인터뷰

[남자 : 반갑습니다. 내가 바로 [공포특급]입니다.]

카페에서 따듯한 라떼를 시키고 앉아 있으니, 갈색 코트를 입은 깡마른 남성이 내 맞은편에 앉았다.
공포특급. 오픈채팅에서 우연히 보고 오늘 약속까지 잡은 닉네임이다.

나는 혹시 몰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나 : 정말 실제로 겪은 괴담을 말해주면 돈을 주십니까?]
[남자 : 그럼요.]

남자는 손을 들어 아메리카노를 한 잔 시키고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남자 : 나는 그것들의 원리를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벌써 두 개나 알아냈지요. 당신의 이야기가 나를 세 번째로 인도해 줄 영감의 원천이길 바랍니다.]
[나 : 원리……. 그렇군요.]

잠시 눈을 감고 떠올려보면, 그 때의 기억은 흐릿하고 안개가 잔뜩 껴있는 것처럼 갑갑하다.
나는 옆에 둔 가방에서 ‘에브리 파크 101동’이라고 적힌 종이 뭉치를 꺼냈다.
이것은 구멍이 엉성한 내 기억보다 더 선명하고 진한 기록이다.

[나 : 저도 그것의 원리를 하나 알고 있습니다.]

내 말에 공포특급이 입가에 웃음기를 지우며 눈을 반짝였다.

[남자 : 무엇인가요?]
[나 : 그것은 삼행시를 모른다.]


3

눈을 뜨자 보이는 건 텐트의 주황색 천장이다.
조금 몽롱한 채로 가만히 뾰족한 텐트 끝을 응시하고 있으니 서서히 무언가 떠오른다.

다 같이 밤새 별을 보자며 넷이 함께 옥상으로 올라왔고.
텐트와 망원경을 설치하는데 들린 그 기이한 방송.
그리고, 그 흉측한 장면.

끔찍한 밤이었다.
간헐적으로 찢어지는 비명이 들리고, 신나는 웃음소리도 들렸다.
가끔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나는 듯 다른 소음보다 더 선명한 말소리도 들렸다. 열어주세요라고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소리. 그러나 뭔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금방 사라지곤 했다.

D는 내 옆에서 사색이 되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나는 D와 함께 텐트 밖으로 나갔다.


4
인터뷰

공포특급은 내 말을 듣고는 고민하는 듯 눈썹을 찡그리다가,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두 손바닥을 비볐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막대기 같은 것을 꺼냈다.
막대기의 측면에 달린 버튼을 누른 남자는 그것을 주머니가 아니라 테이블 가운데에 두고는 입을 열었다.

[남자 : 사행시…, 아니 삼행시라. 조금 의외군요.]
[나 : 못 믿으시겠지만 사실입니다. 들어보세요.]

나는 종이 뭉치 중 몇 장을 꺼내 눈에 가까이 대고 글자를 읽었다.

[나 : 깨어난 우리는 다섯이 모여 서로의 몰골을 확인했다. 모두 잠을 설친 듯 개판이었다. 갑자기 지지직 거리는 소리가 동내에 울려퍼지고 관리사무소의 방송이 전해졌다.]

공포특급이 내 말을 끊으며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남자 : 실제로 방송이었나요? 아니면 환청?]
[나 : 방송입니다.]

내 대답에 남자는 뭔가 만족했다는 듯 웃으며 말을 계속하라고 손사래를 쳤다.
나는 계속해서 읽어나갔다.

[나 : 당장 집밖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스피커는 이렇게 말했다.]
[남자 : 그것 참 기이하군요. 전날에는 나오지 말라고 하더니.]


5

[A : 말이 다르잖아. 어떤 말을 믿어야 되지?]
[D : 아니 애초에 저 방송이 정상일까? 밤에 그 웃음소리들 나만 들었어?]
[C : 똑바로 들어보자, 일단.]

방송이 계속 됐다.

[방송 : 관리비서실에서 알린다? 립니다. 방에 들어가든 말든입니다. 그렇습니까? 고마워요.]

지지직거리는 잡음 사이로 아예 부서진 문장이 나열된다.

[C : 똑똑한 사람이 저거 해석 좀 해봐.]
[나 : 귀신 들려서 헛소리하는 게 분명해.]
[B : 근데 여기 옥상에서 평생 있을 순 없어.]
[C : 한 번 나가볼까?]
[B : 나는 나가 봐야 된다고 생각해.]

모두 말렸지만 B는 한사코 나가보겠다고 했다.

[B : 내가 아파트 밖으로 나가서 경찰 부를게. 나가면 전화도 제대로 되겠지. 이상한 웃음소리만 나는 게 아니라.]
[C : 뇌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너 그걸 보고도 저기 밖에 나가겠다고?]
[B : 갔다올게.]

완강한 태도를 고수하던 B는 결국 옥상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A는 잽싸게 달려가서 옥상 문을 다시 잠갔다.
터벅. 터벅.
B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
그러던 중 돌연 B의 잔뜩 날 선 목소리가 들린다.

[B : 잠깐, 거기 누구야.]
[B : 아, 당신이군요.]

하지만 곧장 B의 목소리에서 힘이 탁 풀리고, 반가워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B : 반가워요. 어젠 미안했어요. 무서워서… 그러게요. 와, 내장이 참 빨갛네요. 부럽습니다. 먹어도 된다고요? 말만이라도 고마워요.]

그리고는 다다다닥 하고 무언가 계단을 뛰어 올라오더니, 건물 안쪽에서 옥상 문을 두드렸다.
똑. 똑.

[B : 얘들아. 문 좀 열어봐. 꼭 소개해줄 사람이 있어.]
[B : 얘들아? 거기 있는 거 알아. 열어보라니까?]

저 너머에 있는 B는 분명히 정상이 아니었다.
나는 친구들과 어깨를 벌벌 떨며 속삭였다.

[C : 가볼까? B가 이상한데. 구해야 될지도 몰라.]
[D : 미쳤어? 저 문 열면 우리 다 죽을 거야.]

쾅! 쾅!
B는 문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나 : 열지 말자. 저건 더 이상 B가 아니야. 알겠지?]
[C : 좋아. 동의해.]
[A : 너무 끔찍해. 대체 왜 이런 일이….]
[C : 아니 그러지마. 지금은 정신 바짝 차려야 해.]

그때, 다시금 방송이 들려왔다.

[방송 : 집밖으로 나오면 즐겁습니다. 이는 테스트용 방송이니 무시해도 좋습니다. 현상을 설명하지 않아도 검열이 진행되는지 확인하고 있습니다.]
[방송 : 확인했습니다.]

지지직. 지지직.
찢어지는 소음 사이로 방송이 계속 됐다.

[방송 : 그것들은 삼행시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다시 이 방송이 들릴 때 귀를 기울여주세요.]

뚝, 하고 방송이 끊긴 옥상에는. 끼이익. 끼기긱. 끼긱.

[B : 야! 개새끼들아! 이거 열라고! 씨발!]

옥상 문을 두드리다 지쳐서 손톱으로 박박 긁는 B의 절규만이 들리고 있었다.


6
인터뷰

[남자 : 것 참 기묘한 이야기입니다.]

남자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남자 : 은은하지만 지독한 무언가가 점점 다가오는 그런 느낌이 들어요.]
[나 : 우리 넷은 텐트 하나에서 다 같이 있기로 했다. 좁아서 편하게 누울 수도 없었지만 차라리 이게 나았다. 문 건너편의 B는 힘을 다 했는지 조용했다. 어쩌면 아까 아파트 아래에서 들린 철퍽 소리가 B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까지 읽고 나는 목이 타는 것 같아서 잠시 종이에서 눈을 떼고 커피를 마셨다.
공포특급이 재촉했다.

[남자 : 다음은 어떻게 됐죠?]
[나 : 다음은… 방송입니다.]
[남자 : 알 수 없는 그 방송 말인가요?]
[나 : 아니요….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그건….]
[남자 : 고통스러운 기억이라면 천천히 떠올리셔도 좋습니다.]

나는 잠시 심호흡하고 다시 종이를 들고 눈앞에 가져다댔다.
공포특급이 걱정스레 말을 건넸다.

[남자 : 있죠. 너무 힘들면 여기서 그만하셔도 됩니다.]
[나 : 아뇨. 종이를 보고 읽으면 됩니다. 괜찮아요.]
[남자 : 어지러우면 언제든 말을 멈추세요.]


7

지이이익.
귀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방송이 울려퍼졌다.

[방송 : 관리사무소에서 알립니다. 규칙 안내방송입니다. 그것들은 삼행시를 못합니다. 반드시 어디 기록해두시고 꼭 숙지하세요.]
[방송 : 첫째, 나가세요. 집안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방송 : 둘째, 가다가 지치면 창문으로 뛰어내리세요.]
[방송 : 셋째, 지옥에서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습니다.]
[방송 : 넷째, 마음대로 걸어도 좋지만 관리사무소로 오는 걸 추천합니다.]
[방송 : 다섯째, 새로 이사 왔다며 말을 거는 이를 쳐다보지 말고 도망치세요.]
[방송 : 여섯째, 요괴를 퇴치한다는 어떤 미신도 효과가 없으니 시도하지 마세요.]

A는 피곤한 얼굴로 폰에 방송 내용을 받아적고 있었다.
다들 방송에 귀를 한껏 기울이고 있다. 나는 귀에서 이명이 들리고 피곤하여 후드의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그래. 이럴 때 생존일지라도 기록해두자.
나는 폰을 들어 메모장 어플을 켰다.

[방송 : 전 구간 검열 없음 확인. 이제 이 방송 내용이 반복되어 송출됩니다. 어디 기록하시고 꼭 생각하세요. 그것들은 삼행시를 못합니다.]

이후로 구린 스피커는 계속 규칙 안내방송만을 되풀이하기 시작했다.
몇 번을 반복해서 듣고 기록한 A가 오랜만에 웃으며 다급히 손짓했다.
모두가 무릎으로 기어서 텐트 중앙의 폰을 보자, A가 우리에게 속삭였다.

[A : 알아냈어! 삼행시라더니 이거였어. 모든 규칙의 첫 글자!]
[C : 그게 무슨 말이야?]
[A : 첫 글자만 다 모아봐.]

잠시 폰을 내려다보던 D가 중얼거렸다.

[D : 나가지마새요.]
[C : 거 이상한데? 첫 규칙이 나가세요잖아.]
[A : 검열이라고 했잖아. 무언가가 방송을 검열하고 있는 거지. 저번에 그 다 깨진 방송처럼.]
[D : 그러네. 하지만 그 검열하는 것은 삼행시를 모르니까 그것이….]

C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C : 만족할 만한 내용으로 검열을 피하고, 진짜 메세지는 첫 글자로 준 거구나.]
[A : 관리사무소에 저것들을 피해서 우릴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 거야.]

나는 아주 약간의 희망을 품게 된 친구들의 대화에 끼지 못했다.
1일 차의 내 생존일지를 읽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넷이 별을 보러 옥상에 올라왔다.
밖에는 B가 있고, 이 텐트 안에는 나, A, C, D, 이렇게 넷이 있다.

우린 어느새 다섯이 됐는데 그것을 전혀 몰랐다.
무언가가 우리 사이에 끼어서 친구인 척 하고 있다.


8

나는 머리를 쥐어짜냈지만 누가 가짜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다섯이 모두 내 기억에 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C : 남은 물이 좀 있으니 절대 텐트 밖으로 나가지 말자.]
[A : 나가지 말라고 했으니까.]
[D : 그 와중에 물을 챙겼구나!]
[C : 겨우 생각이 났어. 들어오기 직전에.]

저벅.
갑자기 텐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 속닥거리던 친구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나도 숨을 급히 들이키고 엎드렸다.

저벅. 저벅.
텐트 밖에 무언가가 걸어다니고 있다.
맨발이 옥상 바닥을 밟는 듯 조금은 끈적한 발소리.

텐트의 주황색 천 너머에 희미한 그림자가 생겼다.
긴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휘날리는 왜소한 여자의 형상이다. 휘청거리고 절뚝거리는 그림자는 점점 짙어지고 커졌다. 그것이 다가오고 있다.

[누군가 : 저기요….]

손가락이 텐트 문을 지그시 누르더니, 아래로 긁었다. 방수천에서 시익, 소리가 났다.
나와 친구들은 숨도 쉬지 못하고 보고만 있었다.

[누군가 : 이것 좀 열어주세요. 저 배가 고파요. 제 아이도, 아이가 배고프대요.]

텐트를 손가락으로 긁으며 그 여자가 우리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여자는 텐트 천 곳곳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누군가 : 먹을 것 좀 나눠주세요. 굶었어요, 제 아이가. 제 아이만큼은.]

마치 손을 더듬어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나는 순간 무언가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라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거의 동시에 C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듯 팔을 쭉 뻗어서 텐트 문의 지퍼를 움켜쥐었다.

저 여자는 텐트 문을 열기 위해 지퍼를 찾고 있다.

나는 C의 옆으로 기어가 지퍼가 내려가지 않게 꽉 쥐었다.
거의 동시에 앙상하게 마른 손그림자도 바깥의 지퍼를 찾아서 콱 잡았다.
지퍼를 아래로 내리려는 힘이 느껴져서 C와 함께 위로 끌어당기며 버텼다.

[누군가 : 어라, 왜, 왜 안 열리지. 저기요, 우리 애가 굶고 있어요. 아이만큼은.]

점점 아래로 내리는 힘이 강해진다. 이러다 지퍼가 못 버티고 부러지면 어쩌지?
D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가방을 뒤져서 클립을 꺼냈다.
C가 다급하게 외쳤다.

[C : 줘!]

D가 던진 클립을 받은 C가 그것으로 지퍼가 아닌 그 아래의 천을 꽉 집었다. 우리는 그 상태로 온 힘을 다해 버텼다.
그러자 문밖의 그림자가 갑자기 지퍼를 놓고 물러섰다.

[누군가 : 어라. 잠시만요. 저기요. 필요 없어요. 여기 고기가 있네.]

우린 지퍼에 달라붙어서 눈으로 천에 비친 그림자를 끝까지 쫓았다.

[누군가 : 등에 고기를 업고 다니면서 먹을 거를 찾았네. 진짜 나 왜 이렇게 정신이 없지?]

앙상한 그림자의 툭 튀어나온 부분이 떨어지더니, 그것은 뭔가를 주워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누군가 : 쩝쩝, 아이, 맛있어라. 와그작. 아작아작. 맛있어. 맛있다. 왜 이렇게 맛있지. 이거 무슨 고기지. 와작. 무슨 고기가 이렇게 맛있지?]

뭔가를 뼈째로 씹는 빠작, 빠작, 소리가 나고, 덩어리, 같은 것이 사방으로 튀었다.
지퍼를 쥐고 있던 D가 허겁지겁 빈 생수통을 찾아 들고 토악질을 했다.

길고 끔찍한 밤이었다.

[누군가 : 배부르다! 배부르다! 어라? 애기 어디있지? 얘야, 어딨니. 우리 애기 보신 분….]

여자의 중얼거림이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때까지 우리는 그렇게 있었다.


9
인터뷰

[남자 : 재앙과도 같은 밤이었네요.]
[나 : 그렇네요.]
[남자 : 미친 여자는 다행히 아침이 되자 사라졌고요.]
[나 : 해가 뜬 걸 확인하고 우린 텐트 밖으로 나왔다. 옥상문 근처에서는 여전히 B가 중얼거리는 들린다. 아직도 B는 거기에….]

남자가 말을 끊으며 끼어들었다.

[남자 : 있었다…. B는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나는 이 남자가 자꾸 말을 끊어먹는 것이 조금 짜증났지만, 계속해서 읽었다.

[나 : A는 자다가 뒤늦게 우리를 따라 나왔다. A는 새벽에 그 난리가 났음에도 자고 있었다. A에게 새벽의 일을 설명하자 너무 피곤해서 깊게 잔 것 같다며 사과했다. 나는 우리 사이에 우리가 아닌 것이 있음을 알고 있어서 A의 행동이 너무나도 수상했다.]
[남자 : 어지간히도 수상하군요.]
[나 : 일단 같이 모여 급하게 회의를 했다. 모두 더 이상 텐트가 안전하지 않다는 것에 동의했다.]
[남자 : 서로 말이 잘 통하네요, 끼어든 그것이 방해하지 않는 게 신기해요.]


10

우리는 옥상 바로 아래인 11층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계획은 이렇다.

텐트를 고정하는 끈을 길게 연결해서 우리 몸에 묶고, 옥상 난간에서 뛰어내린다. 11층 창틀에 붙어서 공구로 창문을 깨버리고 안으로 진입한다.
집 안에서 무거운 가구 등에 끈을 묶어 고정한 뒤 모두가 차례대로 내려온다.
만약 안에 사람이 있다면 양해를 구하고 설명한다.

가장 어려운 처음 진입을 A가 하기로 했다.
A는 어제 밤을 새지 않아서 체력이 가장 좋기도 했고, 본인이 미안하다며 자원했기 때문이다.

[C : 서서 버티는 사람들이 처음에 잘 해줘야 된다.]
[A : 준비 됐어.]

허리에 줄을 묶은 A는 난간에 앉은 채로 조금씩 엉덩이를 난간 밖으로 뺐다. 우리는 충격에 대비했다.
나는 그러면서도 마음 한 켠의 찝찝함을 지우지 못했다.

그러던 중, 마침내 A의 몸이 난간 아래로 휙 떨어졌다.
우리는 몸을 뒤로 힘껏 당기며 한 번의 충격을 견디고, 다음 순간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찢어질 듯한 괴성과 함께 저 아래에서 퍽! 하고 북이 터지는 소리 같은 게 들렸다.
나는 망연자실해서 딸려 올라온 줄을 바라보았다.
그 끝은 마치 누군가가 공구로 자른 듯 반쯤 깔끔하게 잘려있었다.


11

D는 반쯤 미쳐서 소리질렀다.

[D : 누가 줄을 잘라놨어. 힘주는 순간 끊어질 정도로 잘라놨다고.]
[C : 고 얘기 좀 그만해라.]

C가 그런 D에게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

[D : 너도 봤잖아! 아니, 너냐? 너였냐, 새끼야?]
[C :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마라.]

나도 두 사람을 말리며 울적하게 거들었다.

[나 : 줄 마지막으로 확인한 건 A야.]

D는 할 말을 잃고 옥상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아버렸다.

나는 내심 계속해서 A를 의심했다. A는 자기가 먼저 내려가겠다고 자원하고, 유리창을 깨기 위한 공구를 고르겠다며 공구상자를 뒤적거렸다.

그렇게 사고가 났고.
잘린 줄은 너무 짧아서 11층까지 닿지도 않게 됐다.
우린 옥상에 고립됐다. 줄을 잇느라 텐트도 해체해버린 옥상에.

나는 속이 갑갑하고 메슥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누굴까. 정말 죽어버린 A인가, C인가, D인가, 아니면 내가 미쳐버려서 저지른 일인가.

이런 고민이 의미는 있나.
이대로 밤이 오면 모든 게 끝인데.

[C : 워어. 내려다보지마. A…가 기어 올라오고 있어.]

난간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던 C가 진저리를 치며 경고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충동적으로 옥상 난간 위에 올랐다.

[D : 잠깐! 뭐하는 거야!]

등 뒤로 D가 소리지르는 것이 들렸으나 나는 그대로 뛰었다.

줄이 없어도, 잘만 뛰어내리면.
잘만 뛰어내리면, 될 수도 있다.

저 둘과 함께 밤을 기다리는 그 1초 1초가 너무 답답하고 버티기 힘들어서, 나는 평소였다면 무서워서 절대 하지 못했을 도전을 했다.

몸이 확 아래로 당겨지는 동시에 등 뒤로 손을 휘두른다.
무언가가 기다란 봉 같은 게 잡히는 느낌이 들었을 때 주먹을 꽉 쥔다.

팔이 뽑혀져 나갈 것처럼 아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했다.
나는 11층 난간에 매달렸다.
다행히 창문은 열려 있었다. 나는 허겁지겁 몸을 붙이고 난간을 타고 넘어 11층 베란다로 굴러떨어졌다.

[나 : 하하. 하하하하. 하하.]

심장이 미친듯이 뛰고…, 위에서 시끄럽게 소리 지르는 소리가 들리는 와중에…, 나는 신나게 웃었다.
나는 살아남은 것이다. 생의 아늑함이 비로소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12

[방송 : 관리사무소에서 알립니다. 규칙 안내방송입니다. 그것들은 삼행시를 못합니다. 반드시 어디 기록해두시고 꼭 숙지하세요.]
[방송 : 첫째, 나가세요. 집안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방송 : 둘째, 가다가 지치면 창문으로 뛰어내리세요.]
[방송 : 셋째, 지옥에서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습니다.]
[방송 : 넷째, 마음대로 걸어도 좋지만 관리사무소로 오는 걸 추천합니다.]
[방송 : 다섯째, 새로 이사 왔다며 말을 거는 이를 쳐다보지 말고 도망치세요.]
[방송 : 여섯째, 요괴를 퇴치한다는 어떤 미신도 효과가 없으니 시도하지 마세요.]

먼지가 조금 쌓였지만 푹신한 침대에 누워 지겹게 반복되는 방송을 들으며 창밖을 내다 보았다.
옥상에서 내렸는지 조금 짧은 줄이 대롱대롱 흔들렸다.
마치 여기 연결해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말이야.
저걸 당기려면 집밖으로 몸을 내밀어야 하는데?
친구들. 삼행시를 알고 있어?
방송에서 말하고 있어. 나가지마새요.

이게 내가 너희를 도와줄 수가 없는 이유야.
미안해. 나는 살고 싶어.


13
인터뷰

[나 : 끝…입니다.]

내가 종이를 내려놓자 남자가 내 손등을 토닥거렸다.

[남자 : 모질게 독촉한 것 같아서 죄송하군요. 기억이 조금은 나십니까?]
[나 : 네…. 이걸 읽으면 기억이 조금 납니다. 그 날, 나는 관리사무소에 앉아 있었어요.]

나는 에브리파크 아파트 101동 관리사무소 직원이었다.
그것들을 보고 황급히 안내 방송을 키는 순간 지옥이 시작됐다. 101동을 비추는 여러 대의 CCTV 화면들에 끔찍한 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나는 방송을 틀고 필사적으로 주민들에게 나오지 말라 권고했다.
하지만 막상 101동에 울려퍼지는 내용은 내가 말한 내용과 전혀 달랐다.

[남자 : 른 셴의 명언이 생각나는군요. ‘행동하고 후회하라.’]
[나 : 잘못된 방송을 듣고 나온 주민들은… 그들은 당했습니다. 나는 그걸 모두 지켜봐야만 했어요.]

그것은 방송을 망치는 것 외에 나를 더 지독하게 괴롭히는 방법을 찾아냈다.
관리사무소 복합기로 팩스가 오기 시작했다.
특히 조마조마하게 살피고 있던, 옥상 CCTV에 잡히는 청년들의 이야기가, 종이에 활자로 찍혀서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비참한 기록은 오히려 내 마음에 어떤 불길을 지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자리에 앉은 나는 방송을 망치는 녀석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남자 : 척하면 척이군요. 당신은 정말 대단해요.]

테스트 방송을 미친듯이 되풀이하며 그것의 의도를 알아내고, 그것의 한계를 알아냈다.
그것이 삼행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규칙 안내방송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나 : 그래요. 그것들은 삼행시를 몰라요. 나는 그것을 성공적으로 이용한 겁니다.]

그래. 나는 결국 승리했다.
내 방송을 알아들은 주민들은 문을 잠그고 집 안에서 버티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화가 났는지 팩스로 옥상 청년들이 참혹한 일을 겪는 내용을 계속해서 보내왔으나, 나는 흔들리지 않고 방송을 계속 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관리사무소로 찾아온 무장한 군인들에 의해 구출되었다.
나는 들것에 실려가면서도 옥상청년들의 이야기가 담긴 종이를 손에 꽉 쥐고 환호했다.

[나 : 저는 저뿐만 아니라, 주민들을 지켜낸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공포특급과 눈을 마주쳤다. 남자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뜬금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남자 : 할아버지. 그거 아십니까? 저도 삼행시를 잘하는 편은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정해진 단어로 문장을 만드는 것 말이에요. 그래서 종종 편법을 씁니다. 뜬금없이 문맥과 묘하게 안 맞는 표현을 하거나, 내가 원하는 단어가 나올 때 급하게 끼어들거나, 발음이 비슷하면 억지로 글자를 바꿔쓰거나, 존재하지도 않는 인물과 명언을 지어내죠.]

남자는 한참 전 테이블에 올려놨던 막대기를 집어 들더니, 잠깐 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남자 : 뿐……. 뿐이라…. 이야, 뿐은 정말 어려운 글자네요. 이것도 편법 중 하나입니다. 너무 어려운 글자라고 말하면서 은근슬쩍 써버리는 거죠. 어떠십니까?]

그리고는 막대기 옆에 있는 버튼을 꾹 누르더니 내게 내밀었다.

[남자 : 녹음 종료. 휴! 이제 살 것 같네요. 아무튼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돈을 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대신 내가 알고있는 그것들의 두번째 원리를 가르쳐드리죠. 도움이 될 겁니다.]

내가 반사적으로 막대기, 아니 녹음기를 받자 남자가 신나게 박수를 짝짝 쳤다.

[남자 : 자! 알려드렸습니다!]

공포특급은 그것으로 됐다는 듯 일어서서 코트자락을 툭툭 털더니 카운터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손가락을 탁 튕기더니 등을 돌렸다.

[남자 : 아, 참! 정말 마지막으로 또 하나 알려줄게요. 당신이 팩스로 받은 이야기 말입니다만. 거기도 있지 않았나요? 다급하게 말을 끊거나, 발음이 비슷한 글자를 억지로 쓰거나, 맥락에 묘하게 안 맞는 표현을 하거나 뭐 그런 친구 말이에요.]

그 말을 끝으로 공포특급은 정말 카페를 나가버렸다.


14

나는 녹음기를 계속 반복해서 틀다가 무언가를 깨닫고 에브리 파크 아파트로 향했다.
폴리스 라인을 넘고 101동 마당으로 들어가자 음산한 안개가 끼고 공기가 칼칼해졌다.

마치 그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 같았다.
101동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모든 집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나는 아무 곳이나 들어가려다, 문득 생각을 바꿔서 11층으로 향했다.
11층의 집에 들어가 방안을 확인한 나는 들고 온 종이 뭉치를 한 번 더 읽었고, 듣지도 않은 첫 번째 원리가 무엇인지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문득 허탈해져서, 챙겨온 권총을 들어 나의 턱을 겨누었다.

2.3. 행복한 우리집

[ 스압주의 ]
> 1
이혜진

“혜진 씨, 피곤해보이네.”
“아……, 괜찮아요.”
“안 괜찮아보이는데?”
“화장실 다녀올게요.”

부장이 은근슬쩍 어깨에 얹는 손을 피하면서 그녀는 급히 일어섰다.
그 길로 여자 화장실까지 오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힘들다.
사무실의 유일한 여직원을 향한 더러운 손길은 점점 노골적으로 변해 간다.
이 회사 생활은 점점 당겨지는 고무줄이니, 결국 파열하게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무기력했다.

신경질적으로 세수를 하고 고개를 들자 거울 속의 그녀가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었다.
흠칫 놀랐다.
그녀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 집으로 끌려가기 전 그녀의 마지막 기억이다.


2
김현식

프릴이 치렁치렁 달린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방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자 가장 먼저 보이는 건 거대한 탁자. 그리고 그 식탁을 둘러싸고 띄엄띄엄 앉아 있는 다섯 명의 사람들이다.
그 중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하. 드디어 마지막 ‘가족’이 나타났군.”

나는 언제든 반응할 수 있게 온 몸의 근육을 바짝 긴장시키고, 천천히 걸어서 빈 의자에 앉았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입 안에서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고 있는데 노인이 선수를 쳤다.

“잠깐! 궁금한 게 많겠지만 우리도 아는 게 없네. 자네처럼 정신을 차려보니 이 곳이었어.”

나는 여전히 긴장을 놓지 않고 노인에게 물었다.

“여긴 어딥니까.”
“모르지.”

즉답한 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덧붙였다.

“이 집에는 밖과 연결된 곳이 없어. 문도, 창문도, 심지어 환기구도 없다네. 오직 저것 뿐이야.”

노인이 가리킨 것은 한 쪽 벽을 꽉 채운 알록달록한 글씨들이다.

[행복한 우리집 규칙!]
[1번! 화목한 우리 다섯 가족! 가족과 함께라면 영원히 집에서 같이 살 수 있어!]
[2번! 살아있는 가족들은 밤에 자기 방을 나오지마!]
[3번! 앵무새 밥 주는 거 잊지 마!]

“앵무새요?”

나는 주변을 둘러봐도 새 같은 건 보이지 않아서 물었다.
노인은 턱짓으로 식탁 한 쪽을 가리켰다.
거기 있는 건 팔다리가 없이 머리와 몸통만 의자에 덜렁 올라가 있는 사람이다. 고개를 푹 숙이고 탁자에 코를 바짝 붙인 채 혼자 끊임 없이 뭐라고 중얼거린다.

“자네가 다섯 번째니까, 아무래도 저게 앵무새겠군.”

속이 메스꺼웠다.


3

나와 노인, 깡마른 남자, 곱상한 여자,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 아이.
그리고, 앵무새.

우리는 이 집에서 정신을 차린 순서대로 서로를 간단히 소개하기로 했다.

“이혜진이라고 합니다.”
“음?”

내가 미간을 찡그리는 걸 눈치 챘는지 이혜진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하하. 이름이 생긴 거랑 조금 안 어울리죠?”
“아니요,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실례인 것 같아 바로 사과했다.
조금은 부드러워진 분위기 속에서 다음 차례를 맡은 사람이 입을 열었다.

“어……. 저는 [납량선생]입니다.”
“허.”

노인이 어이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으나 납량선생은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괴담의 원리를 연구하는 사람이죠. 사실 벌써 두 개나 알아냈고, 세 번째를 찾고 있어요.”

그러면서 묘하게 사람들과 눈을 못 마주치고 고개를 숙인 것이, 자기도 민망한 것 같았다.
노인이 빈정거렸다.

“그래? 그렇다면 이 괴상한 규칙에 대해서 우리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시나?”

납량선생은 벽에 쓰인 규칙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무섭네요.”


다음 날, 납량선생은 천장에 매달려 죽은 채 발견되었다.


4

첫 날, 집 안을 조금 수색하다 다들 자신이 처음 깨어난 방으로 들어갔다.
밤에 방을 나오지 말라는 규칙 때문이었다.
이미 비현실적인 일이 벌어진 시점에서, 그 규칙을 무시하는 것은 몹시도 꺼림칙했다.

그리고 오늘.
다들 식탁에 앉아 아무리 기다려도 도무지 납량선생이 내려오지 않았다.
사지가 없는 사람은 탁자에 쳐박고 있던 고개를 조금 들고,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헤죽헤죽 웃고 있었다.

우린 다 같이 납량선생의 방을 찾아가기로 했다.
노크 몇 번, 그리고 덜컥.

문을 열자, 납량선생은 목을 매단 채 대롱대롱 흔들리면서 우리를 반겼다.
중학생인 경민이가 비명을 질렀다.
노인은 얼굴이 창백해져서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5

둘러앉은 탁자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간혹 앵무새가 어깨를 움찔거리며 즐겁게 웃는 소리 뿐이었다.

“…그 선생이란 분, 왜 그러셨을까요.”

경민이가 교복 조끼를 만지작거리며 적막을 깼다.
혜진이 말을 받았다.

“그러게요. 이상한 사람인 것 같긴 했지만….”
“사이비 의식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어. 시체의 새끼손가락을 봤나?”

그 대답은 내가 했다.

“마지막 마디가 잘려있더군요.”

나는 말하면서도 의식적으로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이건 침착함을 잃지 않기 위한 나만의 루틴과도 같았다. 귀신이든, 괴담이든, 미치광이의 연구실이든, 살아남으려면 침착해야만 했다.

“제가 말할 게 있어요.”

이혜진이 조금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사실 어제 꿈을 꿨어요. 키가 크고 눈이 없는 여자가 마당에서 제 방 창문을 올려다 보고 있었는데….”
“악몽일 겁니다. 이 집에는 창문이 없잖아요.”

내 대답에 이혜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우리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칙칙하고 무겁다. 모두가 사실은 알기 때문이다. 이 탁상공론이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걸.
우린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누군가는 목을 매달았다.

어제보다 한층 더 뾰족해진 긴장감이, 이 탁자 위에 한 겹 쌓인다.


그 날 밤.
나는 침대 위에 누워서 살며시 눈을 떴다.
목 뒤에서 찌릿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또각. 또각. 구두 발소리.
규칙을 무시하고 집 안을 돌아다니는 누군가가 있다.

나는 온 신경을 곤두 세우고 귀를 기울였다. 자세히 들어보니 또각, 또각, 소리 말고도 작게 들리는 무언가.
재잘재잘 떠드는 말소리와 웃음.
특히 저 웃음 소리가 귀를 찔렀다. 행복해서 미치겠다는 듯 덜덜 떨리는 웃음 소리가.

또각. 또각.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구두 소리와 소음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1층 로비, 2층 계단을 한 칸씩. 나무가 삐걱거린다.
웃음, 환호.
그것은 2층 복도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결국 나는 인기척이 사라질 때까지 한숨도 자지 못했다.


6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탁자로 모여들었다.
겁에 질려서 몸을 벌벌 떠는 유경민이 다급하게 말을 쏟아냈다.

“저, 저도 봤어요! 그 여자. 눈 대신 새까만 구멍이 뻥 뚫린 여자가….”

유경민은 계단을 내려오다가 바로 이 탁자 위에 서있는 여자와 마주쳤고, 순간 꿈에서 깼다고 설명했다.
어제처럼 꿈이라고 무시할 수가 없다.
내가 들었던 구두 소리, 그건 어쩌면…….

노인이 갑작스레 소리를 지른 건 그때였다.

“너! 지금 뭘 먹고 있는 거야!”

노인이 가리킨 것은 앵무새였다. 사지가 없는 사람은 환하게 웃으며 무언가 우물우물 씹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앵무새에게 다가가 입을 강제로 벌렸다.
앵무새가 공기 빠지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마구 비틀었지만, 결국 그 안에 든 걸 꺼낼 수 있었다.

“우욱.”

경민이가 헛구역질했다.
그것은 사람의 손가락이었다.

나는 순간 무서운 발상을 떠올린다.
그대로 계단을 뛰어 올라가 납량선생의 방 문을 여니, 전혀 부패되지 않은 채 처음처럼 대롱거리고 있는 몸뚱이가 나를 반긴다.
나는 일부 잘려서 없는 새끼 손가락을 확인하고, 의자 위에 올라가 시체의 목에 감긴 줄을 풀었다.

“이건…….”

죽은 이의 목에 상처가 있다.
절대로 밧줄이 만들어내지 못하는 모양으로.

자살이 아니다.
나는 규칙을 떠올린다.

[3번! 앵무새 밥 주는 거 잊지 마!]

아무래도 납량선생은 살해당한 모양이다.
누군가가 이 가느다란 목을 졸랐다.
먹을 것이 없는 이 집에서, 앵무새의 밥을 주기 위해서.


나는 1층으로 내려와 아무 말도 안 하고 자리에 앉았다.
이제는 익숙해진 침묵이다.
나는 이 중에 살인마가 있음을 알았고, 저들도 눈치가 빠르다면 이상한 점을 알았겠지.

‘누가 앵무새에게 손가락을 주었나?’

이 질문은 서로 의지하려고 이 자리에 모인 우리를 서로의 감시자로 만들었다.

앵무새는 다시 탁자에 고개를 쳐박고 무언가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너무 끔찍하고 짜증나서. 속에서 어떤 감정이 울렁거려서.
그냥 다 죽여버릴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
나는 스스로 떠올린 잔인한 생각에 놀라 고개를 양옆으로 마구 휘저었다.

내 돌발적인 행동에 놀랐는지 경민이가 의자를 끌며 조금 뒤로 물러났다.

“오늘 밤은.”

노인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내가 이 곳에 앉아있겠네.”
“네? 하지만 규칙이….”
“그 놈의 규칙!”

이혜진이 말렸으나 버럭 소리 지른 노인은 화를 참지 않았다.

“이건 장난이 아니야. 아니지, 장난으로라도 이래선 안 돼. 이래선 안 되는 거다. 알겠는가? 나는 이런 몹쓸 짓을 하는 놈의 낯짝이라도 봐야겠어!”

얼마 후, 모두가 방으로 올라가는 그 순간까지도 노인은 탁자 앞에서 고요히 눈을 감고 진실을 기다렸다.
앵무새는 그런 노인을 보며 즐겁게 웃었다.


그 날 밤, 무언가와 대화하는 노인의 잔잔한 목소리가 아래에서 들렸다.
목소리는 누군가가 박장대소하는 소리와 함께 끊어졌다.


다음 날, 우리는 같이 1층으로 내려갔다.
노인은 밝은 미소가 걸린 얼굴과 상반신만 남아 탁자 위에 놓여 있고, 앵무새는 그 옆에서 천조각을 우물거리고 있다.
그리고 로비의 벽에는 붉은 글씨.
한 때 노인의 몸 속에 흐르던 피는 이제 하나의 글귀가 되었다.

[비로소 나는 세 번째 원리를 알았노라.]

그렇게 써있었다.


7

나는 앵무새의 뺨을 때렸다.
노인의 마지막을 목격한 유일한 녀석이 이 빌어먹을 자식이었다.

“이 사람. 마지막에 누구랑 얘기 했지? 너는 봤잖아. 대답해.”

앵무새는 흐리멍텅한 눈으로 탁자 쪽을 보고만 있다가, 돌연 눈동자를 빙글 돌려서 나와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그것이 키득키득 웃었다.

“밤마다 뭘 하고 있는 거야. 대답하라고.”

나는 화가 났다.
왜 화가 났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노인이 죽어서? 인간답지 않은 취급을 당해서?

아니면, 사지가 없는 앵무새는 스스로 노인의 몸을 먹을 수 없으니까.
누군가가 노인의 하반신을 잘라 앵무새에게 먹였으니까.

나는 그래서 화가 나는 거야.

밀실 속에 점점 물이 차오르듯, 피할 수 없는 무언가가 점점 가까이 오고 있어서.
생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나는 억지로 분노한다.

“……당신인가?…”

그 순간, 앵무새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노인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나는 그 입에 바짝 귀를 댔다.

“……그렇구만……그래서……살고 싶은 건 당연하지….”

앵무새는 어제 노인이 나눈 대화를 흉내내고 있다.

“……하지만……그렇다면 당연한 결론이지 않나…….”

아주 작아서 제대로 들리지도 않던 목소리가 갑자기 또렷해진다.

“…자네를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노인 목소리 흉내는 거기까지였다. 그 후로 앵무새는 깔깔 웃기만 했다.
나는 앵무새를 놓아주고 힘없이 의자에 앉았다.

“현식 형. 괜찮으세요?”

경민이는 내가 걱정됐는지 그렇게 물었다. 아니, 어쩌면 걱정하는 척 하는 걸지도.

“다음은 저인가봐요.”

그 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던 이혜진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경민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왜냐고 묻자 이혜진이 설명했다.

“그 꿈. 여자가 제 방 문앞까지 왔어요.”

빌어먹을 꿈.
이제 귀신이고 사람이고 다 믿을 수가 없어서, 나는 그 말을 무시했다.


그 날 밤, 또각거리는 구두소리가 들렸다.
다음 날, 이혜진이 실종됐다.


8

이혜진이 1층으로 내려오지 않아 경민이와 함께 2층 방을 전부 뒤졌다.
하지만 실종자를 열심히 찾지는 않았다. 나는 그랬고, 아마 경민이도 그랬을 것이다.

이제 우리 둘만 남았고.
우리 중에는 살인마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곧 내게 들이닥칠 결론이 무섭고 싫었으며, 아주 약간은 후련하기도 했다.
이혜진의 방에서 나오는데 뜨끔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경민이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내 옆구리에 뾰족한 뭔가를 찔러 넣었다.

놈을 후려치자 맥없이 튕겨나가 벽에 부딪쳤다.
나는 쿡쿡 쑤시는 통증을 무시하고 다가가 경민이의 목을 붙잡았다.

“살, 살고…싶어요. 제발….”

목을 꽉 움켜쥐자 놈은 마구 발버둥쳤다.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그러나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뜨거운 무언가가 내 손 안에서 툭 꺼지는 느낌이 들어서 손을 놓자, 중학생이었던 몸이 바닥에 늘어졌다.

아, 이제 끝났구나.
그 앞에 선 내게 가장 먼저 찾아온 감정은 안도감.
머리를 화끈하게 달구는 감각이 마치 마약처럼 통증마저 희미하게 만들었다.
나는 옆구리를 손으로 꽉 누른 채 절뚝절뚝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안녕.”

탁자에 선객이 있었다.


9

나는 의자에 앉아서, 이혜진에게 물었다.

“어디 있었어.”
“적당한 곳에 있었지.”

이혜진이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그 웃음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너였나?”
“글쎄.”

이혜진이 박수를 짝 치며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는, 이렇게 물었다.

“내가 누군데?”

순간, 나는 계속 나를 괴롭히던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챘다.
이 남자.
어울리지 않게 이혜진이라는 여성적인 이름을 가진 깡마른 남자를 볼 때마다 느낀 기묘한 찝찝함.
나는 고개를 돌려 앵무새에게 소리 질렀다.

“앵무새. 첫 날, 이 집에 두 사람만 깨어 있을 때 무슨 일이 있었지?”

그러자 앵무새의 고개가 천천히 내 쪽으로 돌아갔다. 헤죽헤죽 웃으며, 사람의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렇군. 이해했어. 당신 이름이? 이혜진. 좋아, 혜진 씨. 내 말 잘 들어보세요.”

남자 목소리 흉내.

“…이름을 바꾸자구요?”

조금은 가느다란, 여자 목소리 흉내.

“…제가 전문가에요. 일단 하루만 해보죠. 아마 먹힐 겁니다.”
“좋아요. 일단 딱 하루만 해봐요…. 효과가 있을 지….”

다시 남자 목소리. 다시 여자 목소리.
나는 허탈함을 감추지 못하고 내 앞의 이혜진, 아니 납량선생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이상한 여자 타령이나 할 때 죽일걸.”
“아하, 그 웃는 여자는 실존해. 밤마다 돌아다녀서 나도 몇 번 마주쳤지. 아주 끔찍하게 생겼어.”

정말 끔찍한 모습을 떠올린 듯 몸서리치는 남자에게 나는 물었다.

“어떻게 밤에 돌아다녔지?”
“당신들이 날 죽었다고 생각해줘서.”

나는 벽면의 규칙을 다시 읽어보려고 했지만 눈앞이 너무 흐릿해서 보이지 않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이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애썼으나 몸이 점점 무거워졌다.
납량선생이 그런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나는 지금 기분이 아주 좋아. 세 번째 원리를 알아냈기 때문이야. 결과적으로는 자네도 날 도와줬으니, 나도 응당 보답을 해야겠지. 내가 연구한 그것들의 원리를 알려주지. 도움이 될 거야.”

납량선생은 정말 뿌듯한 어조로 계속했다.

“자네는 운이 좋아. 보통 모든 원리를 말해주지는 않거든.”

나는 첫 번째 원리를 들었을 때 화를 냈다. 마구 욕설을 뱉고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어떻게든 휘두르며 발작했다.
그는 웃으며 내게 두 번째 원리에 대해 속삭였다. 나는 내심 이 남자가 던진 동전의 뒷면을 깨닫고 진심으로 경탄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내게 세 번째 원리를 설파했을 때.
나는 발버둥을 멈추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나의 삶과 경민이의 마지막 눈빛, 잘린 손가락에 대해 생각했다. 출구가 없는 집, 나의 고민, 살인, 노인이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러다가 마침내 나는 진실되고 깊은 곳에서부터 그의 이치를 인정하고야 말았다.

나는 기꺼이 앵무새에게 내 팔다리를 내밀었다. 앵무새는 맛있게도 먹었다.
사지를 다 뜯어 먹힌 나는 도리어 앵무새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앵무새는 기꺼이 먹혀주었다.


10

남자는 더 이상 같이 살 가족이 없어서 이 집에 머물지 못하게 됐다.
그래서 남자는 어느새 생겨난 대문을 열고 집을 나가버렸다.
사지가 없이 의자에 덜렁 얹어진 앵무새는 흐리멍텅한 눈으로 그 남자의 뒷모습을 본다.


#

한 여자가 카페에서 손톱을 물어 뜯으며 누군가를 기다린다.
갈색 코트를 입은 깡마른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와 맞은편에 앉으며 인사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내가 바로 [귀신백작]입니다.”
“정말 실제로 겪은 괴담을 말해주면 돈을 주나요?”

여인의 물음에 남자가 박수를 치며 환하게 웃었다.

“그럼요. 저는 그것들의 원리를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벌써 세 개나 알아냈지요. 당신의 이야기가 네 번째를 알아낼 영감의 원천이 되길 바랍니다.”

3.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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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괴담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의 원리 중 첫 번째 원리인 "인간은 절대로 괴담에게 승리할 수 없다"를 전제에 두고 있다. 하지만 주인공들은 결말부 근처까지 자신이 승리하고 극복해냈다고 굳게 믿고 있었으며, 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운명을 순응하게 되는 것이 이 괴담의 호러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공통적으로
1주인공이 괴담을 겪는다 → 2괴담으로부터 극복한(다고 믿는)다 → 3그 사실을 '괴담박사'에게 전한다 → 4'괴담박사'가 괴담의 원리를 알려준다 → 5현실을 깨달은 주인공이 괴담에 순응하여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라는 진행 방식을 가진다. 또한 글 자체의 구성은 번호로 커다란 단락을 매겨 구분하는 특징이 있다. 이 작품에서 괴담을 구성하는 것은 어떤 지적인 존재이기도 하고 단순 현상이나 장소이기도 하다. 1편의 경우가 지적 존재, 2·3편의 경우가 현상 및 장소로 볼 수 있다.[1]

이 시리즈의 제목이자 가장 주요한 장치인 '괴담의 원리'는 보통 작품마다 하나씩 공개되며, 현재까지 총 3편이 연재되었으니 밝혀진 원리도 세 가지다. 하지만 첫째 원리부터 시작해서 뒤로 갈수록 그 공개 방식이나 내용이 모호해지고 두루뭉술해진다는 특징이 있다.[2]

결말과 해석을 오롯이 독자에게 맡기는 것이 나폴리탄 괴담의 묘미이자 특징이지만, 그럼에도 내용 이해가 너무 어려운 이들을 위해 나폴리탄 괴담 마이너 갤러리의 모 유저가 남긴 해석 및 추측이 있다.
1. 항상 인간이 패배하고 괴담이 승리한다.
세 가지의 원리 중 가장 처음, 그리고 가장 명확하게 밝혀진 원리. 무슨 짓을 해도 인간은 괴담에게 거스를 수 없음으로 이 시리즈의 절망적인 호러 분위기를 가중시키는 역할을 한다. 주인공들이 늘 자신이 승리했다고 여겼다가 나중에는 그마저 괴담의 손아귀 안이었다는 것이 이 시리즈의 전통이자 클리셰.

2. 사실 그것은 다 알고 있어 재미있어서 모른 척할 뿐[4]
2편에서 '공포특급'이 녹음기에 녹음한 말들의 첫 글자로 알려진 둘째 원리. 2편의 주인공은 '그것'들이 삼행시를 못 한다는 것을 깨닫고 규칙이라는 함정 속에 첫 글자만 모아 절대 나오지 말라는 메시지를 숨겼었지만, 사실 '그것'들은 그 모든 메시지를 알고 있었고 하는 말마다 첫 글자를 모았을 때 오히려 주인공을 농락하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위의 첫째 원리와도 어느 정도 이어진다. 1편의 가짜 재희도 아빠의 외침 이후로 장소들을 나열하는데, 그 장소들은 진짜 가족들이 숨어 있던 장소들이다. 즉, 이미 어디 숨어 있었는지 전부 알고 있었다.

3. 불명
말 그대로 불명. '괴담박사'가 직접 대놓고 밝힌 첫째나, 녹음 기록의 두문자로 암시한 둘째와 달리 이쪽은 정말 '알아냈다'고만 나오고 가장 두루뭉술하게 남았다. 3편의 주인공 김현식이 첫째 원리를 들을 땐 화를 냈지만 셋째 원리를 듣고 지금껏 일어난 일들을 되새기며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묘사가 전부. 따라서 독자들의 추측으로 다음이 있다.
1. "인간은 곧 괴담이고 괴담은 곧 인간이다."
술래잡기에서 매번 술래가 바뀌는 것처럼 사실 괴이라는 것은 특정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괴이 역할과 인간 역할로만 나누어진다는 의견. 그렇기 때문에 그것과 싸워 이기거나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고(=1, 2번째 원리) 그나마의 대책은 좀 더 근본적인 규칙을 알아내어 괴담에 편승하거나 예측을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 "그러므로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그것의 편에 서야 한다"
마찬가지로 1, 2번째 원리와 연결지어 결국 인간은 괴담을 이기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하므로 살아남고자 한다면 괴담의 편에 서는, 스스로가 괴담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


[1] 2편은 지적 존재도 묘사되긴 한다. [2] 1편에서 첫째 원리는 아예 '괴담박사'가 대놓고 직접 밝혔으며, 2편에서 둘째 원리는 녹음기에 녹음된 '괴담박사'의 대사들의 앞 글자를 모아 유추하게 했고, 3편에서 셋째 원리는 그냥 '알아냈다'고만 나올 뿐 그 내용의 힌트조차 모호하다. 수많은 나폴리탄 괴담을 즐기는 나폴리탄 괴담 마이너 갤러리 유저들도 셋째 원리는 그럴싸한 추측조차 못 하고 있다. [3] 최신편까지 밝혀진 게 세 가지지만 나중에 더 밝혀질 수도 있다. [4] 이 원리가 밝혀진 2편에서는 삼행시를 알고 있다는 말이지만 넓게 보자면 인간이 어떤 속임수를 쓰고 꾀를 굴려도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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