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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1 12:18:49

공칠보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명 공석윤(孔錫允)
칠보(七甫)
본관 곡부 공씨
출생 1884년( 고종 21) 5월 27일
경기도 화성유수부 초평면 궐리
(현 경기도 오산시 궐동)
사망 1939년 10월 27일 (향년 55세)
경기도 인천부 일지출정
(현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용현동)
가족관계 아들 공진택, 손자 공남식, 증손 공병삼, 현손 공경배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3. 여담4.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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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84년(고종 21) 5월 27일 경기도 화성유수부 초평면 궐리(현 경기도 오산시 궐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강직한 성품을 가져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1901년 9월 이후부터 시작된 경부선 철도부설에 동원되었는데, 이때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한편, 사유재산 및 토지 등을 모두 약탈당하면서 일본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 1904년 6월에는 김기우(金箕祐) 등 32명의 동지와 함께 배일통문(排日通文)을 작성, 발기하여 철도 부설 공사 중에 일어난 일본인들의 작폐를 비롯해 국권 침탈, 이권 착취, 북진하려는 일본군의 야욕 등을 지적하여 총궐기를 꾀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당하자 일본에 대한 반감을 더욱 더 극심해졌는데, 1919년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그는 수원군 성호면(현 오산시)에서도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유진홍(兪鎭弘), 이성구(李成九), 이규선(李圭璇), 김경도, 정규환, 김용준(金用準), 안낙순(安樂淳) 등의 동지를 규합하여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이들은 거사 일을 오산리 장날인 3월 29일로 정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제작하는 등 준비를 했다.

그는 거사 당일 오산리 장터에 모인 300여 명의 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런데 시위 도중 안낙순, 유진홍 등 주동자 6명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에 시위 군중들은 이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주재소로 몰려가 석방을 요구하는 만세시위를 벌였고, 이후 오후 4시경 5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군중들의 거센 석방 요구에 당황한 일본 경찰은 위 주동자 7명을 모두 석방하였다.

이때 석방된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시위를 해산시키려는 성호면장 유진열(劉鎭烈)에 대항하여 성호면사무소를 점령하고 우체국의 전화통을 파괴하여 수원군 읍내로부터 오는 일본군의 지원을 불가능하게 하였으며, 인근의 일본인 주택 및 상점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만세시위를 밤늦게까지 주도하였다.

이에 출동한 일본군 헌병대 및 일본 경찰들은 강경책으로 전환, 시위 군중을 향해 무차별로 총을 발사하였고, 이때 그를 비롯한 3명이 중상을 입고 오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는 치료를 받은 뒤 곧 바로 체포되어 1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수감되어 있는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소요 혐의에 대해, 소요에 가담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태형 90도를 선고받고 형이 집행된 뒤 출옥하였다.

그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일본 경찰 및 일본인들을 폭행한 혐의 등으로 체포 및 석방을 반복하면서 요시찰(要視察) 대상에 올랐고, 갖은 고초를 겪다가 결국 경기도 인천부로 피신하였다.

그 뒤 옥고의 여독으로 고통받다가 1939년 10월 27일 인천부 일지출정(현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용현동)에서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8월 15일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3. 여담

4.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