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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10:57:13

검각

검문관에서 넘어옴

파일:cn-Jianmenguan.jpg
2005년 6월에 촬영된 사진(저작자: Munford)
1. 개요2. 역사3. 매체에서

1. 개요

劍閣, Jiàngé

중국에 있는 한중 분지와 쓰촨 성 사이의 관문. 현재 이름은 검문관(劍門關, Jiànménguān)이다. 오늘날의 쓰촨 성 광위안(广元) 시 젠거(=검각: 剑阁) 현에 있다. 이 주변은 산맥이 100㎞나 이어져 있으며, 딱 한 곳으로만 통과할 수 있는데 그나마도 절벽에 가까운 지형이다. 따라서 검각은 한중 방향의 공격에서 쓰촨 성을 지키는 최고의 방어 거점이 된다.

2. 역사

전국시대 진나라 혜문왕이 촉 땅을 정벌하려 했으나 산세가 너무 험해 출병하기 어렵게 되자 촉왕에게 '금으로 만든 소 다섯 마리와 진나라의 절세미녀 다섯을 선물하려 하지만 길이 너무나 험해 사신과 선물이 지나갈 수 없다'는 헛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이 소문을 들은 욕심 많은 촉왕이 금송아지와 미녀에 눈이 멀어 백성을 총동원해 진나라와 촉을 가로막고 있는 험준한 계곡에 잔도를 만들었고, 결국 자기들이 닦아놓은 길로 사마착의 대군이 침공해 멸망했다고 한다. 여기서 유래된 고사가 소탐대실이고 이때 만들어 놓은 잔도가 금우잔도(金牛棧道)이다. 이때 촉왕이 아둔한 행보를 보이지 않았으면 사천 일대가 중원 문화권에 합류하는 것은 더욱 늦었을 지도 모른다.

강유 종회가 이끄는 위나라의 대군에 저항한 촉한 최후의 항전 장소로도 유명하다. 위가 왜 진작 산을 타지 않았냐 싶다면, 직접 보자. 1,700년 이상이 지나고 잔도까지 생겼기에 그나마 갈 만해진 게 이 정도다. 당연한 거지만 그 시절에는 대군이 지나갈 만한 잔도 같은 건 없었다. 엄청나게 험한 지형이기에 성한의 창시자 이특이 검각을 지나면서 '이런 험지를 갖고 있었으면서도 나라를 망하게 한 유선이 참 한심하다'라고 한탄한 일화도 있었다. 현재의 장비로도 등반이 위험할진대 철기류가 귀한 고대에는 그야말로 수십명의 목숨과 맞바꾼 도박이었을 것이다.

당나라 시기에는 627년 10도를 구획하면서 검각 남쪽의 지역을 검남도(劍南道)라고 명명하였고, 현종 시기에는 검남 절도사를 설치하였다. 오대십국시대인 965년 1월에는 검문 전투(劍門之戰)가 벌어졌는데, 10국 중 하나인 후촉의 군대가 이곳에서 송나라 군대에 격파당했다.

검문관루 자체는 20세기에 들어와 1980년대에 복원된 시설이다. 2005년에 화재로 소실된 후 다시 세웠으나 2008년 쓰촨성 대지진 때 또다시 무너진 다음에는 청나라 시대의 관문 터 위에 지금의 검문관루를 새로 세웠다. 청두와 마찬가지로 삼국지 관련 관광 자원을 개발해놓고 있다. 강유의 사당인 평양후사, 강유의 무덤,[1] 강유의 조각상, 금우잔도, 입관교[2] 등을 구경할 수 있다.

검각 근처 마을에서 만든 두부요리가 특히 유명하다. 제갈량을 따라 종군한 병사중에 두부를 만드는 병사가 있었다 하며 강유도 이곳에 주둔하면서 소일거리로 두부를 즐겨 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이곳 사람들이 이르기를 이른바 '강유 두부'.

3. 매체에서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등의 게임에서 가끔 이벤트 전투로 등장한다. 제대로 고증해 버리면 정상적인 전투 자체가 안 될 터이니 현실의 검각보다는 많이 해 볼 만한 지형을 하고 있다. 현실을 좀 살려본 작품은 9편과 11편. 9편은 관문에 노병계 최강병법 연노가 달린데다 검각 좌우 봉우리에 망루를 지을 수 있어 진짜 일방적으로 두들겨팰 수 있다. 11편은 길이 구불구불하고 거리가 멀어 병량 수송하는 것부터가 일이다.

84부작 삼국지에서도 등장한다. 등애의 검각 등반은 실제 검각에서 촬영했다.

삼국지 조조전에서는 후반부 전장으로 등장하고 복병이 대량으로 나온다.

무협소설에서 보타암과 비슷한 여검객들의 문파로 등장하기도 한다. 실질 보타문과 동일한 취급이 대부분이다. 보타문 항목참조
[1] 한 대장군 강유지묘(漢大將軍姜維之墓)라 새겨져 있다. 물론 강유는 성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었고 시신은 크게 훼손되었으므로 실제 묘가 아닌 후대 사람들이 만든 가묘일 가능성이 높다. EBS 세계문화기행에 의하면 강유의 의복과 투구로 가묘를 만들었다고 한다. [2] 제갈량이 건넌 다리라고 전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