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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6 11:20:12

강홍식

강홍식
姜弘植 | Kang Hong-sik
파일:배우 강홍식.jpg
<colbgcolor=#808080><colcolor=#fff> 예명 진훈 (秦勳)
출생 1902년 12월 9일
평안남도 평양부
사망 1971년 10월 9일 (향년 68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학력 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 (전학)
다이조 중학교 (졸업)
가족 전부인 전옥
자녀 강효실, 강효선[1]
외손녀 최현숙, 최예숙, 최연숙
외손자 최민수
데뷔 1925년

1. 개요2. 생애3. 작품 목록4. 참고/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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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때부터 활동한 월북 배우이자 영화감독, 가수로, 배우 활동 당시 '진훈(秦薰)'이란 예명을 썼다. 배우 전옥의 첫 남편이자 강효실, 강효선 남매의 부친, 그리고 최민수의 외조부이다.

2. 생애

1902년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태어나 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 2학년이던 1917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다이조 중학교를 4학년까지 다녔다. 이후 성악가가 되려고 도쿄 오페라단에 들어가서 이시이 바쿠에게 춤과 노래를 배워 테너로서 하이 C까지 올리는 탁월한 재능으로 가수가 됐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대신 1921년 닛카츠로 들어가 야마모토 가이치(1877~1939)에게 연기를 배워 배우로 전업하여 1925년 <쌍옥루>를 시초로 '진훈'이란 가명을 쓰며 은막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1927년 귀국 후 시인 심훈이 감독한 < 먼동이 틀 때>에서 주연으로 활약하여 박수를 받았고, 뒤이어 취성좌에 들어가 연극 무대에도 손을 벌렸다. 그는 조선연극사로 옮겨 무대감독까지 맡기도 했다. 다른 한편 <처녀총각>, <조선타령> 같은 노래들을 불러 가수로서도 나름 활약했다. 1933년에는 부인 전옥과 함께 조선연극사를 나간 뒤 빅터레코드로 옮긴 바 있다.

1936년에는 심훈이 자신의 소설 작품 <상록수>를 영화화하면서 그를 캐스팅했으나 심훈이 사망하면서 이는 무산됐고, 일제 말이던 1941년에 < 복지만리>를 통해 영화배우로 본격 컴백하기도 했다. 1945년 8.15 해방을 전후해 평양에 머물면서 1947년 국립영화촬영소(현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창립 후 연출부장을 맡아 기록영화 <38선>을 연출하고 1948년 북조선인민위원회 문화선전국 극장관리처 산하의 '시나리오 창작위원회' 위원까지 도맡았다. 1949년 북한 최초의 극영화 <내 고향>을 연출을 맡고 6.25 전쟁 중 <초소를 지키는 사람들>의 각본을 쓰는가 하면, 1956년 <바다는 부른다>에서 배우를 다시 맡기도 했다. 1960년대까지 <항쟁의 서곡(1960)>, <청년작업반장(1962)> 등을 만들었지만 1960년대 후반 들어 숙청당했고, 1971년에 사망했다.

2011년에 탈북 무용인 김영순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그는 요덕 수용소에서 사망했다고 증언했으며, 이와는 별개로 그가 죽고 1970년대 초반경에 북한 정부에 의해 복권됐다. 자식들 중 아들 강효선은 북한에서 배우로 활동하다가 피바다가극단 부총장 등을 역임했으며, 딸 강효실은 남한에서 배우로 활발히 활동했다.

3. 작품 목록

4. 참고/관련 자료



[1] 배우 전옥과 결혼 중에 낳은 자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