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마추어 시절
부산고(1987~1990년 졸업)와 고려대 체육교육학과(1990학번~1994년 졸업)를 졸업했다.고려대 야구부 주장 시절이자 4학년이었던 1993년 연세대와의 정기전 직후 모습이다.[1]
아마시절엔 투타 모두 재능이 있는 만능선수로 통했다. 대학 시절은 4년 내내 거의 타자로 활약했고, 지금으로선 상상도 안 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1루수-1번타자를 맡았던 호타준족의 스타일이었다. 92년도 대통령기에서는 도루왕을 했을 정도. 거기다가 1989년에는 고3 신분으로 국가대표에 발탁된 것을 시작으로 대학 4학년까지 국가대표 엔트리에 빠짐없이 이름을 올렸다.
2. 프로 시절
2.1. 롯데 자이언츠 시절
졸업반 당시 아마추어 야수 중에서 최대어로 평가받았고 실제로 롯데 자이언츠에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할 당시에는 타자로 입단했다. 그러나 당시 롯데 자이언츠의 주축 선수들 상당수가 방위병으로 복무하는 바람에 팀 전력의 공백이 심해 투수진의 공백을 메우고자 투수로 전업하였다.[2] 대학 시절 주로 타자로 많이 활약하느라 혹사를 당한 적이 없어 프로야구 중계시 신인 선수들을 소개할 때 강상수는 싱싱한 어깨가 가장 큰 장점으로 소개되기도 했었다. 그리고 신인임에도 대구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팀 개막전 선발 투수로 나섰다. KBO 리그 역사상 전무후무한 '신인 개막전 선발등판 사례로, 신인임에도 개막전 선발로 나갔야 했을만큼 당시 롯데의 전력 공백이 심했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의 '투수 전향 에피소드' 참조.비록 데뷔전인 개막전 선발에서 패전의 멍에를 쓰긴 했지만 6⅓이닝 동안 6피안타 1사사구 4탈삼진 4실점으로 투수로 전업한지 얼마 안 된 신인에다 개막전 선발이었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호투한 편이었다.[3] 이후로도 시즌 동안 선발 로테이션을 지키며 최종 성적은 7승 6패에 3.56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으며, 2년차는 방위복무로 인한 투잡으로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음에도 7승 5패에 3.35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좋은 활약을 보였다. 특히 이 시즌 세 차례의 완투승을 모조리 완봉승으로 장식하는 기염을 토하며 롯데의 새로운 희망이 되었다.
참고로 이 시기에 황당한 사건이 하나 있기도 했다. 1995년 4월 23일에 있었던 일로 방위 복무를 시작했을 때 사직 홈 경기에서 삼성을 상대로 선발 등판했다가, 경기를 보고 있었던 소속 부대장의 전화 통화 한 마디에 조기 강판당한 사건이 바로 그것으로 이 때부터 방위 복무 선수들의 출전 제한이 논의되기 시작하더니, 이듬해부터 방위병이 폐지되었다. 이 조치로 인해 직접 피해를 받은 선수가 장원진… 하지만 해당 부대장의 행동과 방위병 제도 폐지는 9년 뒤 프로야구판을 뒤엎을 뻔했던 권위주의/병폐임이 드러났다. 그리고 1995년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끝내기 밀어내기 볼넷으로 2차전을 내줬다.
방위 복무를 하면서도 7승을 올린 걸 감안하면 제대 후 풀 시즌 출장시 10승은 따 놓은 당상으로 여겼다. 그러나 정작 제대 후 맞이한 1996년에는 9승 10패 1세이브 3.97의 평균자책점으로 삐끗하는 모습을 보였다.[4] 1997년부터 갑자기 안타를 많이 맞기 시작, 3년 동안 안 좋은 기세를 보이다 1999년부터 마무리 투수로 전향한 뒤 다시 2년 동안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사람들을 낚는데 성공했다(…). 대부분이 부상에서 비롯된 성적 저하였다.
롯데 자이언츠 시절의 모습.
이후 무너지며 불상수의 신화를 이룩해 나가기 시작했다. 오죽했으면 본인 생일날 부인이 액땜한다고 소화기를 선물로 줬다는 카더라가 있다. 당시 강상수가 등판하면 극심한 상심에 빠진 롯데 아재팬들이 하나같이 담배에 불을 붙이기 시작해서 사직 야구장을 너구리굴로 만들었다는 썰도 있다. 근데 실제로 못하기는 진짜 못했다. 좀 과장되게 표현하면 뚱뚱한 아저씨가 소심해 보이는 투구폼으로 맥아리없는 공을 던지고 두들겨 맞는 것의 이 당시 강상수의 일상이었다.
특히 2005년 시즌 첫 등판에서 아웃 카운트 하나 못잡고 4피안타 4실점으로 시작부터 화끈하게 불을 지르더니, 두 번째 등판이었던 4월 8일 사직 LG전에선 9회초 조인성에게 만루 홈런을 맞고 장렬하게 침몰했다. 그 직후 박지성과 박찬호까지 눌러 버리고 네이버 스포츠 스타 검색어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뿐만 아니라 웃대나 디씨에서 패러디물까지 쏟아져 나오면서 졸지에 인터넷 스타가 되었다. 비단 이 2경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전해까지 수 년에 걸쳐 구원 등판만 했다하면 불쇼를 저질러 야구게시판마다 욕으로 도배가 되어있던 상황에서 찍은 화룡점정이기에 그랬다. 처음에는 못 한다고 지지리 까였지만, 나중에는 그에 득도한 롯데팬들에 의해 '상수횽'이라는 명칭 아래에 희화화된 우상으로 자리잡았다. 적어도 2005년 봄 이후 강상수는 염종석이나 주형광같은 한 때의 에이스들을 제치고 롯데 팬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던 선수였기는 했다. 그게 좋은 의미의 인기가 아니어서 문제긴 했지만... 특히 그가 투구를 하는 모습이 동래 학춤의 동작처럼 아름답다는 놀림과도 같은 찬사를 받기도 했다.[5]
그야말로 전설이 된 불상수에 대한 당시 반응을 모은 짤방과 갈매기마당 게시물들이다.
제목: 상수야....... (ljs2****)
상수야 상수야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하네......
도대체 한달에 4게임을 말아먹나? 전에 사직에서 두산전엔
니하고 득염이 하고 같이 말아 무가 득염이 패 된것도 있고
이리 저리 따지니까 니가 말아문게 9게임이네..
해도 해도 너무 하는거 아니가
상수야 상수야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하네......
도대체 한달에 4게임을 말아먹나? 전에 사직에서 두산전엔
니하고 득염이 하고 같이 말아 무가 득염이 패 된것도 있고
이리 저리 따지니까 니가 말아문게 9게임이네..
해도 해도 너무 하는거 아니가
제목: 상수의 음모? (jus****)
혹시 계속 불쇼하면서 타팀 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은 후
전국구 스타가돼서 인기투표에서 1 위 하려고 하는것 아닌가?
야이 존만아.
계속 그래 봐라.
니가 아무리 불쇼해봤자 올스타 인기 팬투표 1 위는 힘들걸!
그 실력이면 성인 나이트에서 불쇼해도 되겠던데.
내가 쌈빡한데 소개시켜줄까?
혹시 계속 불쇼하면서 타팀 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은 후
전국구 스타가돼서 인기투표에서 1 위 하려고 하는것 아닌가?
야이 존만아.
계속 그래 봐라.
니가 아무리 불쇼해봤자 올스타 인기 팬투표 1 위는 힘들걸!
그 실력이면 성인 나이트에서 불쇼해도 되겠던데.
내가 쌈빡한데 소개시켜줄까?
제목: 상수에게 어울리는 직업은 김밥장사인기라. (청소****)
상수 글마 성적을 가마이 보몬 억수로 불가사의한 점이 있는기라.
방어율은 1.93 밖에 안된다아이가?
그런데 우째 승리는 하나도 엄꼬 3세이브에 4패를 기록하고 있노?
마무리투수라카는 놈이 우째 세이브숫자보다 패수가 더 많노?
불가사의하재 그쟈?
이거 기네스북에 올리돌라캐야 되는거 아이가?
아이몬 세계 7대 불가사의에 하나 더 추가시키가 8대 불가사의라꼬 맹글어돌라카던지...
일본말로 김밥을 노리마키라카는데...
노리마키=노리(김)+마키(말다 뜻의 "마쿠"의 명사형)
상수 니는 인자 자꾸 경기 말아묵지말고 사직야구장 앞에 김밥집 채리가 김밥이나 말아라.
상수 글마 성적을 가마이 보몬 억수로 불가사의한 점이 있는기라.
방어율은 1.93 밖에 안된다아이가?
그런데 우째 승리는 하나도 엄꼬 3세이브에 4패를 기록하고 있노?
마무리투수라카는 놈이 우째 세이브숫자보다 패수가 더 많노?
불가사의하재 그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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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마키=노리(김)+마키(말다 뜻의 "마쿠"의 명사형)
상수 니는 인자 자꾸 경기 말아묵지말고 사직야구장 앞에 김밥집 채리가 김밥이나 말아라.
2.2. LG 트윈스 시절
2005년 8점대 방어율을 찍고 롯데 자이언츠에서 방출, 이후 LG 트윈스가 '경험 많은 노장이 필요하다' 며 강상수를 데리고 오지만[6] LG에서도 열심히 불만 질러댔고, 결국 8점에 딱 0.02 모자라는 방어율을 찍은 뒤 2006 시즌 종료 후 보류명단에서 제외되며 방출, 은퇴했다.6월 8일 잠실 삼성전에서 선발 최원호가 부상으로 일찍 내려가 5회에 등판해 1이닝 무실점을 기록하며 구원승을 올린게 마지막 승리이다. 그리고 1주일 뒤 6월 15일 마산에서 친정팀 롯데를 상대로 3-3으로 맞선 7회말 강민호에게 결승 만루홈런을 얻어맞았다. 이는 강민호의 데뷔 첫 만루홈런이다.
현역 마지막 등판은 공교롭게도 7월 28일 사직 롯데전인데 여기서 강상수는 8회 4안타를 두들겨맞으며 2실점했다.
[1]
이 해
고려대는
연세대와의 정기전 10여일 전 최남수 감독이 경기 도중
조성민의 노히트노런이 깨지는걸 보고 그 충격으로 심장마비로 타계하여 감독 없이 경기를 치렀고, 결국 분투 끝에 은사의 영전에 승리를 바칠 수 있었다.
[2]
이런 이유로 타자로 전향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표명하는 팬들이 아직까지 있다. 허나 아마추어 시절부터 그를 봐온 팬들은 투수를 하기엔 2% 부족하지만 타자를 하면 98% 아까운 재능이라는 평을 하기도 했고 대학시절에 타자를 한 건 자신은 프로에 가면 투수를 할 거라며 어깨를 보호하기 위해 타자를 했다는 얘기도 있다.
[3]
피홈런 3개로 실점의 대부분이 피홈런이었다. 적어도 볼질로 주자를 모아놓는 똥줄 투구를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 호평을 받았다.
[4]
그래도 나쁘지는 않은 준수한 성적이다. 이 당시 롯데에서 주형광 다음으로 승수가 높았다.
[5]
강상수의 투구폼은 다른 투수에 비해 팔동작이 눈에 띄게 큰 편이어서 더욱 그랬다.
[6]
당시 많은 야구 팬들이 왜 강상수를 데려가냐고 LG를 비웃었다. 정말로 못했던 데다가 노쇠화가 뚜렷해 더이상 부활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