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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8 10:45:43

강득수

강득수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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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축구감독
파일:강3.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강득수
康得壽 / Kang Deuk-Soo
출생 1961년 8월 16일 ([age(1961-08-16)]세)
경기도 평택시
국적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직업 축구선수 ( 공격수[1] / 은퇴)
축구 감독
신체 173cm, 67kg
학력 한양공업고등학교 (1977~1979)
연세대학교 (1980~1983)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럭키금성 황소 (1984~1989)
현대 호랑이 (1990~1991)
지도자 숭덕공업고등학교 (1993~1994 / 코치)
능곡고등학교 (1995~2003)
FC 의정부 (2014~2019 / 코치)
국가대표 3경기 ( 대한민국 U-20 / 1981)
병역 예술체육요원[2]

1. 개요2. 선수 경력3. 은퇴 이후4. 플레이 스타일5. 여담6.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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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축구선수로, 1984년부터 1991년까지 K리그에서 활동한 공격수다.

2. 선수 경력

파일:강2.jpg

럭키금성 황소에서 6년간 뛰어난 활약을 펼친 후 1989년 겨울 럭키금성과의 계약이 만료된 강득수는 현대 호랑이의 강력한 러브콜을 받아 계약금 3천만원, 연봉 3천만원에 이적하게 되었다. 이 이적과 관련해 문제가 터지는데, 1989년 당시 현대 호랑이를 제외한 5개 구단은 1984년 제정한 프로선수 관리세칙에 의거해 "한 팀에 입단한 선수는 6년간 소속팀을 바꿀 수 없다"는 규정과 함께, "설사 특정 선수의 6년 계약이 만료된다 하여도 원 소속팀이 해당 선수와의 재계약 포기 이전까지는 다른 팀이 선수와 협상할 수 없고 설사 협상한다 해도 그 계약금은 3천만원 이하로 하자"는 이면적 담합을 맺은 상태였다. 이는 대충 야구 규정을 흉내내서 급조한 한국 프로축구 시스템의 후진성과 선수의 FA 권리 행사를 원천봉쇄하는 기업 이기주의가 표면에 드러난 악규정 중의 악규정이었다.

요컨대, 강득수의 현대 이적은 위에서 언급한 기업구단간 담합에 대한 현대의 선전포고와도 같았으며, 이에 현대 호랑이 vs 나머지 5개 구단의 다툼 속에서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입장이 된 강득수는 선수생활을 강제로 정리당할 뻔하기도 했다.

실제로 1989년 12월 럭키금성 측은 강득수가 임의로 현대와 계약을 체결했다는 이유로 임의탈퇴 선수로 공시해버리는 초강수를 두면서 이런 우려가 현실화될 뻔했다. 하지만 임의탈퇴 공시요청을 받은 대한축구협회는 "럭금 너네 강득수랑 계약기간 다 끝났는데 왜 생떼임?" 이라는 당연한 해석으로 임의탈퇴를 무효화하면서 강득수는 1990 시즌부터 현대 호랑이에서 활약할 수 있게 되었다. 덧붙여 위에 언급한 프로선수 관리세칙이란 말도 안되는 규정은 강득수, 정종수, 변병주 등 6년차 선수들이 대거 나오면서 프로구단들이 이 세칙에 계속 발목을 잡히자 자진 철회하면서 없어지게 되었다.

3. 은퇴 이후

은퇴 후 1993년부터 숭덕공고 축구부 코치로 활동하였으며, 1995년부터는 능곡고등학교 축구부 감독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이후 모교인 한양공업고등학교 축구부 코치, 인창고등학교 축구부 코치를 거쳐 2013년 김희태 축구센터 코치로 부임하여 김희태 총감독을 보좌하고 있으며, 2014년부터 K3 챌린저스리그에 참가 중인 FC 의정부에서도 김희태 감독과 함께 코치로 등록되어 김희태 축구센터와 FC 의정부 두 곳에서 활발한 활동 중에 있다.

2020년부터 2021년까지 한국프로축구연맹에서 경기 감독관으로 활동했다.

4. 플레이 스타일

오른발잡이임에도 불구하고 왼쪽 윙어를 맡았던 선수이다. 빠른 스피드와 공간 침투능력을 겸비해 골키퍼와 1:1 찬스를 만드는데 능했다. 그러나 1:1 찬스 상황에서도 자신이 직접 해결하는것 보다는 동료 공격수에게 어시스트하는걸 즐겨, 많은 도움을 올릴 수 있었다.

5. 여담

1984년 데뷔 시즌부터 에이스의 상징인 10번을 달고 뛰었는데 그 이유가 재미있다. 다른 럭키금성 선수들이 부담감 때문에 10번을 안 고르고 다른 번호만 고르려 하길래 냉큼 골랐다고 한다.

6. 경력



[1] 윙어 [2]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금메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