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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03-22 00:13:41

간단한 임무



1. 개요2. 본문

1. 개요

자야 라칸에 관한 단편 소설이다. 출처 자야와 라칸이 등장했을 때 나온 시네마틱 영상인 야생의 마력과 연관되어 있으며, 후반부는 해당 영상의 스토리로 이루어져 있다.

2. 본문

파일:piece-of-shadow-cake-splash.jpg

자야는 사원 담장에서 날아드는 총알을 피하며, 나무 위로 뛰어올랐다. 인간들이 '카슈리 소총'으로 부르는 그 무기는 위력이 대단했으며, 마을 경비병들도 제대로 훈련을 받은 듯 보였다. 하지만 자야를 맞히기에는 너무 느렸다. 부족민들을 막기에도 역부족이었다. 자야의 명령을 받은 그들은 이미 사원 위로 올라가 퀸론에 도달한 상황이었다.

퀸론이란 공중에서 회전하는 다섯 개의 거대한 돌을 뜻했다. 고대의 마법이 깃든 그 구조물은 아이오니아에 흐르는 자연의 마법을 억제하는 거대한 감옥과도 같았다.

퀸론의 회색빛 돌에는 십여 개의 밧줄이 걸려 있었다. 밧줄은 전부 바스타야 부족민들이 박아 넣은 말뚝과 연결되었다. 그들은 켑탈라 바스타야였다. 자야의 부족처럼 몸에는 깃털이 났지만, 정수리에서부터 자라나는 거대한 뿔 때문에 머리는 훨씬 더 길어 보였다.

밧줄 중 일부는 전사자들의 허리에 묶여 있었다. 바닥에는 더 많은 시체가 즐비했다. 돌 위로 올라가던 중 인간들의 총에 목숨을 잃은 전우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희생 덕분에 자야는 필요한 밧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연인이자 동반자, 라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칸은 자야에게 가볍게 키스하고는 들고 있던 꾸러미를 낚아챘다. 그리고 나무 꼭대기로 뛰어올랐다.

"하하!" 라칸은 한껏 신이 난 채로 나무들 사이를 뛰어다니더니, 놀라운 속도로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라칸은 탑보다도 더 높이 도약했다. 장정 십수 명을 줄지어 세운 것보다도 더 높았으나, 그는 멈출 줄을 몰랐다.

자야는 숨이 턱 막혔다. 이 순간을 위해 많은 목숨이 희생되었다. 어쩌면 자신의 연인 역시 죽을지도 몰랐다. 모든 것이 눈부셨다. 라칸의 망토도 가을철 옅은 구름 사이로 비치는 태양처럼 빛났다. 그 뒤를 소총이 따라가고 있었다. 인간들이 라칸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고, 그의 속도는 점차 느려졌다.

위로 연결된 밧줄 끝에 켑탈라 부족민 한 명이 보였다. 몸을 숨기고 있던 그는 라칸이 있는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그 순간 소총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라칸이 그동안 보여 준 곡예를 믿고 세운 터무니없는 계획이었다. 자야는 후회했다. 라칸의 운과 운동 능력에 전투의 승패와 부족의 운명, 연인의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다. 물론 라칸은 뛰어난 전사이자 곡예사였지만, 인간들의 화력은 막강했다. 만약 머뭇거리거나 속도가 느려져 실패하거나, 다치기라도 한다면...

그때 돌에 매달려 있던 부족민이 라칸의 손을 붙잡더니 위로 끌어올렸다.

부족민의 도움을 받은 라칸은 퀸론의 측면에 안착한 다음, 멋지게 망토를 휘날리며 수직에 가까운 경사를 달렸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총을 쏘아 대는 인간들을 비웃었다.

"역시 넌 최고야." 힘껏 쥐고 있던 손을 풀며, 자야가 기쁨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어쩌죠, 지휘관님?" 자야 옆에 있는 켑탈라 부족의 소리 전령이 물었다.

"전부 내려오라고 퇴각 신호를 보내요!"

자야의 명령에 소리 전령이 뿔피리를 불었다. 기이할 정도로 깊고 구슬픈 뿔피리 소리가 숲과 사원의 담장을 타고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켑탈라 부족민들이 퀸론에서 퇴각하기 시작했다. 밧줄을 타고 내려오거나, 무작정 뛰어내린 부족민들은 숲을 향해 달렸다. 인간 사수들의 쉬운 표적이 될 수 있었지만, 그들은 미끼를 물지 않았다. 혼자 남은 라칸만 막으면 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총알이 라칸 주위로 날아와 박히며, 퀸론에 수많은 구멍을 냈다. 마침내 꼭대기에 도달하자 라칸은 꾸러미를 내려놓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자야를 내려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 바보! 귀에 꽂은 성냥을 써!" 자야가 소리쳤지만, 총성과 먼 거리 탓에 라칸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자야는 나무 위로 올라가서 라칸에게 귀 뒤를 확인하라고 손짓했다. 인간 사수들의 공격에 노출될 수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주위로 총알이 날아들며 먼지와 파편이 튀었지만, 라칸은 그저 손으로 햇빛을 가리고 자야를 바라봤다. 손짓을 보고 나서야 나머지 작전이 기억난 듯했다.

라칸은 귀 뒤에 꽂혀 있던 성냥을 뽑아 바위에 긁었다. 그리고 꾸러미 쪽으로 몸을 숙이더니, 아래로 뛰어내렸다.

라칸은 망토를 펼친 채, 인간들이 쏘는 총알을 전부 피하며 활공했다. 라칸과 같은 전장의 춤꾼들은 적들의 공격 의도를 '그들보다도 먼저' 예측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나무까지 내려온 라칸은 가지에 부딪히며 잠시 주춤했지만, 이내 뒤로 공중제비를 돌더니 자야 옆에 우아하게 착지했다.

"정말 아름답지 않았어?" 기세등등한 목소리로 소리친 라칸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성냥을 자야에게 건넸다. "또 쓸 데가 있을까?"

"아샤이 레이." 자야는 이마를 문지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니, 필요 없어."

"이제 어쩌지?" 라칸이 물었다.

"나보리에서 우리 동족을 공격했던 인간의 무기가 퀸론을 박살 내는 걸 지켜봅시다!" 자야는 주변에 있는 켑탈라 부족민들에게 소리쳤다.

그리고 정적이 감돌았다. 잠시 후, 인간들이 쏜 총알이 숲으로 날아들었다.

"라칸, 도화선에 불 붙였지?" 라칸에게 일을 맡긴 자신을 원망하면서, 자야가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도화선?"

자야가 화를 내려는 순간, 하늘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퀸론의 가장 큰 돌덩이가 쪼개지고 있었다. 그 크기는 집채보다도 거대했으며, 떨어지고 남은 조각들은 다른 돌덩이에 날아가 부딪쳤다. 그렇게 연쇄 작용이 일어나면서 돌덩이들은 결국 회전을 멈추었다.

"그냥 끈에다가 불을 붙였는데?" 라칸의 대답과 동시에 남은 돌덩이들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아래의 계곡과 수도원으로 한꺼번에 추락했다. 땅이 울릴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거대한 퀸론이 사라지자, 마치 댐이 파괴된 것처럼 수 세기 동안 막혀 있었던 마력이 쏟아져 나왔다.

자야 주변으로 숲이 빛을 뿜어냈고, 도깨비불이 작은 별처럼 반짝였다. 자연의 마법으로 만들어진 기이한 형체들이 영혼 세계의 빛을 발산하며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야말로 황홀한 광경이었다.

자야는 라칸을 바라봤다. 라칸 역시 자야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의 망토는 붉고 노란 빛으로 일렁였고, 깃털은 화려하게 펼쳐졌다. 마력이 강해지자 광대뼈에서 뿔이 희미하게 솟아났지만, 라칸은 이내 털어내 버렸다. 자야의 어두운 얼굴색과 맞추기 위해서였다.

"마력이 넘쳐나고 있어. 우리의 몸을 바꿀 정도야." 마력을 음미하며 자야가 말했다. 수년 동안 가슴과 목구멍, 머리를 옥죄던 쇳덩이가 사라진 듯한 기분이었다. 온몸에 난 깃털들이 곤두섰으며, 오직 생각만으로 깃털의 색깔과 형태, 크기를 바꿀 수 있었다. 비록 처음 밀려들었던 마력은 빠져나가기 시작했지만, 자야는 약간의 정신력만 발휘해 공중에 떠올랐다.

"여기는 우리의 고향이에요. 세상의 경계인 이곳에서 반은 영혼, 반은 육체를 가지고 태어났죠." 발아래에 모인 켑탈라 부족민들을 향해 자야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싸웠습니다. 이곳은 조상님들의 영토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자야가 천천히 땅으로 내려오자, 주변에 있던 부족민들이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그들의 몸도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풀려난 마력에 기운을 얻은 그들은 환호하고 웃으며 즐거워했다.

켑탈라 부족의 소리 전령도 수줍음을 벗어던지고 자야를 끌어안으며 외쳤다. "해냈어요!"

"이제 여러분이 지켜야 해요." 자야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슬며시 소년을 밀치자, 공중에 뜬 몸이 소년에게서 멀어졌다.

소리 전령은 마력을 활용해 뿔피리를 변형시켰다. 피리는 호랑이보다도 길어졌으며 십여 개의 관이 솟아났다. 그가 피리를 불자 경쾌하면서도 인상적인 음악이 흘러나왔다.

자야의 뒤로는 숲이 움직였다. 일행이 걸었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꺾어지는 숲길에 영혼 세계로 가는 '또 다른' 길이 나 있었다. 과거와 숲 너머의 영역을 거쳐 가는 그 길을 걸으면 누구든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고대의 숲길이 열렸어!" 자야가 놀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정도로 마력이 강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라칸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숲의 경계에 서서, 오후의 태양처럼 빛나는 망토를 걸친 채, 라칸은 숲 바깥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엘리?" 자야가 접근하며 말했다. '미엘리'는 고대어로 '자기'라는 뜻이었다.

"우리가 부숴 버렸어." 라칸이 침통하게 대답했다.

"그래. 퀸론이 사라졌으니 이제 우리는 자유야."

"아니, 저들의 마을 말이야." 라칸은 사원과 인간 정착지를 가리켰다.

마차보다도 큰 덩굴이 땅에서 솟아나, 거대한 파도처럼 십여 채의 가옥을 무너트렸다.

목조 주택들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더니, 마치 거목의 형태로 변하며 안으로 오그라들었다.

아기를 품에 안은 인간 여성 하나가 마차로 달려갔다. 뒤로는 한 남성이 덩굴에 깔리기 직전 집에서 빠져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는 품에 가득 안은 물건들을 마차에 실었다. 그러나 해방된 마법의 힘으로 마차의 재료가 되었던 나무와 덩굴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거대한 곤충 형태로 변했다. 자야는 그 모습을 계속해서 지켜봤다. 남자는 괴물로 변해 버린 마차를 지팡이로 저지한 후, 여성과 아기를 데리고 도망쳤다.

머리를 길게 땋은 한 노인은 물결치는 땅 위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었다. 힘겹게 앞으로 몇 발짝 내딛자 나비처럼 생긴 숲의 영혼 두 마리가 노인을 붙잡아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계속 몸부림치자 영혼들은 노인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나무 위로 날아갔다. 육체라는 틀에 갇혀서 자유롭지 못했던 노인의 영혼은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숲의 영혼들과 함께 날아가기를 원했다.

다른 필멸자들이 노인을 지나쳐 달려갔다. 그들의 영혼 역시 육체에서 빠져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한 노파가 머리를 땋은 노인을 일으켜 세웠다. 땅과 영혼이 주변에서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두 사람은 절뚝거리며 마을에서 멀리 도망쳤다.

"인간의 탐욕이 불러온 결과야." 자야가 말했다.

라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자야의 작전으로 인해 벌어진 파괴의 참상을 바라볼 뿐이었다.
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라칸과 자야는 블로타흐 부족으로부터 지원 요청을 받았다. 둘은 석 달 동안 이동한 끝에 부족의 본촌에 도착했다.

본촌이라고 해도 보잘것없었다. 고대부터 블로타흐는 규모가 작은 부족이었다. 수십 그루의 뒤틀린 나무가 수정처럼 맑은 연못을 둘러싼 게 전부였다. 자야와 라칸이 경비병의 안내를 받아 마을로 들어가는 동안 나무 사이로 부족민들이 나와 손님을 구경했다.

블로타흐 부족은 몸이 가늘고 유연했지만, 커다란 어깨가 마치 뼈로 된 날개처럼 등에서 수직으로 돌출되어 있었다. 온몸을 뒤덮은 무지개색 깃털은 빛을 받아 반짝였다. 처음에는 녹색으로 빛났다가, 나중에는 보라색으로 번들거렸다. 유일하게 깃털이 없는 하얀 얼굴은 고양이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 나무와 부족민들, 심지어 연못에서도 검누른 기운이 피어 나왔다. 굶주림과 질병의 기운이었다.

이곳의 바스타야는 허약해서 전투에 도움이 안 될 것 같다고 자야는 라칸에게 속삭였다.

"불길한 마력이 흐르고 있어. 빨리 벗어나야 해. 내 깃털이 망가지기 전에." 라칸이 깃털을 세우며 말했다.

"라칸, 여기 사람들을 도와주면 주운 전체에 우리 뜻을 알릴 수 있어. 혁명의 성공 가능성도 증명될 테고." 자야는 주위의 부족민들을 측은하게 바라봤다. 확실히 스스로를 지킬 힘도 없는 듯했다. "아무래도 블로타흐 부족은 우리 도움이 필요해 보이네, 자기."

"내 근사한 깃털보다 이 사람들이 더 중요해?" 라칸은 놀란 듯 말하더니, 농담이었다는 뜻으로 웃어 보였다.

"아니지." 라칸의 장난에 기분이 풀린 자야가 똑같이 농담으로 응수했다.

"뭐가 더 중.요.한.지. 잘 생각해!" 라칸이 또박또박 강조해 말했다.

"라칸과 자야, 맞는가?"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을 중앙의 다리가 여덟 개 달린 거북이 형상의 바위 위에, 블로타흐 부족 노인이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털은 하얀색이었으며 머리에는 엘크 뿔처럼 생긴 관을 썼다.

"난 블로타흐 부족 장로, 레이비카흐라고 하네." 소개를 마친 장로는 기침을 했다.

자야와 라칸은 장로에게 절을 했다. 어느새 주위를 둘러싼 부족민들이 자기네들 언어로 서로 속삭였다.

"푸보에에서 아쿠니르 영사와 콜 의장을 구했다는 얘기를 들었네. 와 줘서 고맙군." 부족민들의 속삭임보다 약간 더 큰 목소리로 레이비카흐가 말했다.

자야가 라칸에게 신호를 보내자, 라칸이 입을 열었다.

"제가 라칸입니다." 라칸이 평소와 다르게 묵직하게 대답했다. 쩌렁쩌렁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쳤으며 호의가 느껴졌다. 그 기운에 압도당한 부족민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곧이어 라칸은 어깨와 등을 활짝 편 채로 주변을 둘러보며 모두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이쪽은 보랏빛 까마귀, 자야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혁명을 이끌며 수많은 승리를 거두었죠."

부족민들과 장로는 진심으로 반가운 듯이 라칸의 말에 집중했다. 자야는 감탄하며 고개를 저었다.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고도 생각을 정확히 전달하는 능력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집중하라는 의미로 라칸의 등을 쿡 찔렀다.

"음... 우리는 여러분의 부름에 응답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친구이자 전우로서 말이죠. 어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라칸은 말을 마치고 활짝 웃어 보였다.

"고맙군. 우린 자네들의 도움이 절실해." 레이비카흐는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들어 올려 산을 가리켰다. "북쪽의 쿨른 사원에 가면 작은 수정 퀸론이 있다네. 퀸론은 여러 세대에 걸쳐 이 지역의 마법을 조절했고, 우리는 그곳을 관리하는 인간들과 평화롭게 지냈지."

장로는 기침을 하더니 주변의 어두운 기운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그런데 검고 붉은 옷을 입은 ' 얀레이' 전사들이 퀸론을 장악했고, 이곳의 마력은 어둡게 변했다네. 쿨른 사원의 수도사들과 퀸론을 탈환하려고 했지만, 실패했어. 더는 계속 맞서 싸울 힘도 없고 숫자도 부족해. 그러니 자네들이 도와주게. 수도사들이 사원을 되찾을 수 있도록 말이야."

자야는 얼굴을 찌푸린 채 부족민들의 처참한 몰골을 둘러봤다. 그리고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짜증 난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인간을 도와서 퀸론을 탈환하라고요?"

"자네들의 위대한 성과는 익히 들어 알고 있네."

"후스 계곡의 퀸론을 파괴해 켑탈라 부족을 해방했다는 소식도 들었겠네요."

"쿨른 사원의 수도사들은—"

"인간이죠." 자야가 장로의 말을 끊었다. "우리나 당신들이나 인간들 싸움에 끼어들 이유가 없어요. 이 땅의 마법을 억제한 자들을 도와주라고요? 말도 안 돼요."

레이비카흐 장로는 인상을 쓰더니 라칸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저 콧노래를 부르며 나뭇가지로 장난을 치고 있을 뿐이었다.

"도와드리죠. 단, 퀸론은 수도사에게 넘기지 않고 파괴할 겁니다."

"그럼 계곡 마을도 무사하지 못해!"

"그렇죠."

"수많은 사상자가 나올 거야!"

"수많은 '인간' 사상자가 나오겠죠." 자야가 장로의 말을 바로잡았다.

"인간들이 땅을 되찾으려고 하면? 그때는—"

"마법으로 맞서 싸우세요."

"참으로 건방지기 짝이 없군!" 격노한 레이비카흐가 울부짖었다. "우리 부족의 전통도 모르는 너한테는 결정권이 없다! 전사로서 이름 좀 날렸다고 장로의 말을 거역해?"

장로의 말이 끝나자 라칸이 자야에게서 멀어지더니, 먹잇감을 노리는 포식자처럼 군중 주위를 맴돌았다. 소수의 마을 전사들은 라칸의 의도를 알아채고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라칸은 거대한 바위 위로 뛰어올라 장로 옆에 착지했다. 그리고 잠시 장로를 노려보았다.

"여기서 당신을 밀어 버릴까?"

소문 속 전장의 춤꾼에게 겁을 집어먹은 마을 전사들의 모습에 장로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내가... 결례를 범했다면 용서하게."

"자야는 현명한 여자야. 진실만 이야기하지. 그리고 말조심해. 혼나고 싶지 않으면."

라칸이 바위에서 내려오자 장로가 애원했다. "그저 예전 생활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네. 쿨른 사원의 수도사들은 늘 이 마을을 보호해 줬어. 약속을 어긴 적도 없지. 우리는 자네들과 달리 전쟁을 원하지 않아."

라칸은 깃털을 고르고 귀를 후비며 자야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생각해?" 자야가 작게 물었다.

"뭐가?"

"장로가 한 말."

"뭐라고 하는지 안 들었어." 라칸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자야의 뺨에 입을 맞추며 덧붙였다. "둘 다 소리를 질렀지만, 자기는 화가 났고 저자는 겁을 먹었을 뿐이야."

라칸의 말에 자야는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미엘리." 그리고 재빨리 입술에 입을 맞췄다.

"죄송합니다, 레이비카흐 장로님." 자야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 역시 결례를 범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을 이어 갔다. "물론 두려우시겠죠.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어요. 하지만 인간의 약속에 의존하는 한 부족은 자유로울 수 없어요. 제가 두려운 건 그 부분이에요. 마지막으로 아기가 태어나고 얼마나 지났나요? 다른 부족들보다 훨씬 오래됐겠죠? 얀레이 전사들이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마을 인구는 줄어들었을 거예요. 그런데 켑탈라 부족은 다시 아이가 태어나리라는 희망을 품게 됐어요. 마법이 해방됐기 때문이죠!"

조금 전 라칸이 그랬듯이, 자야는 주위를 둘러보며 최대한 많은 부족민과 눈을 맞추려고 했다. "라칸과 저는 얀레이 전사들과 싸운 적이 있어요. 그림자단으로 불리는 그자들은 아주 위험한 집단이에요. 하지만 여러분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싸우겠어요!"

자야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쿨른 수도사들은 신경 쓰지 말아요. 명예를 지킬 필요도 없고, 마법의 맹세를 한 것도 아니니까요. 이건 여러분의 땅을 되찾을 기회예요. 용기만 내준다면 우리가 도와줄게요."

장로는 자야를 한참 바라보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소문대로 강인한 전사로군, 로틀란의 자야. 고맙네. 자네의 제안은 잘 들었으니, 내일 아침에 답을 주도록 하지."

장로가 몸을 일으키자 라칸이 자야에게 물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는 건가?"

"그래야겠지."

라칸은 부족민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녁 대접해 주실 분? 그리고... 혹시 초콜릿 있나?"

인간의 음식에 관해 잘 모르는 부족민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자 라칸은 자야에게 소리쳤다.

"초콜릿이 없다는데?"
날이 밝자 레이비카흐 장로는 결정을 내렸다. 자연의 마법이 해방되면서 되찾게 될 영토를 부족민들과 함께 지키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휘하의 전사 중 일부를 자야에게 넘겼다.

하지만 전사들의 상태도 좋지 않고, 훗날 영토 방어에 필요한 전력이라고 판단한 자야는 그들을 주의 전환용으로만 활용하기로 했다.

따라서 자야와 라칸이 사원을 공략하는 동안 블로타흐 전사들에게는 얀레이 순찰병 습격을 지시했다. 사원의 수비 병력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는 의도였다.

장로가 말했던 마을은 블로타흐 부족의 숲에서 걸어서 하루 거리였다.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마을은 자야와 라칸이 수년간 봤던 마을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였다. 거의 작은 도시나 다름없었으며, 계곡 전체는 수백 명의 주민으로 가득했다.

"둘러 가면 안 돼?" 라칸이 물었다.

"절벽을 타지 않는 이상 안 돼."

"재미있겠네."

"적의 공격에 노출될 거야. 만약 인간들에게 거대 석궁이나 카슈리 소총이 있다면..."

"난 대롱활이 싫더라." 라칸이 투덜거리더니 마을 너머의 언덕을 가리켰다. "마력의 흐름을 차단하는 퀸론의 소리가 들리는데, 보이지는 않네. 숲은 마을 뒤에 있어."

"거기서 쉬면 되겠다. 다만 얀레이에게 들키지 않고 마을을 통과해야 해. 푸보에랑 켑탈라 부족 소식이 퍼져서 우리를 보면 알아차릴 테니 인간처럼 변장하자."

"블로타흐 부족한테 도와달라고 할까?"

"아니, 약한데다가 겁도 많아서 안 돼. 오히려 들키기만 할걸?"

자야는 블로타흐 마을에서 가져온 가방을 뒤졌다. "마을 사람들이 변장에 쓸 발 덮개와 모자를 줬어."

"뭐야? 칙칙한 회색이잖아!" 라칸은 끔찍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나뭇가지를 부러트려 숲으로 던져 버렸다.

자야 역시 옷을 보고 몸서리쳤다. 인간의 거친 옷감으로 만든 옷을 깃털 위에 걸치려니 내키지 않았다.
밤이 되자 검고 붉은 옷을 입은 경비병들이 관문을 닫으며, 마지막 방문객들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자야는 고개를 푹 숙이고 라칸과 함께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관문을 통과하자 높이 치솟은 벽이 보였다. 숲에서 가장 높은 나무들보다도 몇 배는 큰 듯했다.

"라칸, 저 벽을 넘을 수 있겠어?" 자야가 속삭였다.

"왜?"

"급히 도망쳐야 할 수도 있으니까."

라칸은 벽을 올려다보며 높이를 가늠하더니 대답했다. "안 돼. 여긴 깨끗한 마력이 부족해."

자야 역시 벽 건축에 쓰인 사악한 마법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인간의 마법임을 감안하더라도 특히 낯설게 느껴졌다. 어둠과 분노가 어린 그 마법은 푸보에에서 봤던 것과 비슷했다.

말 한 필의 몸통보다도 더 굵은 가시덩굴이 벽을 이루는 돌들을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가시덩굴의 의지는 아니었다. 어떤 힘에 의해 강제로 동원된 것이 분명했다. 자야는 벽과 성곽을 붙들고 있는 마법의 힘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벽은 침략자들을 막는 데에 유용할 듯했다. 다만 마법을 붙들고 있는 덩굴이 해방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자야는 문득 궁금했다.

등 뒤로 관문이 잠기자, 자야와 라칸은 나그네와 농부들 틈에 끼어서 대로를 따라 마을 중앙으로 걸었다.

"여기 마법사가 있어." 라칸이 말했다.

"나도 마법의 소리가 들리는데, 보이지는 않아."

"위쪽이군."

나무로 만든 탑 위에 진홍색 예복을 입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두 눈에서는 기이한 어둠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고, 손에 들린 화려한 놋쇠 방울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바스타야와 요들을 찾고 있어." 라칸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마법사가 섬뜩한 비명을 질렀다. 자야는 라칸의 팔을 붙잡고 골목으로 숨었다. 변장을 꿰뚫어 본 것이 분명했다. 마법사의 울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벽에서는 위급 상황을 알리는 뿔피리가 울렸다.

쫓아오는 경비병들을 피해 둘은 골목과 골목 사이를 내달렸지만, 거리는 미궁처럼 복잡했다.

자야와 라칸은 자신들을 수색하는 마법사의 마력을 느꼈다. 마법사가 방울을 흔들자,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보이지 않는 마법의 채찍이 날아들었다. 인간에게는 해가 없고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바스타야의 귀에는 찢어질 듯한 굉음으로 들렸다. 라칸은 벽으로 도약해 겨우 채찍 공격을 피했다.

방울이 발산하는 마법에 두 바스타야의 깃털이 진동했다. 순간 자야는 위치가 발각된 줄 알았지만, 후속 공격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마법사는 둘의 위치를 모른 채, 무작정 채찍을 날리고 있었다.

전방의 교차로에서는 얀레이 경비병들이 마법사가 볼 수 있도록 마을 주민들을 밖으로 끌고 갔다.

그중 지휘관으로 보이는 한 명은 복장이 사뭇 달랐다. 짙은 회색의 거친 옷감으로 만든 조끼를 걸쳤는데, 단추는 전부 풀려 있었다. 바스타야의 눈에 그는 마치 사악한 기운에 오염되어 기이하게 변해버린 것처럼 보였다. 라칸은 턱으로 남자의 양팔을 뒤덮은 검은 문신을 가리켰다.

"그림자 마법이야." 라칸이 나직하게 말했다.

"미쳤군."

"춤 실력은 어떤지 볼까?" 그 말에 자야는 본능적으로 라칸의 손을 붙들었다.

그 순간 남자의 문신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연기처럼 몸에서 피어오르더니, 갈고리 검을 쥔 거미 다리의 형태로 굳어졌다. 그리고 연행되기를 거부하던 마을 주민에게 검을 휘둘렀다. 쓰러진 주민의 등에 깊은 상처가 보였다.

라칸과 자야는 옆 건물의 벽 뒤로 숨어든 다음, 악취가 진동하는 다른 골목길로 들어섰다. 경비병이 없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전력을 다해 달렸다. 건물의 벽을 박차고, 남겨 두었던 마력까지 전부 써서 최대한 속도를 올렸지만, 골목길은 더 큰 거리로 이어질 뿐이었다.

뒤로 보이는 건물에서는 얀레이 경비병들이 뛰어내리고 있었다.

라칸은 거리에 줄지어 선 집들과 그 안의 주민들을 살폈다. 그리고 자야의 손을 끌고 모퉁이를 돌아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집 앞에 섰다.

"어쩌려고?"

"여기가 좋겠군." 청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문어귀와 창문을 가리키며 라칸이 대답했다.

"뭐?"

거리에 있던 경비병 하나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 지휘관에게 알렸다. 몸이 문신으로 뒤덮인 남자는 여전히 고통에 울부짖는 농부 옆에 서 있었다.

"무슨 일인가?" 그때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야가 고개를 돌리자 노란색 옷을 입은 노인이 보였다. 하얗게 센 머리는 섬세하게 땋여 있었고, 가늘게 뜬 눈에서는 의심이 느껴졌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희는 그냥—"

"경비병들에게 쫓기고 있어요. 도와주세요." 라칸이 끼어들며 말했다.

노인은 경비병 쪽을 바라봤다가 다시 두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라칸은 기대에 부푼 미소를 띠면서 덧붙였다. "나쁜 사람 아니에요."

"어서 옆문으로 들어오시오." 노파는 집 옆으로 난 골목길을 가리키더니, 정문에 빗장을 질렀다.

라칸과 자야는 몸을 숙이고 골목길을 따라 달렸지만, 문은 보이지 않았다. 막다른 길이었다.

"빌어먹을. 대체 왜 그랬어?" 자야가 쏘아붙였다. 머리 위로 마법사의 채찍 소리가 영혼 세계를 통과하면서 더욱 크게 들렸다. 거리를 수색하는 경비병들의 그림자도 보였다.

그 순간, 벽이 움직이면서 숨겨진 문이 열리더니 노파가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자야와 라칸이 집 안으로 들어오자 노파는 비밀 통로의 문을 다시 닫았다.

그곳은 마치 창고 같았다. 천장은 낮았고 바닥은 흙으로 되어 있었다. 오직 하나의 등불과 죽어 가는 에켈꽃 두 송이가 집 안을 밝히고 있어 내부는 어두웠다.

자야는 망토 아래로 두 개의 날카로운 깃털을 만들어 공격할 준비를 했다.

위험을 감지했는지, 노파는 벽에 세워 둔 만월창 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손질이 잘된 듯한 그 무기에는 고대의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당신들 바스타야요?" 노파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야가 말릴 새도 없이, 라칸은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라칸입니다. 로틀란 부족 출신 전장의 춤꾼이죠."

자야의 예상과는 달리, 노파는 라칸의 말에 깊은숨을 내쉬더니 웃기 시작했다. "레이비카흐가 도움을 요청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그 뒤로 소식이 없더군요. 난 구탄 수도원장이요."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계시오.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구탄은 복도 문을 닫고 서둘러 거실로 향했다.

수도원장이 손님을 확인하는 동안, 여섯 명의 인간 수도사가 다른 방에서 나왔다. 대부분 다쳤는지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들은 두 사람을 보고 걱정스러운 듯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자야는 수도사들이 마력을 모으는 것을 감지했다.

자야는 망토 안으로 손을 넣어, 깃털 검 하나를 새롭게 만들어 냈다. 만약 수도사들이 공격해 온다면, 거리가 너무 가까워 깃털을 투척하기 어려울 듯했다. 그래서 그녀는 손잡이를 변형해 작은 언월도처럼 휘두를 요량이었다.

그때 구탄 수도원장이 돌아왔다. 그녀는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댔다. 그리고 상처가 심한 수도사들을 방에 돌려보내고, 남은 두 명과 함께 화덕에 불을 피웠다. 요리를 하면서 세 사람은 감미로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라칸은 자야의 어깨에 팔을 두르더니 그녀를 옆방으로 이끌었다. 두 사람은 그곳에 있는 낮은 탁자에 앉았다. 수도사들이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자야는 숨을 고르고 마력을 부여한 깃털 검을 다시 몸 안으로 조심스럽게 흡수했다.

자야는 망토로 다리를 감싼 채로 음식을 기다렸다. 양초 몇 개와 화덕의 불로는 밤의 냉기를 물리치기에 부족했기 때문이다.
양초가 엄지손가락 길이 만큼 남았을 때, 요리가 완성됐다. 수도원장과 두 명의 수도사는 조용히 접시를 들고 라칸과 자야가 앉은 탁자에 앉았다.

구탄이 속삭였다. "사원을 빼앗기고 몇 주 동안 산에 숨어 지냈소. 그 후 당신들처럼 마을로 숨어들었다오."

수도원장과 수도사는 화덕에서 준비한 변변치 않은 음식을 라칸과 자야에게 건넸다.

"이 집은 내가 쿨른 사원의 수도원장이 되기 전에 우리 가족이 지내던 곳이오. 지금껏 들키지 않았던 건 나보리—"

"검은 문신을 한 전사는 누구죠?" 라칸이 물었다.

"문신이 있는 사람들은 그림자단이오. 예전에는 나보리 형제단 소속으로—"

"그쪽과 당신 부족은 전쟁 중인가요?" 라칸이 또 한 번 말을 끊었다.

구탄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니라오. 그들이 우리 사원을 빼앗긴 했지만, 대부분 살려 주었소. 아마 지역 주민들의 저항을 막으려는 속셈이겠지. 평화가 지속되어야 사악한 그림자 마법을 거둬들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나도 그동안 수도사들을 몰래 마을로 불러들여서 싸울 준비를 했소."

라칸은 돌로 구운 빵을 베어 물며 말했다. "빵을 구우면서 부른 노래가 '텔른과 떨어지는 낙엽'인가요?"

"그렇소. 바스타야인은 요리할 때 꼭 노래를 부른다고 하더구려."

"그렇죠." 음식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은 채, 자야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라칸이 덧붙였다. "맷돌로 간 밀가루를 쓸 때는 밝은 노래를 부르는 게 전통이죠."

"그럼 맛이 다른가 보오?"

라칸은 빵을 하나 더 집어 먹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가 변변치 않아 미안하오. 당신들 전통도 못 지켰구려." 수도원장은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였다. 사원에서 쫓겨난 자기 처지가 부끄러운 듯했다.

라칸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래도 맛있어요! 맷돌로 간 밀가루로 빵을 구울 때는 안 부르는 노래이긴 하지만, 이 밀가루와는 잘 어울리니까요."

"참 친절하구려."

"배고파서 그래요." 자야가 끼어들었다.

"이제 배도 채웠으니 사원을 어떻게 되찾을지 얘기해 봅시다."

"당신 도움은 필요 없어요." 기대에 찬 수도원장의 물음에 자야가 대답했다.

"우리 수도사들이 길을 안내해 줄 거요. 나도 그림자단 전사 몇 명 정도는 상대할 수 있소. 킨코우 결사단에도 지원을 요청했으니 곧 도착할 거요."

자야는 라칸과 눈빛을 교환한 다음 물었다. "마을에 얀레이 전사가 몇 명이나 있죠?"

"아마 백 명 정도요."

"사원에는요?"

"오십 명 정도 될 거요."

"그 정도는 우리만으로 충분해요."

"단둘이서?"

"네."

"녀석들은 춤 실력이 형편없거든요." 빵을 한 조각 더 집으며, 라칸이 우물거리듯 덧붙였다.

"그래도 킨코우 결사단이 올 때까지—"

"블로타흐 부족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를 부른 거죠."

"알았소. 사원을 지키지 못한 내 잘못이니 나라도 힘을 보태 얀레이 놈들을 무찌르겠소."

"그냥 여기서 기다려요."

"순찰 경로도 알려 줄 수—"

"아침에 알려 줘요. 괜찮다면 라칸과 단둘이 얘기 좀 하고 싶은데요."

"그럼... 알겠소." 수도원장이 수도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서자, 라칸은 문까지 따라가서 한 명씩 포옹해 주고는 빵 몇 조각을 건넸다.

그런 다음 문을 닫고 원래 자리로 가서 앉았다. 자야가 속삭였다. "저 사람들이 잠들면 곧장 여기를 떠나자."

"퀸론을 파괴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 줘야 해." 라칸이 또다시 빵을 입에 쑤셔 넣으며 대답했다.

"우리 의도를 밝히면 인간들이나 킨코우 결사단에 밀고할 텐데."

"수많은 인간이 죽을 거야."

"지체했다간 블로타흐 부족이 죽어. 자기, 이건 우리 사명이야. 인간들은 바스타야의 영토에 침범해, 통제하지도 못할 마법으로 벽을 쌓았다고."

"자기 뜻이 그렇다면. 그런데 난 레이비카흐 장로보다 이 수도원장한테 더 끌리는데? 이 여자는 적어도 겁은 없거든."

"음식 대접 좀 받았다고 홀라당 넘어갔구나."

라칸은 다시 한번 빵을 집어 먹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정성이 담긴 음식이잖아. 노래도 진실했고."

"난 저 여자 못 믿어. 우리 목숨이 달린 문제야."

"그래서 도움은 필요 없다고 했어?"

"오십 명이 적은 숫자는 아니지. 게다가 그림자 마법까지 쓰니까 더 힘들 테고."

라칸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계획은 있어?"

"당연하지."

"그럼 자기만 믿을게."

자야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둘뿐이야. 만약 내 계획이 실패하면—"

"그럴 리 없어. 계획은 자기 전문이잖아."

자야는 손가락으로 깃털을 훑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수집한 정보를 정리했다. 지형과 얀레이 전사, 마을, 산중의 사원, 수정 퀸론, 그리고 블로타흐 장로까지.

긴 침묵 끝에 자야가 입을 뗐다. "이 여자를 믿어도 되는지 어떻게 알았어?"

"왜냐하면 이쪽은 내가 전문이니까."
자야는 몇 시간 동안 블로타흐 부족에게 받은 지도를 살폈다. 그리고 얀레이 전사들의 순찰로와 초소의 위치를 예측하고, 들키지 않고 사원에 접근할 경로를 계획했다.

그리고 달이 떴을 때, 자야와 라칸은 몰래 수도원장의 집을 빠져나왔다.

벌레들이 우는 소리만 들릴 뿐 마을은 고요했다. 그래서 얀레이 전사들의 발소리가 잘 들렸다. 게다가 자야가 적들의 위치를 예측한 덕에 보초들에게 들키지 않고 이동할 수 있었다.

동이 틀 때쯤, 두 사람은 마을을 벗어나 산 초입의 마지막 농가를 지났다.

산을 덮고 있는 숲은 잿빛을 띠었다. 라칸과 자야는 몸속에 깃든 마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보통 퀸론은 변화를 만들어 내는 정령 마법이나, 인간에게 위험하지만 생명력이 넘치는 자연 마법을 차단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 지역의 퀸론은 주변 환경과 영혼 세계로부터 마력을 흡수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자야도 겪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흡수하는 속도마저 빨랐다. 마치 영혼 세계에서 오직 사악한 마법만을 흡수하도록 퀸론을 변형한 듯했다.

라칸과 자야는 낮 시간 내내 숲속으로 이동했다. 길에서 멀리 벗어난 채로 회색으로 변해 버린 덤불에 몸을 숨기며 걸었다. 적 전사들이 나타났을 때는 꼼짝도 하지 않고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처음에는 정기적인 순찰 병력인 줄 알았으나, 이내 서둘러 산 아래로 내려가는 대규모 병력이 보였다.

자야는 블로타흐 부족민들의 양동 작전이 시작됐음을 알아차렸다. 물론 라칸과 함께라면 전부 처치 가능했겠지만, 조금 남은 마력을 최대한 아끼는 편이 더 안전하다는 사실을 자야는 알고 있었다.

마법이 사라지면서 기운을 잃었음에도 블로타흐 부족민들은 용기를 내어 작전에 자원했다. 자야는 새롭게 만난 블로타흐 동지들이 잠깐은 버틸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만약 퀸론을 제때 파괴하지 못한다면? 라칸과 함께 바위 뒤에 숨은 채, 자야는 초조함에 주먹을 꽉 쥐었다.

이윽고 얀레이 전사들의 순찰이 뜸해지고 병력 규모도 크게 줄어들자, 자야와 라칸은 더 빠른 속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늦은 오후, 두 사람은 사원에 도착했다. 사원은 흉측한 모습이었으며, 주변 환경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하늘 높이 솟아 있었지만, 색은 몹시 창백했다. 나무로 세운 벽에는 잎이 없는 나뭇가지와 가시가 나 마치 징이 박힌 흉벽 역할을 했다.

라칸이 휘파람을 불어 가장 앞에 있는 경비병의 주의를 끌었다. 경비병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자야의 깃털이 가슴팍에 박혔다. 땅에 떨어지기 직전, 라칸은 쓰러진 경비병을 능숙하게 받아냈다.

멀리서 뿔피리 소리가 들렸다. 발각된 것이 분명했다. 사원 곳곳에 있는 은신처에서 십여 명의 얀레이 전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라칸이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발차기를 하고 재주를 넘으며 적들을 공중에 띄워 올리면, 자야가 깃털을 날려 처리했다. 한결 빨라진 몸놀림으로 두 사람은 사원 입구를 돌파했다.

라칸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동안, 자야는 마법으로 깃털을 불러들여 경로에 있는 적들을 모두 쓰러트렸다.

익살을 떨며 놀고 있는 라칸에게 전사들을 맡기고 자야는 사원 안으로 향했다.

관문을 막고 있는 덩굴을 돌파하자 사원 입구가 보였다. 문은 부서져 바닥에 널브러졌고, 좌우로는 컴컴한 통로가 이어져 있었다. 하지만 자야는 햇빛이 비치는 길을 택했다. 끝에는 덩굴로 뒤덮인 출입구가 보였다.

출입구로 가던 중, 수정으로 만든 여러 개의 작은 함을 발견하고 자야는 멈칫했다. 완전한 정육면체 형태에 마력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 기이한 물건이었다. 마치 제작자나 원재료의 정수가 조금도 흘러들지 않도록 불경하게 만들어진 듯했다. 자야는 함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 출입구를 막고 있는 검은 뿌리 사이로 기어 들어갔다.

사원 내부에 들어서자 한가운데로 붉은빛이 쏟아졌다. 고개를 들자 반짝이는 퀸론이 보였다. 늘 봐 왔던 것처럼 돌들이 회전하는 구조였지만, 이 퀸론은 돌 대신 거대한 루비가 쓰인 듯했다. 자야는 빛을 뿜어내는 루비가 마력을 끌어당기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작은 숲의 정령들이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겁에 질린 채 바라봤다.

그 순간 공기가 바뀌었다. 자야는 혼자가 아니었다. 갑옷으로 무장한 전사가 그림자 속에서 나타났을 때, 그녀는 몸을 숙였다. 전사는 마치 전장의 춤꾼처럼 벽을 타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리고 연기처럼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라칸과 비슷한 기술이었지만, 이 남자의 마법은 특이했다. 심지어 남자 몸속의 그림자에도 황혼의 마법이 깃든 듯했다. 그는 자야가 지금껏 만났던 어떤 마법사나 인간보다도 더 강력했다. 마력이 약해진 지금 상황에서, 라칸과 자야가 전사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자야는 깃털을 날렸지만, 전사는 손쉽게 쳐냈다. 공격을 거듭할수록 자야는 힘이 빠졌고, 전사와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그러던 중에 튕겨 나간 깃털 중 하나가 퀸론을 향해 날아갔다.

깃털이 박히자 루비는 곧바로 쪼개지기 시작했다.

자야는 사원 내부에 퀸론을 세운 이유를 알아차렸다. 붉은색의 그 기이한 광물은 퀸론의 힘을 극도로 강화했지만, 손상되기 쉬웠던 것이다. 특히 지금처럼 마력이 넘치는 상태라면 더더욱.

자야는 지금 상태로 전사를 쓰러트리진 못하겠지만, 주의를 딴 데로 돌리면 퀸론은 파괴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자야는 최대한 많은 깃털을 만들어 냈다. 힘을 너무 많이 쓴 나머지 마치 팔다리가 물속에 잠긴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자야는 무턱대고 깃털을 날렸다. 전사가 피하거나 막아낸 공격이 전부 퀸론이나 사원 지붕에 박히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야의 숨은 점점 가빠졌고, 전사는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상어처럼 그녀의 주위를 돌았다.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무리 공격을 하려는 심산이었다.

기진맥진한 자야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이를 꽉 물었다. 자신과 눈앞의 전사는 여기서 죽겠지만, 블로타흐 부족은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순간, 자야의 머릿속에 라칸이 떠올랐다. 다시는 라칸을 안거나, 웃음소리를 듣거나, 뺀질거리는 미소를 보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틈을 타 전사가 공격했다. 자야는 겨우 공격을 막았지만, 고스란히 전해진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쓰러졌다. 전사는 뒤로 공중제비를 돌더니, 곧바로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 검을 들고 돌진했다.

자야는 기회를 포착하고, 전사의 공격을 막는 대신 마법으로 깃털을 불러들였다. 그러자 퀸론과 사원의 지붕이 산산이 조각나며 무너져 내렸다. 돌진하는 전사의 뒤편으로 퀸론의 거대한 파편과 지붕을 이루던 석재가 쏟아졌다. 둘 다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그때 라칸이 등장했다.

라칸이 양팔로 자야의 몸을 끌어안자 망토에서 황금색 기운이 발산되더니, 두 사람의 몸을 감쌌다. 전사의 공격은 마법의 힘에 가로막혔다. 자야는 라칸의 가슴에 얼굴을 갖다 댔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들썩이는 게 느껴졌다.

더 커다란 퀸론 파편과 지붕의 석재가 떨어졌다. 라칸의 마법은 마치 빛나는 방울처럼 파편들을 막고 있었지만, 자야는 힘이 떨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사원 전체가 붕괴되기 시작하자 라칸은 덫에 걸린 호랑이처럼 포효하더니, 결국 몸을 부르르 떨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사방은 어둡게 변했다.
자야가 눈을 뜨자 잔해 속에서 자신을 꺼내려고 애쓰는 라칸의 모습이 보였다. 전사는 이미 사라졌고, 다른 얀레이 경비병들도 쏟아져 나오는 자연의 마법을 피해 숲길을 따라 도망치고 있었다.

숲은 눈부시게 빛났고, 꽃봉오리는 활짝 피었으며, 위대한 정령들이 깨어났다. 다른 세계에서 밀려든 빛이 모든 것을 흠뻑 적셨다.

자야는 라칸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뺨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었다.

둘은 서로를 끌어안고, 마법을 받아들였다. 켑탈라 부족의 숲에서 해방했던 마법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오랫동안 억제되고 남용된 탓인지, 생명력과 기쁨이 넘실댔다.

켑탈라 부족처럼 블로타흐 부족 역시 해방을 앞두고 있었다. 퀸론을 파괴하는 일이 가능한지, 과연 옳은 일인지 묻는 사람도 더는 없을 터였다. 더 많은 부족, 심지어 로틀란 부족까지도 자야의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 힘을 합칠 것이다.

땅이 흔들렸다. 산 아래에 잠들어 있던 거대한 존재가 깨어나고 있었다. 자야와 라칸은 지각의 균열을 춤추듯이 뛰어넘으며 달렸다.

라칸은 자야에게 살짝 입을 맞추며 말했다. "이제 인간들은 우리 땅에서 못 살겠지. 하지만 수도원장은 구해 주고 싶어. 당장 절벽을 타고 내려가면,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 거야."

"그래. 가서 얻어먹은 보답은 해야지, 자기. 하지만 그 여자는 이미 도망쳤을 텐데."

라칸이 고개를 갸웃했다.

자야는 양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내가 쪽지를 남겼거든. 최대한 많은 인간을 데리고 대피할 수 있도록 말이야."

"미리 알렸다고?" 자신의 얼굴을 감싼 자야의 손을 잡으며, 라칸이 미소 지었다.

"자기가 신뢰한 사람이잖아. 그럼 당연히 나도 믿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