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01-28 07:47:04

《어떤 임종》

조기현 시인 / 어떤 임종(臨終)

1. 개요

조기현 시인의 대표시 중 하나이다.

2. 전문

그 때가 떠올라요

자기 화분(花盆)에 금박 띠 두른 모습으로

이 빌딩 안으로 들어서던 순간

마치 천국(天國)에 드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요

애초 조직배양체로 생겨난, 내게

예정 된 생(生)이란 한낱 관상용 식물 광대였겠죠

아니, 제철이 아니어도

일경구화(一經九花)를 올려야 했기에

관음용 매춘부였다 할까요

결국 돌아갈 정처도 없이 여기서 난

종신유형수인 거죠

바깥은 무더위와 가뭄이 극심하다죠

이제 돌이킬 수 없이 시들어가는 몸,

이곳에 든 이래 비란 걸 맞아보지 못했군요

내게 목마름이란, 또 가뭄이란

죽음까지 무한 지속될 여로(旅路)인 거죠

우리 숲속에 누워 단비 맞던 옛날로

다시 돌아가 함께 눈 감아 볼 수 있을까요

그날이 언제 다시 올까, 제발 오게만

해 달라고, 하루하루

기도하던

……. 그러던 시절이 있었죠

그저 겉눈 뜨고서 하는 이 넋두리란

모든 걸 잊어보려는 심사일 뿐이죠, 그걸 알지만

갈수록 마음이 슬퍼지는 까닭은……, 왜일까요

천둥소리를 알아듣게 된 일,

일대 기적(奇蹟)이, 내 생에서도 있었어요

태풍이 연달아 휘몰아치던 어느 밤

느닷없이 울려온 그 소리가

내 절망의 넋두리를 쪼개버렸어요

난 화들짝 깨어나

그 소리의 향방을 헤아려 무릎을 꿇었지요

천 겹 어둠 속 길 끝자락으로

천둥의 뿌리가 뻗어 내리는 게 보였어요

참 오랜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그 날을 지나 바로 내게 꽃대가 다시 돋아올랐던거죠

작은 꽃송이 하나

그 향기에 취하였죠

아, 당신

천둥소리 안에 숨어 있는 이여

당신을 숨쉬며, 이제 이 숨을 놓으려 해요

난 지금도 그 기적 안에 있어요

이 간구(懇求)를 새겨줘요

당신을 사랑해요

웹진 『시인광장』 2019년 9월호 발표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