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262626><colcolor=#fff> 알 보울리 Al Bowll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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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앨버트 앨릭 볼리 Albert Allick Bowlly |
출생 | 1899년 1월 7일 |
포르투갈령 모잠비크 마푸투 | |
사망 | 1941년 4월 17일 (향년 42세) |
영국 잉글랜드 런던 | |
직업 | 싱어송라이터, 밴드리더 |
장르 | 재즈, 성악 |
활동 | 1927년 ~ 1941년 |
신체 | 172cm |
배우자 |
프레다 로버츠 (1931년 ~ 1934년, 이혼) 마가렛 페어리스 (1934년 ~ 1937년, 별거)[1] |
종교 | 가톨릭 → 정교회[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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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 보울리는 1920, 30년대 영국과 미국 등지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음악가이다. 192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반까지 유행했던 크룬[3] 창법으로 노래하는 '크루너'였으며, 이 창법의 최초 창안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댄스 밴드 시대'로 일컬어지는 영국 음악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가수 중 하나였으며, 흔히 "Ambassador Of Song"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BBC에서 선정한 'Voice Of The 20th Century'에서 그는 54위를 차지했다.2. 생애
2.1. 남아공 시절
알 보울리[4]는 1899년 1월 7일, 당시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모잠비크에서 그리스인과 레바논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성장기는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에서 보냈다. 14세가 되던 해,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형제들이 운영하는 이발소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요하네스버그에서 자신의 이발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발보다는 음악에 더 관심이 있었고, 퇴근 후에는 작은 음악 공연을 통해 돈을 벌기도 했다. 이 시기 그는 '노래하는 이발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그의 본격적인 음악 경력은 20년대 초반에 시작되었다. 처음에 그는 지역의 작은 음악 그룹에서 우쿨렐레를 연주하며 파트타임 보컬리스트로 활동했다.
1922년에는 요하네스버그의 주요 댄스 밴드였던 에드가 아델러(Edgar Adeler) 밴드에 입단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우연히 보울리가 운영하는 이발소에 방문한 아델러가 문득 가게 뒤편에서 들려오는 보울리의 노랫소리를 듣고 그에게 밴드 멤버가 될 것을 제안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즉시 밴드의 핵심 멤버가 되었다. 밴드 리더였던 아델러는 알 보울리의 재능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창적인 음악적 재능"이라고 평가했다.
밴드는 계속해서 성공을 거두었으며, 아델러는 밴드가 남아공에서 이룰 수 있는 모든 성취를 이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밴드 멤버들을 이끌고 남아공을 벗어나 수에즈 운하를 타고 영국까지 가는 6개월간의 투어를 제언했다. 알 보울리는 이미 1921년에 여권을 발급 받고 영국 시민권을 획득한 상태였고, 그 투어는 더 넓은 세계로 나가고 싶은 그의 야망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2.2. 더 넓은 세계로
밴드는 1923년 7월 요하네스버그를 떠났다. 하지만 밴드가 로디지아에 도착해서 체류하고 있을 때, 두가지 일이 발생했다. 하나는 밴드에서 기타와 밴조를 연주하던 렌 필리스(Len Fillis)라는 멤버가 약혼녀와의 결혼을 위해 밴드에서 탈퇴한 것이다. 그는 고향인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의 탈퇴를 계기로 알 보울리는 밴조 연주법을 배웠다. 또 다른 하나는 아델러 밴드가 극동 지방으로부터 1년의 계약을 제안받은 것이다. 이에 아델러 밴드는 서쪽으로 향하던 길을 동쪽으로 돌리게 된다.아델러 밴드는 인도, 싱가포르 등에서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밴드는 곧 말레이 반도로 향했고, 그곳에서도 투어는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밴드의 성공과는 별개로 알 보울리와 아델러 사이에서는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한 갈등에 대해 아델러가 회고하길,
"우리는 이중 구조의 렌트 하우스에서 1층 방을 빌려 사용 중이었으며, 저와 아버지는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알 보울리가 자신의 세탁물을 망친 세탁부에게 불만을 표출하며 큰 소리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렌트 하우스 전체에 울려 퍼져 저희를 깨웠습니다. 저는 조용히 누워 있었는데, 아버지가 보울리에게 ‘닥쳐!’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보울리는 ‘너나 닥쳐, 이 늙은 새끼야!’라고 되받아쳤습니다. 저는 그들 사이에 끼어 있었고, 보울리는 쇼의 핵심 인물이었기 때문에, 저는 집에서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 그와 논쟁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속으로는 매우 화가 났지만 입술을 깨물고, 제 자존심을 삼키며 애써 잠든 척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했고, 표면적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지만, 이 일은 제 무의식 속 깊이 남아 있었습니다."
다음 행선지는 인도네시아의 자바섬이었다. 자카르타에서도 밴드는 공연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어느 날 공연 중, 알 보울리와 아델러 사이에서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아델러는 다시 회고한다.
"어느 날 밤, 우리는 어느 공연장에서 공연 중이었고 모두 좋은 분위기였습니다. 특히 알 보울리가 훌륭했습니다. 제 솔로 파트는 후반부에 있었고, 저는 제 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보울리가 객석에서 제게 쿠션을 던졌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웃으면서 넘겼겠지만, 말레이 반도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나며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저는 무대를 떠나 보울리를 향해 갔습니다. 그는 저보다 덩치가 작았지만, 저 역시 싸움꾼은 아니었기 때문에 곧 우리 둘 사이에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마침내 사람들이 우리를 말리기 전까지, 우리는 서로를 바닥에 눕히려 애썼습니다. 저는 화를 참을 수 없어서 그에게 '너는 해고야'라고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6시, 저는 기차역에 도착했습니다. 제가 처음 도착했다고 생각했지만, 보울리가 이미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는 열차의 지정 좌석에 편안히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다가가 단호히 열차에서 내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순순히 자리를 떠났습니다."
알 보울리가 아델러 밴드에서 해고당한 것은 1924년 9월의 일이었다. 밴드의 핵심 멤버였던 알 보울리가 사라진 상태에서도 밴드는 계속해서 투어를 이어나갔다. 밴드가 기차를 타고 자바섬의 수라바야에 도착했을 때, 아델러의 눈 앞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졌다.
"우리가 수라바야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연주하기로 약속된 클럽에 등록한 후, 시내로 나가 즐기기로 했습니다. 수백 명의 손님을 수용할 수 있는 최고급 카페에서, 놀랍게도 10인조 필리핀 재즈 밴드가 연주를 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보컬리스트가 누구였는지 아시겠습니까? 바로 알 보울리였습니다. 밴드 멤버들은 저에게 그를 용서하고 잊어달라고 요청했지만, 저는 단호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수라바야를 떠나기 전에, 우리는 화해했고 다시 말을 섞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미래를 위해 행운이 함께하길 진심으로 기원했습니다."
아델러 밴드와 헤어졌지만 상기했듯이 보울리는 금방 그곳에서 직업을 구했다. 그는 최고급 카페에서 밴드의 보컬리스트와 밴조이스트로 일했고, 곧 그 일대에서 명성을 얻었다. 이후 그는 캘커타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공연할 수 있는 1년 계약을 제안받았다. 이 계약으로 보울리는 매우 좋은 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보울리는 이 직업마저도 잃게 된다. 그 이유는 두가지였는데, 하나는 그가 상습적인 도박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의 유혹을 결코 뿌리치지 못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가 다혈질의 싸움꾼이었다는 점이다. 그의 이런 두가지 성향은 서로 맞물려서, 그는 도박판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항상 너클을 소지하고 다녔고, 이런저런 싸움에 자주 휘말렸다.
결국 그가 쌈박질로 인해 일자리를 잃었을 때, 그에게는 모아놓은 돈도 많지 않았다. 이 1925년의 짧은 시기, 그는 경마에 크게 관심을 가졌다. 그는 본인 스스로 기수로 활동하기도 하면서 경마로 돈을 좀 벌어보려고 시도했는데 그 방법 중의 하나는 경마장에서 정지 신호판을 가져다가 말들을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탈 끝에 그는 다시 음악계로 복귀했다. 1926년 4월, 지미 르큄(Jimmy Lequime)이 이끄는 대규모 재즈 오케스트라가 그랜드 호텔의 무도회장에서 연주를 시작했고, 알 보울리는 오디션에 참가했다. 그 오케스트라의 피아니스트였던 모니아 리터(Monia Liter)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한 젊은 남자가 우리가 연습 중인 무도회장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키가 작았지만 체격이 다부졌습니다. 그가 독특했던 점은, 기수(jockey)처럼 옷을 입고 있었고 채찍 대신 밴조를 들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밴조를 든 기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놀랐습니다. 우리가 연습을 멈췄을 때, 그는 무대로 올라와 오케스트라의 리더에게 말했습니다. Jimmy가 무대에서 내려와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Jimmy는 오케스트라로 돌아와 말했습니다. 'Whispering의 코드를 맞춰보세요.' 그는 의자에 앉아 밴조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정말 잘했습니다! 그때 Lequime은 말했습니다, '넌 합격이야.' 그리고 그것이 내가 처음 알 보울리를 만난 방식입니다."
르큄 밴드에는 이미 보컬리스트가 있었기 때문에 보울리는 주로 밴조 연주만 맡았지만, 가끔은 공연에서 노래를 할 기회를 얻기도 했다. 밴드는 곧 캘커타와 주변 일대에서 몹시 유명해졌다. 이 시기 르큄 밴드는 녹음실에서 2곡의 음반을 녹음했다. 음반에는 알 보울리의 보컬 대신 밴조 연주만 녹음되었으나, 이것은 보울리가 생애 최초로 참가한 녹음이었다.
이후 르큄 밴드는 싱가폴의 명성 있는 래플스 호텔에서 영구적인 계약을 제안받았다. 지미 르큄은 그 계약을 수락했고 밴드는 싱가폴로 이동했다. 그런데 래플스 호텔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밴드에서는 해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니아 리터는 보울리에게 유럽으로 가볼 것을 권유했다. 두 사람은 이미 절친한 친구가 되어 있었으므로 보울리는 모니아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때는 1927년이었다. 알 보울리는 이미 유럽에 있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 누군가는 바로 에드가 아델러였다.
2.3. 유럽으로
To Eddie from Al, 9. 4. 1927
이렇게 편지를 마치며, 알 보울리는 자신의 사진까지 동봉해서 보냈다. 그는 아델러에게 정중하게 접근했고, 둘 사이를 멀어지게 했던 자신의 옛 태도에 대해 반성했다.보울리가 편지를 썼을 때, 아델러는 독일에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마침 3개월동안 뮌헨의 호텔에서 공연할 7인조 밴드를 구성 중이었다. 이미 여섯 사람은 구해진 상태였고, 나머지 한 사람의 역할은 보컬리스트 겸 기타리스트가 될 예정이었다. 이때 마침 알 보울리의 편지가 도착한 것이다. 그는 보컬이야 말할 것도 없거니와 능숙한 기타리스트이기도 했다.
따라서 아델러는 보울리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 밴드의 첫 공연은 같은 해 5월 15일에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는 즉시 전보를 보내 보울리에게 지금 바로 싱가폴을 떠나 뮌헨의 밴드에 합류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아델러는 추가적으로 편지를 보내 배편을 비롯한 여러가지 세부사항들을 적어놓고, 여비 10파운드[5]를 동봉했다.
하지만 약속된 날짜가 됐음에도 보울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델러는 다시 한 번 크게 실망했고, 결국 밴드는 멤버 하나가 빠진 채로 공연을 해야 했다.
밴드가 공연을 시작한지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아델러는 길거리에서 한 부랑자를 마주치게 된다. 그는 몹시 지쳐보았고 오랫동안 굶주린 것 같았다. 부랑자가 그를 바라보았을 때, 아델러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소리쳤다.
"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러자 보울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마르세유에 도착했지만, 우편국에서 당신의 편지를 찾을 수 없었어요. 여러 번의 철저한 검색 끝에 그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에게 전달된 편지가 없습니다.'"[6]
나머지 이야기는 이렇다. 돈 한푼 없이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 땅에 남겨진 보울리는 남아프리카 대사관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다행히도 파리로 향하는 여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파리에 도착한 후 뮌헨까지 가는 동안은 히치하이킹을 해야 했다. 물론 그 과정은 개고생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것이었다.
아델러는 진심으로 보울리를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즉시 보울리에게 새 옷을 장만해주고, 그를 밴드 리허설에 데리고 갔다. 그 자리에서 아델러는 보울리의 실력이 지난 3년간 매우 발전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알 보울리의 유럽에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1923년에 남아공을 떠난 후 4년간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떠돌다가 드디어 유럽에 안착한 것이다. 하지만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는 법. 보울리의 아버지는 1927년 6월 24일,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같은 밴드의 색소폰 연주자였던 돈 바리고(Don Barrigo)는 이렇게 회상한다.
“그날 밤 무대에서는 웃음도, 즐거움도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 알을 위해 어느 정도 조용한 분위기를 유지했습니다. 그의 눈물은 연습 시간 내내 계속 흘러내렸고, 저는 그에게 그날은 재즈를 연주하지 말자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보울리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게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연주하세요. 제가 곁에 있을게요.' 그의 눈물은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흐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날 밤 일부 합창곡에서 그를 위해 연주했고, 그의 감정이 느껴지면서 제 상상력은 그야말로 폭발했습니다."
뮌헨 밴드는 약속된 3개월의 계약 기간이 끝난 후 8월에 해체되었다. 보울리와 돈 바리고는 그동안 같은 방을 쓰면서 친해졌고, 아델러를 따라서 베를린으로 가기로 결정한다. 1927년 8월 18일, 보울리는 아델러가 베를린에서 구성한 작은 밴드와 함께 어빙 벌린(Irving Berlin)의 'Blue Skies'와 'Say Mister! (Have You Met Rosie?)'를 녹음했다. 이는 알 보울리의 보컬이 녹음된 최초의 음반이었다.
이후 그는 아델러가 아닌 다른 밴드와도 음반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해 가을동안 그는 여러 곡을 녹음했고, 보울리의 명성은 베를린에서 점차 높아져갔다.
한편 이 시기, 아델러는 다시 전보 한통을 받았다. 그것은 인도 캘커타의 유명한 레스토랑 Firpo's에서 온 것이었는데 내용인즉, 7인조 밴드와 1년 계약을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아델러는 그 제안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했고 '알 보울리를 데려가겠다'고 회신을 보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이러했다.
보울리를 데려오지 마시오(Don't Bring Bowlly)
이는 캘커타에서 보울리의 평판이 여전히 좋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아델러에게 그 제안은 거부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결국 1927년 12월 캘커타로 떠난다. 이로서 보울리와 아델러는 또 다시 각자의 갈길을 떠났다.
보울리는 1928년에도 베를린에 남아 있었다. 베를린에서 그는 떠오르는 재즈 스타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1928년 초, 그는 영국으로부터 옛 친구인 렌 필리스(Len Fillis)의 편지를 받았다. 여기서 잠깐. 렌 필리스가 누구였더라? 혹시 1923년 아델러 밴드가 남아공을 떠나 투어를 시작했을 때, 약혼녀와 결혼하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갔던 그 친구 아닌가? 맞다. 렌 필리스는 1923년 영국에 도착한 후 그곳에서 기타리스트로서 경력을 쌓으며 이미 유명한 기타리스트로 실력을 인정 받고 있었다.
옛 친구의 편지는 보울리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을만한 것이었다. 편지에서는 런던의 사보이 호텔(Savoy Hotel)[7]의 밴드리더 프레드 엘리잘데(Fred Elizalde)가 밴드에 가수를 필요로 한다고 적혀 있었다. 렌 필리스는 이에 덧붙여, 만약 보울리가 사보이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이 직업을 얻는다면, 그의 모든 꿈이 실현될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고, 보울리는 사보이의 밴드리더 엘리자데에게 보낼 자신의 오디션 음반으로 <Muddy Water>를 선택했다.
이 음반을 들은 엘리자데는 보울리에게 주급 14파운드를 제안하며 그를 고용할 의사를 비쳐왔다. 그런데 14파운드는 사실 그가 베를린에서 버는 주급보다 낮은 것이었다. 따라서 보울리는 본연의 도박사적 기질을 좀 발휘해보기로 했다. 그는 대담하게도 엘리자데에게 주급을 더 높여달라고 답장을 보냈다.
다행히도 엘리자데는 이를 수긍했고, 심지어 보울리에게 독일에서 영국으로 건너올 경비 20파운드를 선급금으로 지불했다.[8]
2.4. 영국으로 향하다
알 보울리가 프레드 엘리자데와 최초로 녹음한 곡은 <Just Imagine>이었다.[9] 이 음반에 대해 음악 매거진 <Melody Maker>에서는 이렇게 호평했다.
Al Bowlly는 진정한 스타입니다. 그는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부드러운 레가토 리듬 스타일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그가 '핫'하게 노래를 부를 때는,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엘리자드 밴드와 함께 그는 그의 첫 영국 녹음을 막 마쳤습니다.
프레드 엘리자데는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난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의 수재였고, 재즈에 관해서라면 한마디로 천재였다. 따라서 그의 밴드는 당시 영국에서 가장 선진적인 밴드였고, 구성원들 또한 영국에서 가장 촉망받는 인재들이었다. 이러한 밴드의 일원으로서 알 보울리는 여러 권위 있는 장소에서 공연을 하며 경력을 쌓아갈 수 있었다.
또한 BBC 라디오를 통해 라이브로 청중들에게 다가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라디오 방송에서는 당시의 음질 문제로 알 보울리의 보컬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당시의 한 잡지에서는 이를 두고,
Al Bowlly는 방송에서 끔찍하게 들린다. 이를 표현할 다른 말은 없다. 그의 음정은 맞지 않는 것처럼 들리며, 마치 입에 뜨거운 자두를 가득 물고 있는 것 같다.
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이것은 방송 음질의 문제로 인한 것이었고, 그의 보컬 재능은 다른 밴드리더들에게도 인정을 받아서 미국의 밴드리더 반 필립스(Van Phillips)는 그를 컬럼비아 레코드로 초청해 함께 음반을 내기도 했다. 이때 녹음된 곡 <Sometimes>는 탁월한 음질을 바탕으로 보울리의 목소리를 잘 담아내, 그의 자질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곡에 대한 당시 잡지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그를 라디오를 통해서만 들은 사람들은 그를 형편없는 보컬리스트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그는 훌륭한 가수이며, 당신이 직접 확인하고 싶다면 이 음반을 들어보라.
1928년이 끝나고 1929년이 시작되자 밴드에서는 변화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 윤곽은 같은 해 여름이 되자 뚜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성격이 급한 프레드 엘리자데는 사보이 호텔 경영진과 음악 스타일 문제로 자주 충돌했다. 엘리잘데는 주로 템포가 빠른 핫뮤직(Hot Music)을 선호했으나, 사보이 측에서는 부드러운 음악(Sweet Music)을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추가로, 영국 노동부가 미국 색소폰 연주자 Fud Livingstone의 작업 허가증 갱신을 거부한 점도 문제가 되었다. 밴드의 다른 미국인 구성원들의 허가증도 연말까지 만료될 예정이었으나, 사보이 경영진은 더 이상 엘리자데의 지시에 따르길 원치 않았다. 결국 엘리자데와 사보이 호텔의 계약은 1929년 7월 31일 만료되었으며, 갱신되지 않았다.
엘리자데와 사보이 간의 계약이 끝난 후에도 밴드는 몇 개월간 해체되지 않고 유지되었으나, 간헐적인 투어를 제외하고는 별 다른 활동이 없었다. 특히 1929년에 들어서 음반 녹음은 4월 이후로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연말이 되자 엘리자데는 자신의 다른 사업을 위해 밴드를 해산하고 멤버들을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엘리자데 밴드와 알 보울리는 1929년 12월 4일, 함께 마지막으로 <After The Sun Kissed The World Good-Bye>를 녹음했다.
1929년의 겨울은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유난히도 추웠던 겨울로 기억된다. 알 보울리에게 돈이란 쉽게 왔다가 쉽게 가는 것이었다. 위에서 계속 언급했듯이 그는 절제할 수 없는 도박광이었고, 그의 인생 모토는 '오늘을 살자'였다. 프레드 엘리자데 밴드와의 동행이 끝났을 때, 놀랍게도 그에게는 모아둔 돈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그는 한동안 길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며 행인들의 적선으로 생계를 이어나가야 했다.
1938년의 인터뷰에서 알 보울리는 이 시기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매일 아침 모퉁이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부드럽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때때로 동정의 한마디가 동전 한두 푼과 함께 주어지곤 했죠. 하지만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혹시라도 누가 알아볼까 봐 내가 코트 깃을 귀 위까지 여몄기 때문이죠."
1929년의 상황에 대해 한가지 더 언급해야 할 것이 있다. 프레드 엘리자데 밴드가 휘청거리기 시작하는 동안에도 보울리는 어쨌든 계속 음반을 낼 수 있었다. 그것은 친구 렌 필리스 덕분이었다. 뛰어난 기타리스트였던 필리스는 1929년이 되자 엘리자데 밴드에서 나와 자신만의 밴드를 만들었다. 그것은 단지 기타 둘에 바이올린 하나, 혹은 거기에 피아노만 추가된 소규모 밴드였지만 필리스는 계속 보울리를 포함시켰다. 결과적으로 1929년에 보울리가 낸 음반의 절대 다수는 렌 필리스와의 협업에서 나온 것이었다. 영국 활동 초기 보울리의 진정한 구원자는 오랜 친구 렌 필리스였던 것이다.
2.5. 듀엣 활동
1930년대가 시작되었을 때도 여전히 보울리의 주요 일자리는 렌 필리스와의 협업이었다. 이 시기 필리스에게는 두 가지 관심사가 있었는데, 하나는 자신의 경력을 색다른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알 보울리의 목소리를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법을 찾는 것이었다.전자의 이유로 필리스는 'The Blue Boys'라는 이름의 그룹을 결성했다. 그룹의 주요 목적은 뮤지컬 공연이었다. 당연하게도, 필리스는 이 그룹에 알 보울리를 포함시켰고, 자신의 동료였던 알 스타리타(Al Starita)도 초청했다. 또한 피아니스트 한 명도 영입했는데, 그는 바로 최근에 런던에 도착한 에드가 아델러였다. 이렇게 해서 4인조가 결성되었다. 이 그룹의 결성에 대해 음악 잡지 Melody Maker는 이렇게 보도했다.
"공정한 기회를 주면 Al은 노래를 부를 수 있다" (AL CAN SING, given a fair opportunity)
이 문장은 비록 프레드 엘리자데 밴드에서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당시 알 보울리보다는 그룹의 다른 멤버였던 렌 필리스와 알 스타리타가 더 알려져 있었음을 시사한다. 'The Blue Boys'는 비록 폭발적인 반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 성공적이었고, 몇 편의 단편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때도 기사에서는,
"알 스타리타는 그의 '소년들'의 도움을 받아 두 개의 작품에 등장합니다."
라고 보도하며 멤버들 중 알 스타리타의 이름을 유일하게 강조했다.
'The Blue Boys'의 활동은 약 한 달 정도 지속되었고, 이후 불미스러운 일로 해체되었다. 그 상황에 대해 에드가 아델러는 이렇게 설명한다.
알 스타리타는 이탈리아계 미국인이었고, 알 보울리는 레바논 혈통의 남아프리카인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약간의 대륙성의 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죠. 이러한 두 극단적인 인물이 충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항상 두 개의 분장실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는 보울리와 저를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스타리타와 필리스를 위한 것이었죠. 이는 마법처럼 잘 작동했지만, 결국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공연에서, 렌 필리스가 급히 분장실로 뛰어들며 이렇게 말했죠. '에드가, 빨리 와! 두 Al 사이에 문제가 있어!' 그리고 우리는 알 스타리타가 소다수병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보울리가 나이프로 상대의 목을 노리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우리는 간신히 그들을 떼어놓았지만, 그 사건으로 Blue Boys는 끝났습니다.
어느 날 공연에서, 렌 필리스가 급히 분장실로 뛰어들며 이렇게 말했죠. '에드가, 빨리 와! 두 Al 사이에 문제가 있어!' 그리고 우리는 알 스타리타가 소다수병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보울리가 나이프로 상대의 목을 노리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우리는 간신히 그들을 떼어놓았지만, 그 사건으로 Blue Boys는 끝났습니다.
'The Blue Boys'는 끝장났지만 필리스는 여전히 보울리와 함께 일했다. 뮤지컬 그룹이 끝장난 것과는 별개로, 필리스는 자신의 밴드에서 보울리의 목소리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다. 바로 보울리를 캐나다 출신의 음악가 레스 알렌(Les Allen)과 듀엣으로 붙이는 것이었다. 레스 알렌은 원래 알프레도(Alfredo) 밴드와 해리 허드슨(Harry Hudson) 밴드의 색소폰 연주자였지만, 보컬리스트로서도 자신의 입지를 넓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필리스는 둘의 목소리가 잘 어울린다는 점을 발견했고 즉시 레스 알렌을 밴드로 초청해 알 보울리와 함께 노래하게 했다.
이는 두 사람에게도 윈윈이었다. 이로써 알렌은 원하던 바 보컬리스트로서의 활동 영역을 넓힐 수 있게 되었고, 보울리 역시 알렌이 소속되어 있던 밴드들과 함께 녹음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당시 미국에서 폴 화이트먼(Paul Whiteman) 밴드의 '리듬 보이즈'[10]가 성공을 거두면서 영국에서도 남성 보컬의 화음이 유행을 타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의 듀엣 활동은 유행에도 부합하는 일이었다.
이 해에 보울리는 다른 댄스 밴드들에서도 프리랜서로 일자리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성공적인 활동은 레스 알렌과의 듀엣이었다. 두 사람의 협업은 1931년 중반까지 계속되었다.[11]
2.6. 전성기의 서막
렌 필리스, 그리고 레스 알렌과의 활동은 보울리에게 많은 일거리를 제공했지만 큰 돈벌이가 되지는 못했다. 더구나 상기했다시피 그의 '오늘만 사는' 성격 탓에 그는 만성적인 경제적 부족에 시달렸다. 실제로 그해 8월, 보울리는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했지만 선물을 살 여유가 없었다. 대신 그는 자신이 가장 잘 제공할 수 있는 것을 선물로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의 목소리였다. 그는 밴드 스탠드에 올라가 리셉션에서 몇 곡을 불렀다.그러던 중 그에게 색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HMV, 데카, 컬럼비아 레코드 같은 유명 음반사들은 아프리카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노력 중이었는데, 특히 HMV에서는 현지인들을 사로잡는 인기 음반 시리즈를 새롭게 출시하기로 결정했다. 모잠비크 마푸투에서 태어나 남아공에서 성장기를 보낸 알 보울리는 이 일의 적임자 중의 적임자로 보였다.
HMV는 보울리와 계약을 맺었고, 그해 6월에 음반 녹음을 진행했다. 결론적으로 음반은 망해도 폭삭 망했다. 보울리에게 지급된 로열티를 계산했을 때, 각 음반은 200장 이하로 팔린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HMV는 프로젝트를 다른 가수와 진행하기로 했다.
이 일은 그때까지 보울리가 음악적으로 겪은 가장 실망스러운 실패였다. 그런데 프로젝트의 관계자들 중 유일하게 한 사람만은 보울리의 능력에 대해서 여전히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바로 아프리카 음반의 오케스트라 지휘를 맡았던 인물이었고, 동시에 HMV 하우스 밴드의 감독이기도 했다. 따라서 다음 달인 7월에 그는 알 보울리를 데리고, 아프리카와는 상관없는 3곡을 새로 녹음했다. 하지만 HMV에서는 또 다시 이 작업물들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그는 또 다시 보울리를 자신의 오케스트라로 초청해 2곡을 더 녹음했다. 곡의 제목은 각각 <I'm Telling The World She's Mine>과 <How Could I Be Lonely?>였다. 다행히 이번 녹음은 성공적이었고, 그 결과물은 HMV는 물론 그에게 계속 기회를 주었던 밴드리더, 레이 노블(Ray Noble)에게도 큰 인상을 주었다.
이 음반에 대해 음악 잡지 Melody Maker에서는 이렇게 평가했다.
...Al Bowlly는 의심의 여지 없이 이 나라 최고의 스타일 가수임을 증명합니다. 그의 프레이징, 발음, 억양은 탁월하며, 그의 해석에 담긴 개성이 정말 놀랍습니다.
역사가 말해주듯, 이후 알 보울리와 레이 노블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영혼의 단짝이 되었다. 커리어를 통틀어 두 사람은 함께 500여 곡 정도를 녹음했는데, <I'm Telling The World She's Mine>은 이 음악사에 길이 남을 듀오의 시작을 알리는 공식적인 최초의 곡이었으며, 동시에 보울리의 전성기를 여는 서막이기도 했다.
2.7. 전성기
보울리의 노래(더 정확히 말하면 레이 노블 오케스트라의 음반)는 영국 뿐만이 아닌 유럽과, 바다 건너 미국에서도 알려지고 있었다. 이미 1931년 <Lady Of Spain>이 미국 음반 차트에서 5위를 기록하였고, 다음해에는 3곡[12]이 나란히 5위에 오르더니, 1933년에는 마침내 <Love Is the Sweetest Thing>과 <The Old Spinning Wheel> 두 곡이 차트 1위를 기록했다.1934년, 보울리는 레이 노블 오케스트라와 함께 뉴욕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같은 해 <Isle Of Capri>와 <The Very Thought Of You>가 차트 1위에 올랐으며, 앞의 두 곡을 포함해 총 9곡이 차트 내에 올랐다. 이러한 눈에 띄는 성과들에 힘입어 보울리는 레이 노블과 함께 미국으로 진출했다. 그곳에서 보울리는 '영국의 빙 크로스비'라 불리며 NBC에서 본인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가지기도 하였다. 미국 활동 당시의 대표곡은 <Blue Moon> <I've Got You Under My Skin> <Love Is the Sweetest 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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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보드 1위에 오른 <Love Is the Sweetest Thing>의 음반 |
레이 노블 오케스트라는 미국에서 매우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었고, 알 보울리도 마찬가지였다. 1936년, 레이 노블 오케스트라와 알 보울리가 텍사스 투어를 떠났을 때 텍사스 언론은 그들의 방문을 자세히 보도하며, 그들을 "현재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3대 밴드 중 하나"라고 묘사했다.
또한 미국 최고의 가수를 뽑는 한 인기 투표에서는 심지어 3위의 빙 크로스비를 누르고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빅터 음반사에서는 그들의 음반 판매량이 저조하다고 지적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가 1935년 영화 <The Big Broadcast Of 1936>에 출연했을 때, 편집 과정에서 그의 분량은 통편집당했다. 따라서 미국 활동 당시 알 보울리는 이른바 '반짝 스타'이기는 했으나 빙 크로스비나 루디 발리 같은 전국구 스타의 수준까지는 오르지 못했던 것이다.
미국 활동 시절 보울리에게 일어난 의미 깊은 사건 중 하나는 당대 최고의 스타이자, 보울리 스스로도 큰 팬임을 자처했던 빙 크로스비와 친분을 쌓은 일이다. 훗날 빙 크로스비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 시절 내가 꽤 잘 알던 영국인이 있었어요. 알 보울리라는 친구였죠. 그는 미국에 와서 저와 함께 시간을 보냈고, 저는 그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2.8. 다시 영국으로
1937년, 보울리는 여전히 미국에 남아 있길 원하던 레이 노블과 결별하고 영국으로 돌아왔다.[13] 그러나 보울리가 자리를 비웠던 몇 년 사이 그의 자리는 다른 가수들로 채워져 있었다. 샘 브라운과 데니 데니스 같은 경쟁자들에 의해 그는 더 이상 독보적이지 않았다.<Radio City Rhythm Makers>라는 자신의 밴드를 구성하기도 했으나 같은 시기, 종양이 그의 성대에 생겨버리는 바람에 밴드는 해산되었다. 이 일로 인해 보울리는 큰 경제적 손해를 입었다. 당시 유일하게 수술이 가능했던 의사는 뉴욕에 있었는데, 보울리에게는 수술비는커녕 뉴욕까지 갈 표를 살 돈도 없었다. 아내와는 별거했으며, 의사는 종양이 암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알려진 바, 이 시기 거듭되는 불운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암에 대한 공포 때문에 그의 체중은 10kg이나 감소했다.
1937년, 영국의 선호하는 가수 순위 |
훗날 알 보울리는 한 인터뷰에서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내 목소리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침대에 누워 울었고 계속 울었습니다.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지만 — 어떤 소리라도 내보려고, 나 자신에게 욕을 하면서, 어떻게든 발산하려고 애썼습니다. 아마도 나는 한 여성이 자신의 아이가 죽어가는 것을 볼 때 느끼는 기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목소리는 사라졌습니다 — 오, 그러나 내가 느낀 것을 여러분에게 말로 다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말로는 부족합니다."
보울리는 기존에 가입해두었던 보험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비용을 마련했다. 하지만 수술의 성공 가능성은 50대 50이었고, 결과를 보장할 수 없었기에 그는 수술 계획을 철저히 비밀에 붙였다. 그해 8월 30일, 그는 뉴욕에 도착했다. 목소리를 평생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수술이었기에, 의사의 메스를 정확히 유도하기 위해 그는 수술 중에도 종종 소리를 내야 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수술 전후 보울리의 음색은 미세하게 변했는데, 어떤 비평가들은 그의 목소리가 수술 이후 더욱 좋아졌다고 평가하며, 보울리 스스로도 그렇게 믿었다.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된 일은 그에게 너무나도 커다란 기쁨을 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렇게 행복하고, 이렇게 명랑하며, 이렇게 만족스러운 마음 상태로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지난 7개월 동안 내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내 인생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찾고 있었던 것을 찾았습니다. 신께 맹세하건대, 내 삶과 내 인생에서 좋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렇게 행복했던 적은 없습니다."
그해 말까지 보울리는 뉴욕에 체류했고, 빅터사(社)와 계약을 통해 작은 밴드와 6곡을 녹음했다. 빅터의 이러한 제안은 여전히 뉴욕에서 보울리의 팬층이 두터웠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음반은 'Al Bowlly & His Orchestra'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다.
이후 보울리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다시 활동을 재개했으나, 레이 노블이 없는 영국에서 그는 한 오케스트라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 저곳 옮겨다녀야 했는데[14] 이 모습은 마치 커리어 초반의 본인과도 같았다. 그의 전성기는 포물선의 가장 높은 곳을 찍고 다시 가라앉기 시작했던 것이다.
2.9. 죽음
커리어 말년, 그는 지미 메세네(Jimmy Messene)와 기타 듀오를 이루어 활동했다. 그러나 당시 알콜 중독에 빠져 있던 메세네는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일이 종종 있어 파트너를 실망시키곤 하였다. 1941년 4월 2일, 보울리와 메세네는 히틀러를 비난하는 곡인 ’When That Man is Dead and Gone'을 녹음했다.그리고 약 2주 뒤인 1941년 4월 17일, 독일의 런던 공습 때 그는 목숨을 잃었다. 폭격이 끝난 후 아파트 관리인이 보울리의 방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침대 위에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폭격에 직격으로 당한건 아닌지라 외관상으론 멀쩡했으나, 폭발의 충격으로 침실문이 튕겨져나가 머리를 맞고 사망한 것이었다. 그의 시신은 다른 폭격 피해자들과 함께 공동 매장되었고, 장례식은 같은 달 26일에 치러졌다.
알 보울리의 묘지, BOWLLY A.A. |
3. 기타
1931년, 첫번째 부인이었던 프레다 로버츠(Freda Roberts)는 결혼식 당일날 밤(!) 다른 남자와 함께 침대에 있다가 보울리에게 발각되었고, 그들은 2주 만에 갈라서게 되었다.4. 대표곡
"Goodnight, Sweetheart" 1931년 2월 19일"Guilty" 1931년 12월 2일 [15]
"If Anything Happened To You" 1932년 1월 28일
"Love Is The Sweetest Thing" 1932년 9월 8일
"Midnight, The Stars and You" 1934년 2월 16일 [16]
"The Very Thought Of You" 1934년 5월 21일
"Deep In A Dream" 1939년 2월 3일
5. 여담
* 영화 샤이닝의 엔딩이기도 한 'midnight, the stars are you'가 있다.
* 알 보울리가 녹음한 적 있는 Al Hoffman 작곡, John Klenner 작사의 'Heartaches'는 2016년 더 케어테이커의 ' Everywhere at the end of time' 내 수록곡 'It's just a burning memory'로 샘플링된 바 있다.
[1]
이혼은 하지 않았다.
[2]
"
Al Bowlly - Modern Greek Studies Association", mgsa.org
[3]
암송아지의 울음소리처럼 부드러운 콧소리로 노래부르는 것을 말한다. 유명한 크루너로는
프랭크 시나트라,
페리 코모,
빙 크로스비,
마이클 부블레,
진 오스틴 등이 있다. 초기 재즈와 스탠다드 팝 장르를 다룬 당대 인기 가수들을 상징하는 창법 중 하나라 볼 수 있다. 1960년대 이후 유행이 가라앉았다가
데이빗 보위와
짐 모리슨이 크루닝 창법을 이끌어들이면서 록 음악계에서도 어느정도 자리잡았다.
[4]
보울리(Bowlly)라는 이름의 유래는 이렇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Paulos였는데, 이 그리스 이름을 영어로 자연스럽게 발음하기 위해 Pauli로 바꾸었고, 그러다가 귀화 과정에서 서류상의 실수로 Bowlly가 되었다.
[5]
현재 가치로 대략 130만원
[6]
이때 실종된 편지는 이후 아델러에게 반송되었다. 아델러는 이 편지를 직접 보울리 앞에서 펼쳐보이면서 혹시라도 남아 있었을 자그만한 오해조차 종식시켰다.
[7]
지금도 전세계에 사보이 호텔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유서 깊고 유명한 사보이 호텔은 바로 런던의 사보이 호텔이다. 사보이 호텔은
이탈리아 왕국의 통치 왕가였던
사보이아 가문에서 유래했다. 주인공은
사보이아 백국의
중앙집권제를 위해 노력했던
피에트로 2세.
[8]
훗날 인터뷰에서 알 보울리는 이 20파운드 중 5파운드는 빚을 갚는데 썼고 나머지 15파운드는 경마에 걸었다가 다 날렸다고 밝혔다.
[9]
음반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여전히 조악한 음질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해나 이전 해 알 보울리가 베를린에서 녹음했던 음반들에 비교하면 음질이 좋다. 이는 프레드 엘리자데 밴드가 당시의 최첨단 녹음 시설에서 녹음할만큼 일류 밴드였다는 점을 시사한다.
[10]
폴 화이트먼 밴드에서 활동한 보컬 트리오로서, 그 중 하나였던
빙 크로스비는 이후 엄청난 스타가 되었다.
[11]
알렌은 나중에 보울리에 대해 무엇을 기억하느냐는 질문에, 자신은 가정적인 사람이었고 보울리는 독신남이었기에, 직장 밖에서는 함께 어울리지 않았다고 답했다. 하지만 1936년 Radio Pictorial에 실린 기사에서 그는 보울리를 친구로 묘사하며 자신의 직업적 활동에 도움을 준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12]
<Hold My Hand> <Lights of Paris> <Sailing on the Robert E. Lee>
[13]
이 이유로는, 보울리의 향수병 때문이라는 설과 갱스터의 여자를 건드렸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14]
이 시기 함께 작업했던 지휘자 중에는 훗날 이지 리스닝의 거장이 되는 만토바니도 있었다.
[15]
영화
아멜리에의 OST
[16]
영화
샤이닝과
설국열차의 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