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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역사/목록/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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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등재 기준

토론 합의에 따라

토론 합의에 따른 정리 작업 진행중입니다. 삭제된 내용을 복구할 경우 위 등재 기준에 맞다는 출처를 첨부하십시오.

2. 국내

2.1.

2.1.1. 두산 베어스

2.1.2. 롯데 자이언츠

2.1.3. 삼성 라이온즈


롯데랑 같은 원년구단인데 여긴 뭐 이리 많냐

2.1.4. SK 와이번스

2.1.5. KIA 타이거즈

2.1.6. 한화 이글스

2.1.7. LG 트윈스

2.1.8. NC 다이노스

2.1.9. 키움 히어로즈

2.1.10. kt wiz

2.1.11. 그 외

2.2. 국가대표

2.3. 그 외

3. 해외

3.1. 미국

3.2. 일본

3.3. 대만

3.4. 이스라엘



[1] 추가하고자 할 경우에는 토론으로 통해 합의를 하고 기준안을 제시하시길 바랍니다. [2] 전기/후기리그 모두 2위 이내이면 한국시리즈 직행, 한번만일 경우는 플레이오프를 치름 [3] 2013년에 정규시즌에서는 LG가 2위, 두산이 4위이긴 했지만 그 두산이 2013년 한국시리즈 준우승하면서 최종 순위는 두산이 2위, LG가 3위로 밀렸다. [4] 동시에 크보 역대 한 경기 최다 점수차(22점) 타이기록이다. 97년 삼성 vs LG의 27-5로 삼성이 대승한 경기로 부정배트 논란까지 일으킨 그 경기. 여담이지만 위의 3이닝 연속 타자일순과 이 기록을 모두 한 팀에게 내줬다. 기록 베어스 [5] 원조 아성에는 못 미치지만 KBO에서는 원조에 가장 근접한 사례다. [6] 2011년은 중도 사퇴 [7] 다른 2명은 이종욱, 손시헌 [8] 다만 오재일-이성열 트레이드는 프런트에 의해 단행된 것으로 밝혀졌다. 물론 오재일은 두산으로 이적 후 주전으로 자리잡은지라 결과적으로 좋게 남았지만. [9] 물론 이것도 본인이 해당 약품에 금지약물 성분이 함유될 가능성을 인지하지 못한 잘못도 있다. 약물을 사용하기 직전 구단 측에 먼저 알리거나, 임석진처럼 명백하게 의사에게 금지약물 성분을 빼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없고. [10] 이건 노경은 본인의 멘탈문제도 있지만 프런트와의 충돌도 한 몫했다. [11] 전후기 리그 통합우승 [12] 강정호와 서건창의 기록이 이루어진 것은 다음 경기인 SK와의 마지막 페넌트레이스 경기에서였다. [13] 이 중 강민호와 최준석이 35/31홈런 달성 [14] KBO 한 이닝 최다 실점(이전 기록 13점)과 한 이닝 최다 피안타, 한 이닝 최다 타석. 이렇게 3가지 기록을 모두 갈아치운 경기였다. 한화 이글스 : 씨익 [15] 역시나 KBO 기록이다. 여담이지만 지성준은 그 해 시즌 끝나고 트레이드로 롯데에 왔다. [16] 1983, 1994~1996, 2009, 2016~2019 [17] 무엇보다도 삼성은 정규리그 1위가 아니면 아무것도 의미없던 얼척없는 초기 포스트시즌 제도(1982~85) 아래에서도 2회 한국시리즈 진출/1회 통합 우승을 이루었다. 다만 한국시리즈 전적은... 이하 생략 [18] 일부라고 해봤자 김성근 본인과 노리타들뿐이다. [19] 그러나 선동열이 경질되고 류중일 감독이 취임한 지 3년이 지난 2014년, 임창용은 그 말을 번복하고 삼성에 돌아왔다. [20] 특히 최형우는 타순이 돌아오면 두산팬들이 환호를 하는 수준까지 추락했다. [21] 이 경기를 시작으로 3경기를 연속해서 지자 삼성팬들은 설령 준우승하더라도 마무리는 대구구장에서 하길 바랬지만 이 바람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다. [22] 선발 땅겨쓰기의 가능성은 두산이 좀 더 높았다. 하지만 정작 두산은 4선발로 이현호를 냈다. 그리고 이 경기는 통상적으로 볼 때 삼성이 승리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었다. [23] 5차전 선발인 장원삼은 2차전에서 무난하게 패전투수가 되었고 땅겨쓰기의 여파까지 겹쳐서 컨디션이 좋지 못했다. 그리고 결과는 2와 2/3이닝 7실점(전부 2사후 실점했다.) 강판. [24] 2006년의 오버 피칭으로 인해 인대가 끊어지고 성급한 복귀로 인해 구속이 10km 추락하는 등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그럼에도 그는 제 역할을 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며 이후 우승반지 4개를 싹쓸이해가는 등 거기에 대한 보답도 받았다.(이전의 3개와 합쳐서 배영수의 우승반지 숫자는 총 7개) [25] 노장진은 2002년, 오상민은 2002, 2005, 2006년 [26] 안지만이 불펜으로 65억을 받을뻔하긴 했지만, 우규민보단 훨씬 잘했다. 그러나 그놈의 도박 때문에 계약 해지당하고 이미 받은 계약금 중 21억원을 도로 뺏겼다. [27] 단 김주찬을 보내면서 데리고 온 마해영을 잘 써먹었고 마해영이 21년만의 팀 우승에 큰 공을 세웠으니 삼성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거기에 롯데에서 김주찬의 포텐이 터지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28] 사실 그놈의 KIA전 벌투만 없었어도 4점대 중반은 나왔을 성적이다. [29] 그래서인지 이후 14번은 듣도 보도 못했던 선수들이 달기도 했다.(다른 번호도 마찬가지.) [30] 이 시즌 최다관중이 홈개막전서 나왔는데 4500명도 못넘었다. [31] 특히 1차전에서 이종욱의 2루 도루때 2루 커버 들어간 정근우가 송구를 빠뜨리고 3루로 진루하려는 이종욱의 다리를 잡은 행위는 더더욱 실드의 여지가 없는 악질 플레이다. 후에 정근우는 큰 경기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 실수가 나왔다라고 변명을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서승화가 윤재국의 다리를 걸어 큰 부상을 입힌 행위와 다를게 뭐있나? [32] 사실 2007년부터 우승 시즌에는 한국시리즈 원정 유니폼 전승, 준우승 시즌에는 한국시리즈 원정 유니폼 전패이다. [33] 관점에 따라서는 오히려 고도의 이미지 마케팅이라는 의견도 있다. 구단의 이미지에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팀의 에이스이자 프랜차이즈가 원한다면 최대한 지원을 해주겠다는 의도였을 거라는 내용. [34] 여담이지만 이 기록은 KBO 통산 2번째로 나왔는데 재미있게도 처음 이 기록을 허용한 팀이 다름아닌 LG다. [35] 2008 시즌은 사상 최악의 외국인 선수 흉작인 해였다. 특히 외국인 투수들이 정말 심각했는데, 비단 SK 뿐만 아니라 두산의 저스틴 레이어, 삼성의 톰 션 웨스 오버뮬러, 롯데의 마티 매클레리, LG의 제이미 브라운 등 외국인 투수들이 유독 죽을 쒔던 해였기도 하다. 그나마 사상 최악의 외국인 흉년 속에 뛰어난 활약을 했던 용병은 롯데의 카림 가르시아와 LG의 크리스 옥스프링, 로베르토 페타지니 밖에 없었다. 외국인 선수가 모두 활약한 LG는 꼴찌한 게 아이러니 [36] 김태훈과 서진용은 1차지명, 박종훈은 2차 1라운드 [37] 특히 서진용은 입단 직후 육성선수로 강등되면서 1차지명자의 육성선수 계약이라는 황당한 일을 겪게 되었다. 보통 1차지명자가 안 터져서 육성으로 강등되는 경우는 있지만 입단 직후 육성선수 계약을 맺었다는 것은... [38] 2013년 NC 다이노스의 성적은 7위다. [39] 특히 오죽했으면 선동열이 삼성을 우승한게 아니라 삼성이 선동열을 우승시켰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였다. 이후의 멍게감정기가 문제였지만 [40] 13-14시즌 전까지 적어도 평득 10점에 공성률 40%는 찍으며 그래도 라이트 공격수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는데 13-14시즌 처음으로 찍지 못했다. [41] 불륜 건은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보류 상태지만 음주운전은 빼도박도 못하는 흑역사. [42] 해태 타이거즈의 전성기 시절에는 10번은 김준환, 11번은 김성한, 13번은 송유석, 14번은 이순철, 15번은 신동수(32번도 달았었다.), 16번은 이상윤 - 문희수(16번을 달기 이전에는 20번이었다.), 17번은 조계현, 18번은 아시다시피 선동열, 19번은 이강철이었다. [43] 그나마 유승안도 이 등번호를 달은 적이 있지만 빙그레에 가서 포텐 터졌다. [44] 개명 전에는 김상현 [45] 사실 김응용 감독이 99시즌을 재활로 다 날린 이대진을 투수가 없다고, 재활이 미처 끝나지 못한걸 복귀시킨게 화근이였다. 그 후 07년까지 몇 경기 등판하지 못하고, 그 와중에 타자 전향도 시도해봤지만 부진하여 계속 재활병동에만 머물렀다. [46] 투수 혹사 부분은 대표적인 두명만 나열한다. 다 거론하기엔 끝도 없이 많다. 한승혁, 임기준, 홍건희, 92억 등. [47] 피타고리안 승률 3위다. 불펜을 갈아마시면서 불펜운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 하여 말아먹은 경기가 한두번이 아니다. 당장 임창용만 안내쳤어도 최소 4위는 찍었을 것이다. 임창용 내치고 윤석민, 김세현 등을 쓰려다가 결국 팀을 말아먹었다 [48] 한글 로고는 1994년부터 1996년까지, 영문 로고는 1997년부터 1998년까지 사용되었다. [49] 3-6-4-7-7(중도 경질)에 승률 .447, 참고로 김영덕 감독 시기 빙그레 이글스의 성적은 2-2-3-2-2-5, 승률 .572에 가장 못한 5위때도 5할이었다. 감독 시절 무모한 수준의 투수 혹사는 덤(투수관리에 대한 개념이 지금보다 덜 잡힌 시절이라 넘어간 거지 지금 이랬으면 팀이 작살 났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1994년 시즌 후 이정훈(장정순)과 정경훈(정영규)의 트레이드건도 있었다. 결과는 보시는대로. [50] 데뷔는 MBC 청룡에서 했지만 실질적인 전성기는 빙그레 시절이었다. [51] 대표적으로 황재규, 양훈, 허유강 [52] 사실 김인식 감독은 두산 시절 신인들을 적극 기용하는 편이었으며 한화에서도 확실한 검증을 받지 못한 상태의 류현진을 적극적으로 기용했다. 결정적으로 구단 자체에서 신인 키우기를 소홀히 한 점은 이때부터 드러나고 있었다. [53] 아주 없지는 않았다. 최진행, 오선진, 안승민 등이 팀의 주전급으로 성장했으며, 박정진 송창식의 재발견과 부활도 있었다. 하지만 이 선수 이외에 나머지 유망주들이 크게 성장하지 못한 것이 문제. [54] 신경현의 저서를 비롯해 한화 코칭스태프들 중 이쪽 부분에서 좋은 점수를 준 사람이 없다. 김응용 못지 않게 좌완을 선호한다는 김성근이 여러차례 시도를 해봤지만 실패했고, 결국 인터뷰로 야구가 아닌 다른 곳에 마음이 가 있는 것 같다. 여러 차례 고쳐보려고 했지만 나는 더 이상 못하겠다.라고 포기 선언을 했다. [55] 이건 기아도 마찬가지다. 자진 신고 당시 유창식은 김성한 김상진의 등번호 11번을 달고 있었다. [56] 2015년 이후 김성근의 선수를 대하는 태도 등에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지만 유창식의 경우는 그런거 없다. 애초에 승부조작 빼고도 한화팬들에게 남긴 실망감이 워낙 큰지라 재평가의 ㅈ자도 못꺼낸다.애초에 쟤 제발 좀 어디로든 보내달라고 징징(...)거리기부터 트레이드 당시에도 멘탈이 그지경이니 결국 트레이드 될 줄 알았다는 말이 다수였다. [57] "장명부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무리 한 물 간 투수라 해도 최소한 10승쯤은 올리지 않을까? 크게 기대를 했었다. 그런데 1승이라니…, 내가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58] 대다수 경기에 주전 선수들을 거의 빼다싶이 했고 1.5군 선수들을 기용했다. 그것도 정규리그 우승을 앞둔 상황에서... [59] 특히 1998시즌 후반기의 활약을 바탕으로 재계약했던 주니어 펠릭스가 1999시즌 전 몸 관리가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합류한 뒤 희망고문을 반복한 것이 컸다. 케빈 대톨라는 말할 것도 없고. [60] 그나마도 승차없는 순위역전이었다. [61] 최종 순위는 142경기째에서 확정되었지만 5위 경쟁팀들이 꾸준히 삽질해서 순위 역전 직전까지 갈때마다 LG가 스스로 말아먹어서 순위가 전혀 올라가지 않았다. [62] 주력 선수인 정찬헌과 정성훈이 음주운전으로 인한 잔여경기 출장 정지=시즌 아웃을 당하면서 팀의 추진력에 제동이 걸렸다. [63] 그래도 100만 관중을 돌파하긴 했다. [64] MBC 청룡 시절에는 하위권에 있었지 적어도 꼴찌는 하지 않았다. 2005년까지 최저성적은 1992년과 1996년 7위를 기록한게 최저 성적이다. [65] 이 과정에서 김재현의 보상 선수를 안재만으로 고른 것은 최대의 실책이었다. [66] 최초는 이광은이다. [67] 없는 전력속에서도 우규민, 이대형 등을 발굴하기도 했다. [68] LG 구단은 정식으로 사퇴를 수리하지 않은 채 조계현 수석코치에게 사실상 감독대행 역할을 맡겼고 이런 상황은 양상문 감독이 부임하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69] 단, 미니홈피에 "놀러가고 싶다" 라는 실언을 써서 욕을 먹은건 곧바로 사과하고 미니홈피도 폭파시키고 해서 문제될건 없었다. 단지 같은 팀 동료가 거하게 어그로를 끌어서 문제가 된 것. 여기에 김회권과 이승우도 같이 어그로를 끌었지만 이 둘은 상황이 심상찮음을 감지하고 미니홈피를 터뜨렸다. [70] 그것도 코칭스텝이 그러지 말라고 말렸는데도 불구하고. [71] 창원시가 9구단 창단에 의욕적인 이유 중 하나 지자체 통합의 상징으로서 추진하는 사업이다. [72] 구 마산시민들도 이 이름에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정확히는 아구찜 상인과 그 관계자들만의 주장이다. [73] 웃긴 건 창원시가 보강공사를 약속해놓고 흐지부지 시켰단 거다. 기존 구장은 손을 대지도 않으면서 다른 곳에 자리를 잡으려 하니 딴지를 거는 그야말로 인지부조화를 보여주고 있는 거다. [74] 두산이 플레이오프에서 패배하면 3등이었다. [75] 신현철은 4월에 음주운전을 했으나 기사로 뜬 것은 6월이었다. [76] 게다가 이닝당 평균 실점이4점이다! 정지훈 입갤만 없었어도 36점 달성 야 신난다 이번 경기 팀 평균 자책점이 4점이다! [77] 이 액수는 KBO 리그 역대 신인 계약금 중 공동 5위에 해당한다. [78] 1983년 삼미 슈퍼스타즈 전/후기리그 2위, 1984년 OB 베어스 전/후기리그 2위+통합 승률 1위, 롯데 자이언츠 통합 2위, 이 3팀은 해당 년도에 모두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더더욱 어이없는 점은 86년 수정된 제도를 기준으로 보면 셋 다 가뿐히 한국시리즈 직행이 가능했다. 그나마 1982년에도 편법으로 한국시리즈가 열렸지 그게 아니었으면 OB가 한국시리즈 없이 통합 우승을 했다. [79] 그때나 지금이나 본인이 이 기록을 가지고 있다. [80] 대표적인 예가 김재걸. [81] 2013년에는 대만서 그런 거지만 이건 서울에서 했다. 또한 2013년은 득실차에서 밀렸지만, 이번엔 아예 승산도 없었다. [82] 그나마 금메달을 따서 체면치레는 하긴 했다. [83] 이전, 이후에도 고시엔 진출팀은 있었지만 순수 조선인 야구부는 1923년 휘문고보가 유일하다. [84] 같은 리그끼리는 20경기씩 총 60경기이지만 다른 리그끼리는 18경기씩 총 72경기를 치렀다. [85] 나경민이 잠시 트리플A 로스터에 들어간 적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임시 승격이었다. [86] 취소선을 쳤지만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다. 김재환은 나쁜 약쟁이, 최지만은 착한 약쟁이라는 고정 관념이 은근히 깊게 뿌리박힌데다가 최지만은 MLB에서 뛰고 있는 터라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한 점도 있기 때문. [87] 처음으로 파업이 일어난 1972년의 경우 몇 경기만 취소되었을 뿐이지만, 1981년에는 시즌의 4분의 1을 날리며 이 시기에 한해 전기-후기리그로 나뉘어 플레이오프를 치뤘고, 1994년은 8월 이후의 시즌이 취소되어 1904년 이후 90년만에 월드시리즈가 무산되고 말았다. 그리고 94년의 파업은 반년 가까이 끌어오다가 95년 시즌 개막직전에 끝났고 144경기의 단축시즌을 치뤘다. [88] 하지만 선수노조와 선수들의 권익 향상이라는 입장, 즉 선수노조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역사상 가장 통쾌한 순간이라 할 수도 있다. 위대한 선수노조위원장 마빈 밀러를 흑역사의 주동자라고 무작정 폄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89] 회색을 사용했다는 자체는 미국 구단도 많이 하기에 애매하지만, 사이타마 연고이전 이후 2008년까지 원정 유니폼엔 파란색이 주 색으로 들어가 있었는데 그 전통을 깨부쉈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90] NPB에서의 그의 취급을 보면 거의 승부조작으로 제명당한 사람 바로 밑 수준이다! [91] 그러나 일본시리즈에선 2승4패로 우승에 실패했다. [92] 그 뒤 1954년 양측 회사의 이름을 따서 요쇼 로빈스로 이름을 바꿨으나, 이듬해인 1955년 쇼치쿠가 야구단 사업을 때려치면서 다시 다이요 훼일즈로 이름을 바꿨다. [93] 여담이지만 이때 쇼치쿠 로빈스 꼴이 날 뻔한 구단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히로시마 카프(現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민구단이라는 사정 탓에 재정부족 등의 이유로 인해(이것 때문에 1951년 다이요 훼일즈에 합병까지 논의될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까지 빠졌으나 히로시마 시민들이 모은 성금으로 합병만은 면했다.) 늘 하위권 신세를 면치 못했고 이로 인해 1952년 3할 미만 승률팀 타구단 합병정책에 걸릴 뻔했으나 당시 팀의 에이스인 하세가와 료헤이 등의 분전으로 인해 극적으로 3할 승률에 안착,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정작 세리그 우승까지 한 쇼치쿠는 히로시마가 합병논의한 다이요와 합병하고 말았지만.. [94] 아예 팀을 '요미우리'라고 줄여 부르는 것 자체가 자이언츠를 비하할 목적으로 하는 말에 가깝다. 비하할 뜻이 없다면 '교진'으로 부른다. [95] 한국에서 이 성적이어도 앞의 9자리가 비밀번호 (656565566)이다! [96] 2006년에는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세이부를 눌렀으나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닛혼햄에게 패했다. [97] 2005년에 소프트뱅크가 1위를 하고도 플레이오프에서 떨어지자 1위팀에게 주는 1승 어드밴티지가 생겼었고 그 규정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2007년에는 순수 5전 3선승제라 제외) [98] 그리고 2015년에도 꼴찌를 하고 말았다(...) [99] 반시즌동안 뛰었는데 그동안 2안타 쳤다(...) [100] 지금의 오릭스 버팔로즈는 블루웨이브가 버팔로즈를 합병한 뒤 새로 바꾼 이름이다. [101] 일단 그렇게 우승해서 일본시리즈 진출했지만... 히로시마 도요 카프한테 에나츠의 21구 등의 명장면을 만들어내며 패배하고 말았다. 카프의 일본시리즈 첫 우승을 선물해버리고 말이지 [102] 참고로 꼴찌 2위는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1978년). 3위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1975년). [103] 동명의 성우와는 다르다! 거기다 이름 부분은 한자도 다르고. [104]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가 이 기록을 넘을락 말락 하지만 아직까진 천만다행이도? 넘지 못했다. [105] 당시 전적 : 36승 1무 103패 승률 .259 [106] 긴테츠의 창단 당시 이름은 긴테츠 펄즈 였는데 치바 시게루의 부임 이후 그의 별명인 "성난 황소"를 따 팀 이름을 긴테츠 버팔로→긴테츠 버팔로즈로 바꿨다. [107] 더군다나 구로다가 일본시리즈에 등판한 건 원정경기인 3차전밖에 없었다. [108] 라미고 몽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