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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8 13:01:09

헤티 그린


<colbgcolor=#000><colcolor=#fff> 헤티 그린
Hetty Green
파일:Hetty_Green_cph.3a42973.jpg
본명 헨리에타 하울랜드 로빈슨
Henrietta Howland Robinson
출생 1834년 11월 21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 뉴베드포드
사망 1916년 7월 3일 (향년 81세)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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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사업가
학력 엘리자 윙 학교
부모 아버지 에드워드 모트 로빈슨
어머니 애비 하울랜드
배우자 에드워드 헨리 그린 (1867년 ~ 1902년, 사별)
자녀 아들 에드워드 하워드 로빈슨 그린
딸 해리엇 실비아 앤 하워드 그린

1. 개요2. 일생
2.1. 전설이 된 구두쇠 짓2.2. 최후
3. 자식들의 행보4. 옹호와 비판5. 문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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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여성 사업가이자 전설적인 투자자로, 현재 가치로도 3조 원이 넘는 재산을 가졌던 갑부였으나 동시에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구두쇠이기도 하다.

2. 일생

파일:fdgghh.jpg
젊었을 적 시절

1834년 11월 21일, 헤티 그린은 미국 매사추세츠 주 뉴베드포드의 퀘이커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당시 엄청난 부자였던 고래잡이 선주였다. 태어날 때의 이름은 헨리에타 "헤티" 하울랜드 로빈슨. 부모뿐만 아니라 조부모까지 매우 엄격하게 재산을 아끼며 모아왔던 터라 어린 그린도 이런 모습을 보고 배웠다. 2살 때부터 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지자 외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는데[1], 8살이 되자 그린은 심부름으로 받은 용돈 5센트를 모아 은행에 저축하기 시작했고, 13살에는 집안 사업 가계부 정리를 맡았다. 10살에 초등학교를 나오고 15살에 보스턴에 있는 사립학교에 재학했으나 이 때부터 그는 지독한 구두쇠로 이름이 자자했기에 가까운 친구는 없었고, 곁에 두고 키운 개들만이 평생 가장 가까운 벗이었다.

21살에 헤티 그린은 9만 달러라는 거금을 유산으로 상속받았다.[2] 하지만 이 와중에 750만 달러[3]라는 막대한 재산에서 겨우 9만 달러밖에 못 받았다고 반발했다. 각주에서도 서술했듯 1855년 당시 9만 달러라는 재산은 상당한 돈이었기에 그린의 불만은 당연히 먹히지 않았고 이로 인해 형제, 자매, 친척들과 죽을 때까지 원수로 지내었다.

남북전쟁이 터지자 채권에 투자하고 뉴욕 월스트리트로 진출하며 재산을 계속 늘려갔는데, 아버지에게 상속받은 9만 달러를 50여 년에 걸쳐 1000배 이상으로 늘리는 엄청난 성과를 이루었다.[4] 헤티 그린은 2007년 포브스 선정 세계 역사 100대 부호 순위에서 16위까지 차지했으며, 20세기 중순까지 1000년 동안 여성 중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번 사업가였다.

그러나 돈을 벌면서 벌인 짓거리들을 대충 소개해도 엄청나다. 그린의 일생을 보면 책 몇 권이 나올 법할 정도인데, <묻지마 돈만 벌면 다야~>라고 그린의 행적을 찬양하는 책까지 나왔으나 그다지 인정받지 못했다. 그린이 돈을 벌려고 한 짓 중에는 범죄도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각종 세금 탈세에서부터 주변 인물들의 재산을 차지하려고 여러 위법행위를 시도했던 것 때문에 월가의 마녀(Witch of the Wall Street)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2.1. 전설이 된 구두쇠 짓

2.2. 최후

이러니 사업상 교류하는 사람 빼고는 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돈을 빌리려고 오는 사람들은 많았다.

자식들은 당연히 크자 죄다 독립하여 어머니와는 거의 연락을 끊고 살다시피 하였기에, 그린에게 위안거리라면 집에서 홀로 온갖 주식 관련 문서를 보면서 돈으로 마음을 달래는 것뿐이었다. 유일한 벗은 오로지 들뿐이었다. 하지만 위에 나오듯, 그 개들에게도 푸줏간에서 내다버린 뼈만 먹였을 뿐이었다.

그러고도 만 81살까지 장수했다.[9] 생전에 건강비결에 대하여 질문을 받았을 때, 그린은 양파를 통째로 불에 구워 먹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 살아있을 때 기자들이 붙어서 그린을 소재로 기사거리로 다루는 일이 많았다. 기자들은 그린이 자주 가는 시장이나 여러 가게에도 찾아갔는데, 상인들에게 그린에 대해 질문하면 다들 터무니없이 값을 깎는 여자라며 치를 떨었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서 그녀는 탈장으로 고생했으나, 수술비 150달러를 아끼겠다며 수술을 받지 않았다. 거기에 수 차례 발병한 중풍 때문에 휠체어를 타고 다닐 정도로 고생했는데, 결국 1916년 7월 3일, 우유값을 덜 내겠다며 도매상인과 말다툼을 하다가 갑자기 쓰러져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토록 지독하게 살아왔던 것에 비하면 참으로 허망한 최후였다. 사망원인은 뇌졸중이었으나 치매가 일부 진행된 상태였다. 실제로 늘그막의 그린은 더더욱 인간불신에 빠져 정신불안정에 시달렸고 날 누가 독살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시달려 잠도 제대로 못 잤다고 한다. 유서는 남기지 않았다.

그녀가 죽을 때 남긴 재산은 9500만 달러로, 이를 2023년 가치로 환산하면 약 26억 달러 정도, 원으로 환산하면 약 3조 1800억 원이다. 지금 기준으로도 정말 어마어마한 부자인데, 세계적으로 지금보다 경제 상황이 열악했던 1916년 기준으로는 경이로운 수준의 부자였던 셈이다. 참고로 그린이 죽기 직전에 더 못 내겠다고 하던 우유값은 고작 5센트였다.[10]

3. 자식들의 행보

아들 에드워드 하워드 로빈슨 그린(1868~1936)은 거액을 상속받고 평생을 사치스럽게 살다 갔다.[11] 돈이 넘쳐나는데도 그 돈 때문에 다리를 하나 잃은 것에 대한 아픔을 잊고자 많은 돈을 보트, 요트, 고급 자동차, 집, 빌딩 등을 사는 데 펑펑 썼음에도 평생 돈이 부족한 적이 없었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20년 동안 실컷 쓰다가 죽어서도 남은 재산이 무려 4400만 달러[12]에 달했을 정도이다.

사업가로서도 대박을 거두고 정치 당원으로도 활동하면서 평생 부족함이 없었던 그는 적어도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 장애인들에 대한 기부를 적극적으로 했고, 자신처럼 다리가 없어 의족을 쓰는 사람들을 위해 의족 연구 기금을 아낌없이 지원했으며, 가난하여 의족을 사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의족을 사서 기부하는 일을 열심히 했다. 평생을 의족을 사용하여 목발을 안 썼지만, 죽을 때 아내에게 따로 묻은 다리를 꺼내서 자신의 시체에 원래 있던 자리에 넣어두고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딸 해리엇 실비아 앤 하워드 그린(1871~1951)은 130만 달러[13]만 자신이 가졌고, 나머지 재산을 전액 기부하여 도서관 및 여러 사회시설을 짓는 데 기여했다. 물론 그 130만 달러도 당시 평생 동안 부족함 없이 살 수 있는 큰 돈이긴 했다. 다만 오빠 에드워드가 먼저 자녀 없이 죽자 아직도 막대하게 남은 재산을 가지고 에드워드의 아내 마벨과 재산싸움을 벌여 대다수 재산을 차지했다. 즉, 4400만 달러에 달하는 오빠의 재산에서 상속세 600만 달러와 마벨이 합법적으로 이어받은 50만 달러를 빼더라도 막대한 돈을 오빠를 통해 상속받은 것이다. 원래 에드워드는 누이동생과 사랑하는 아내 마벨에게 각각 재산 절반을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겼으나, 당시만 해도 법적으로는 배우자에게 상속권이 없어서 이 유언은 무시당했다고 한다. 마벨은 남편이 유언으로 남긴 막대한 돈을 상속받지 못해 아쉬워했지만, 그래도 합법적으로 상속된 50만 달러도 1930년대 당시에도 엄청 큰 돈이라[14] 이 돈만으로도 평생을 조용하지만 어렵지 않게 살다 갔다.

4. 옹호와 비판

그린을 옹호하는 측은 당시에는 여성 경제인, 사업가가 제대로 활약할 수 없던 여성차별 시대였다는 점을 주장한다. 한 마디로, 헤티 그린은 남자 부호들보다 많은 재산을 축적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지독한 자린고비로 살았다는 것이다. 확실히 그런 불리한 배경에서도 재산을 저렇게 늘린 사업적 재능은 뛰어났지만, 범죄도 마다하지 않고 친아들 다리까지 잘라가며 돈을 악랄하게 아낀 점은 도저히 옹호하기 어렵다는 게 대세이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다른 이야기도 있다. 사실 아들의 상처는 그 당시에는 도저히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병이었기에 의사가 치료를 포기했고 결국 다리를 자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몇백 달러씩 주면서 도와주거나 수많은 돈을 빈민들을 위해 기부했다는 것도 밝혀져서 무조건 까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옹호가 있다. 그리고 그린의 이러한 짠돌이 짓은 헤티 그린의 성장과정에서의 문제 때문이라고도 한다. 학자들에 따르면, 헤티 그린은 어릴 적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한 지독한 컴플렉스가 있었으며, 남동생이 사망하자 자신이 건강하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어떤 사치도 허락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2000년대엔 여자라서 억울하게 더 악랄하게 포장되었다느니 페미니즘 시각으로 쓰인 책자도 나오고 있다. 국내에서도 정발되어 나온 책자에서 나오던 주장이 위에 서술한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고자 공문서 및 사문서 위조와 같은 범죄를 저질러 가며 돈을 모은 점, 이미 수천만 달러에 달하는 재산이 있었음에도 다른 친척의 수백만 달러 재산까지 가로채려고 발악하던 점은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

5. 문화에서

엘러리 퀸이 쓴 소설 <할멈이 살고 있는 곳>(There was an old woman)에 나오는 여부자 코넬리아 포트가 바로 헤티 그린을 모델로 삼은 캐릭터이다. 이 책은 <수수께끼의 038 사건>이라는 유치한 제목을 달고 해문출판사에서 해적 중역판으로 나온 바 있다.

이 소설에 나온 코넬리아 포트는 '포트 구두'라는 업체로 대박을 거뒀지만, 직원들에게 박봉으로 악명 높아 직원들이 마더 구스에 나오는 아이들을 채찍으로 때리고 일만 부려먹는 마녀 할멈 동요를 노래하며 시위를 벌여 전 미국으로 보도되어 마녀가 운영하는 구두회사로 비아냥을 받는다. 거기에 코넬리아는 괴짜 부인으로 악명 높고 걸핏하면 고소하여 고소부인이라고 비아냥을 많이 듣던 노인네이다.

37번 고소하여 모조리 패소했는데 이유부터가 가관이다. 클래프 스태터라는 사람이 지나가다가 코넬리아 포트의 아들인 설로 포트를 알아보고 놀리는 듯한 노래[15]를 부른 걸 가지고 고소했다든지. 오죽하면 37번째 패소 판결이 나자 재판장이 "법원이 무슨 놀이터인 줄 아십니까? 포트 부인은 돈이 많으니 이런 돈 별 거 아닐지 모르지만 누구에게 급하고 중요한 돈이 나갈 법원과 재판소를 이렇게 낭비하는 일이 다시는 없기를 바랍니다!"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했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린과 달리 적어도 설로 같은 친자식은 진정으로 사랑했고 심지어, 범인인 설로[16]를 위하여 자신이 살인자라고 유언장에서 엉터리로 고백할 정도였다.
[1] 그러나 외할아버지의 응석받이 때문이었는지 고집이 셌다. [2] 1855년 기준이므로, 2023년 가치로 환산하면 약 314만 6400달러(한화 약 37억 7600만 원). [3] 이것도 2023년 환율로는 약 2억 6천만 달러(한화 약 3146억 원)에 달한다. [4] 2023년 가치로 환산한 수치를 대입해도 상속받은 재산을 842배나 불린 셈이다. [5] 이를 그녀가 사망한 1916년 기준으로 가정하면, 2023년 가치로는 4.2달러도 되지 않는다. [6] 참고로, 당시에 헤티 그린에게는 4천만 달러가 넘는 거액의 재산이 있었다. [7] 그래도 사위에게 5만 달러를 주기는 했다. [8] 1875년을 기준으로 잡고 2023년 가치로 환산하면 약 8억 7천만 달러, 한화로 약 1조 420억 원에 달한다. [9] 1830년대 출생자의 평균 수명은 50세를 넘지 않았다. [10] 이를 2023년 환율로 환산하면 1.4달러도 되지 않는다. [11] 에드워드를 백수 잉여로 보는 이들도 있으나, 사실은 대학도 나와 이미 자수성가하여 사업가로 대박을 거둬 어머니에게 유산을 물려받았을 때도 800만 달러 이상 재산을 보유한 부자였다. 즉, 어머니로부터 사업가 자질도 이어받아 그도 대박을 거둔 사업가였다. [12] 2023년 가치로는 약 9억 6300억 달러(한화 약 1조 1600억 원)에 달한다. [13] 2023년 환율로는 약 3627만 달러, 한화로는 약 435억 2400만 원에 달한다. [14] 1950년대만 해도 미국 평범한 노동자의 7년치 월급이 2만 달러 정도였다. 현재 가치로는 수백억 이상에 달하는 큰 돈이다. [15] 이 노래조차도 마더 구스 중 하나였다. [16] 사실은 설로도 허수아비였고 진범이 따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