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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9 20:38:29

연안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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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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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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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 이씨
延安 李氏
관향 <colbgcolor=#fff,#191919> 황해도 연안군
시조 이무(李茂)
중시조 이습홍(李襲洪) - 태자첨사공파
이현려(李賢呂) - 소부감판사공파
이송(李松) - 대장군공파
이지(李漬) - 통례문부사공파
이해(李核) - 예부상서공파
이분양(李汾陽) - 이부시랑공파
이방(李昉) - 전법판서공파
이득량(李得良) - 밀직부사공파
이백연(李伯衍) - 판도정랑공파
이계연(李季衍) - 영광군사공파
집성촌 서울특별시
대구광역시 군위군
인천광역시 강화군
경기도 고양시, 김포시, 파주시
경기도 양주시, 남양주시, 포천시
경기도 성남시, 용인시, 안성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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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괴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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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고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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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김천시, 영천시, 상주시
경상북도 문경시, 안동시, 예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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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경기도 개풍군
강원특별자치도 이천군, 통천군
강원특별자치도 회양군, 안변군
황해도 금천군, 수안군, 봉산군, 중화군
황해도 서흥군, 연안군, 배천군
황해도 벽성군, 평산군
평안북도 초산군
평안남도 용강군, 강동군, 평원군
평안남도 성천군, 덕천군
함경북도 길주군
함경남도 함흥시, 정평군
인구 164,036명(2015년)[1]
링크 연안 이씨 전국 대종회

1. 유래2. 조선 시대 벌열 가문3. 분파
3.1. 연안 이씨 분적 본관 일람
4. 항렬5. 논란
5.1. 시조 이무가 신당서의 이무인가
5.1.1. 부정 의견5.1.2. 긍정 의견5.1.3. 반론5.1.4. 결론5.1.5. 양측 모두 인정하고 있는 사항
5.2. 수춘부원군 이수산이 연안 이씨?
6. 실존 인물
6.1. 삼국 시대, 남북국 시대6.2. 고려6.3. 조선6.4. 일제강점기6.5. 현대6.6. 기타(위인 및 유명인의 가족)
7. 기타
7.1. 연안 이씨 문화재7.2. 창작물에서
8. 인구 분포
8.1. 집성촌
8.1.1. 남한8.1.2. 북한
9. 연안 이씨 관련
9.1. 관련 문서9.2. 관련 링크
9.2.1. 인터넷 족보

[clearfix]

1. 유래

중국 문벌귀족의 가문이자 당나라 황실의 성씨이기도 했던 농서 이씨의 후예인 연안 이씨는 농서 이씨 시조 노자[2]의 후예이자 오호십육국시대 서량의 초대 황제였던 농서 이씨 중시조 흥성제 이고의 후손이다.[3] 따라서 연안 이씨의 비조는 노자의 조상인 고요[4]이며, 도시조는 노자이다.[5] 당나라 황실과는 종친 관계이다.[6]

연안 이씨의 시조 이무(李茂)는 당 고종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내다가, 삼국 시대인 660년, 대총관 소정방의 부장(副將)으로 백제 정벌에 참여해 시염성(鼓鹽城)[7]에 식읍 1,000호를 받고 연안후(延安侯)에 봉해졌다. 신라 문무왕이 높은 벼슬을 제의했지만 이무가 극구 사양하므로 국빈(國賓)으로 예우했다. 나당동맹 와해 때 소정방 신라도 공격하려 하자 반대했다. 구전(口傳)으로는 그 뒤로 백제의 여인[8]과 혼인하고 신라에 귀화했다고 한다. 또한 이무의 아들이 다시 당나라로 돌아갔다가 그 후손이 다시 발해를 거쳐 신라로 돌아왔다고도 한다.[9]

고려 전기 이전에는 상술했듯이 황실의 성씨인 농서 이씨에서 갈라졌다 하여 똑같이 농서 이씨라 불리기도 하였고, 중기에는 염주·염성 이씨 또는 오원 이씨라고도 불렸다. 조선 중기 이후로는 높은 벼슬을 한 인물이 많다 보니 그 후손들이 자신들의 파를 따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예: 연안 이씨 관동파[10] - 동촌 이씨)

한편 성주 이씨에서 갈라진 신 농서 이씨가 있는데, 성주 이씨였던 이승경(李承慶)이 고려 말기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지내며 공적을 세워 원나라 조정에서 그의 할아버지 이장경을 농서군공(隴西郡公)에 추봉하였기 때문에 생긴 본관으로 연안 이씨의 연원보다 훨씬 후대의 일이다. 즉 연안 이씨는 물론이고 그보다 훨씬 이전에 생긴 황실의 농서 이씨와도 큰 관련이 없다. 자세한 내용은 성주 이씨 문서를 참고.

2. 조선 시대 벌열 가문

조선 시대 후기 노론을 대표하는 명문가.[11][12]

사실상 조선 후기 세도 다음으로 정국을 좌지우지한 가문 중 하나이다.[13]

조선조에 정치가로서 최고 영예인 왕통(王統)을 상징하는 종묘배향공신을 2명[14] 배출했다. 이 밖에 기로소에 들어간 인원이 21명[15], 관력으로는 9명[16] 정승, 정1품은 24명, 7명[17] 대제학 청백리 7명[18], 부원군 6명[19], 공신 11명[20], 판서 55명[21][22], 봉군 33명[23][24], 시호 53명[25][26][27], 호당 10명[28], 장신 4명, 암행어사 17명 등 문과 급제자 총 256명[29]을 배출하고 무과 급제자는 92명을 배출하는 기염을 토했으며 왕실과 인척이 아니면서도 조선 시대를 통틀어 늘 권력의 중심에 있었지만, 청백리 7명을 배출하는 등 권세를 부리거나 남용하지 않은 깨끗함으로도 명망이 높았다. 또 무엇보다 조선 후기의 청요직인 규장각 직각을 14명을 배출하고[30], 비변사 당상관 17명을 배출하는 등[31] 세도정치 때조차 중앙에서 버텨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32] 문과 급제자 출신 순위로도 전체 7위로 이씨로는 840명의 전주 이씨 다음이다.[33]

연성부원군 이석형은 세종 때 장원급제해 성종 때까지 무려 6대를 섬겼고, 세조의 총애를 받은 훈구파로서 정인지와 함께 고려사 치평요람을 편찬한 대학자였다. 현손인 월사 이정구가 좌의정을, 6세손 이귀가 1등 정사공신 작위를 받았다.

월사 이정구 신흠, 장유, 이식과 함께 조선 중기 4대 문장가로 이들과 함께 한문사대가, 사대문장가 또는 이들의 호를 앞자리를 따서 월상계택(月象谿澤)이라고도 일컬어지기도 한다. 또한 월정 윤근수의 문인으로 선조 때 대제학을 거쳐 인조 좌의정이었다. 아들 백주 이명한도 인조 때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내고, 맏아들 청호 이일상 효종 때 대제학에 올라 조선 첫 3대 연속 문형(文衡)을 배출했다. 막내아들인 이단상도 문명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부제학을 역임했고, 김창협, 김창흡 형제의 스승이다.

1761년 평양 원유사건으로 사도세자가 탄핵을 당하게 되자 사도세자를 지키려던 영의정 진암 이천보, 우의정 민백상, 좌의정 이후가 1달 간격으로 음독 자결했다. 이천보, 이후 모두 연리로, 정조 입장에선 연안 이씨에 빚을 진 셈이었다. 후일 노론이 다시 여당이 됐을 때 연안 이씨는 빛을 발했다. 홍재전서 일득록 편에 따르면 정조는 연안 이씨를 삼한갑족이라고 칭했으며, 항상 월사의 문집을 베개 옆에 놓고 봤다고 전해진다.

6대 문과 급제 집안이 4집[34], 4대 문과 급제 집안이 2집, 4대 무과 급제 집안이 1집, 3대 문과 급제 집안이 12집, 4형제 문과 급제 집안이 1집, 3형제 문과 급제 집안이 3집 등이 있다. 또한 5대 판서 역임 집안이 1집, 3대 판서 역임 집안이 5집, 부자 판서 역임 집안이 6집, 형제 판서 역임 집안이 8집이다. 그리고 월사가문은 호당에 든 사람이 5명인데 이 호당 기록은 3대 대제학 가문 중에 제일 많이 배출하였다. 또한 기로소는 70세 이상에 종2품 이상인 문과 관료만 들어갈 수 있어 입소 조건이 까다로워 역대 700명 정도밖에 없는데 기로소에 입사한 인물이 21명으로 전체 씨족 중에서 2번째로 많이 배출하였다.

연안 이씨 소속 인물들이 존경받는 이유는 많은 고관대작의 수에만 있지 않다. 연안 이씨는 구한말 일제강점기 때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더욱이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양란과 정묘호란 가릴 것 없이 외교관, 혹은 사신으로서 원군을 불러오거나 기타 자국의 유리한 결정을 하는데 역할을 수행했던 인물들이 포진했다. 재밌는 점은 조상의 영향을 받았는지 집현전 학사 이석형의 후손들이라 굵직한 국문학자들이 후손 중에 눈에 띈다.

3. 분파

고려 시대를 기점으로 10개 파가 생겼다.[35]
- 태자첨사공파(太子詹事公派) 이습홍(李襲洪)
- 소부감판사공파(小府監判事公派)[36] 이현려(李賢呂)
-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이송(李松)
- 통례문부사공파(通禮門副使公派) 이지(李漬)[37]
이상은 현재까지 후손이 전하는 4개 파이다.
- 예부상서공파(禮部尙書公派) 이해(李核)[38]
- 이부시랑공파(吏府侍郞公派) 이분양(李汾陽)
- 전법판서공파(典法判書公派) 이방(李昉)
-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이득량(李得良)
- 판도정랑공파(版圖正郞公派) 이백연(李伯衍)
- 영광군사공파(靈光郡事公派) 이계연(李季衍)
이상은 현재 남계 후손이 전하지 않아 확인할 수 없는 6개 파이다.

이를 중시조로 하여 각각 기일세(起一世)하고 있다. 문헌이 전해지지 않아 이들 계파는 시조와의 세계는 물론 각 파조들 간의 세대 관계도 모른다.

족보에 등재된 분파명과는 약간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여기 등재되어 있는 파들을 제외하고도 수백 개가 넘는 지파들이 존재한다. 또한 연안 이씨 홈페이지에 방문해서 질문을 하면 자신의 파에 관련된 자세한 답변을 들을 수도 있다.

◎ 태자첨사공파 분파(시조세대 = 중조세파 + 15세)[39]

수재공파 秀才公派(근수 根粹; 9세)[40],
판관공파 判官公派(인휴 仁畦; 10세)
별좌공파 別坐公派(광 垙; 11세),
진위공파 振威公派(오 塢; 11세)
경주공파 慶州公派(전 㙉; 11세),
삼척공파 三陟公派(말 𡊉[!]; 11세)
내의정공파 內醫正公派(하손 夏孫; 11세)[42],
이천공파 伊川公派(세안 世安; 12세)
소윤공파 少尹公派(온량 溫良; 12세),
재령공파 載寧公派(대승 大升; 12세)
사평공파 詞平公派(공승 公升; 12세),
별제공파 別提公派(관 寬; 13세)
금성공파 金城公派(엽 曄; 13세),
감찰공파 監察公派(방 昉; 13세)[43]
현령공파 縣令公派(언성 彦性; 13세),
전주공파 全州公派(언경 彦憬; 13세)
장령공파 掌令公派(언침 彦忱; 13세),
진사공파 進士公派(언벽 彦愊; 13세)[44]
참봉공파 參奉公派(언각 彦覺; 13세).

◎ 소부감판사공파 분파(시조세대 = 중조세파 + 16세)[45]

저헌공파 樗軒公派(석형 石亨; 9세)[46],
농계공파 聾溪公派(명장 命長; 11세)
호군공파 護軍公派(복장 福長; 11세),
대호군공파 大護軍公派(효장 孝長; 11세)
첨정공파 僉正公派(경장 敬長; 11세),
월사공파 月沙公派(정구 廷龜; 13세)[47]
군수공파 郡守公派(정현 廷顯; 13세),
목사공파 牧使公派(정호 廷虎; 13세)
의정공파 議政公派(정화 廷華; 13세),
문천공파 文川公派(정수 廷秀; 13세)
좌랑공파 佐郞公派(선민 先民; 14세)[A][전],
쌍계공파 雙溪公派(번민 蕃民; 14세)[A][전]
판관공파 判官公派(관민 寬民; 14세)[A][전],
좌랑공파 佐郞公派(제민 悌民; 14세)[A][전]
호군공파 護軍公派(충민 忠民; 14세)[A][전],
서민공파 恕民公派(서민 恕民; 14세)[A][전]
응립공파 應立公派(응립 應立; 14세)[A][부],
응현공파 應賢公派(응현 應賢; 14세)[A][부]
흥무공파 興茂公派(흥무 興茂; 14세)[A][부],
흥창공파 興昌公派(흥창 興昌; 14세)[A][부]
진사공파 進士公派(주 澍; 14세),
장수공파 長水公派(빈 贇; 14세)
세마공파 洗馬公派(지 贄; 14세),
참봉공파 參奉公派(현 賢; 14세)
지평공파 持平公派(보 寶; 14세),
통덕랑공파 通德郞公派(갱 賡; 14세)
충정공파 忠定公派(귀 貴; 14세)[68],
직장공파 直長公派(경한 景漢; 14세)
수한공파 守漢公派(수한 守漢; 14세),
주부공파 主簿公派(신 愼; 14세)
참군공파 參軍公派(뢰 賚; 14세),
찰방공파 察訪公派(빈 賓; 14세)
교관공파 敎官公派(괴 蕢; 14세),
교위공파 校慰公派(신 賮; 14세)
동지공파 同知公派(천 蕆; 14세),
언우공파 彦佑公派(언우 彦佑; 14세)
언종공파 彦宗公派(언종 彦宗; 14세),
사직공파 司直公派(경흥 景興; 14세)
교관공파 敎官公派(복흥 復興; 14세),
장사랑공파 將仕郞公派(중흥 中興; 14세)
윤공파 淪公派(윤 淪; 14세),
현공파 鉉公派(현 鉉; 14세)
종공파 鍾公派(종 鍾; 14세),
연공파 鍊公派(연 鍊; 14세)
용공파 鏞公派(용 鏞; 14세),
전공파 銓公派(전 銓; 14세)
참봉공파 參奉公派(노 櫓; 14세),
성제공파 城齊公派(추 樞; 14세)
추담공파 秋潭公派(남 楠; 14세),
감찰공파 監察公派(즙 楫; 14세)
별제공파 別提公派(장 檣; 14세),
봉사공파 奉事公派(제 梯; 14세)
사복시정 란파 司僕寺正 欄派(란 欄; 14세),
승지공파 承旨公派(영 楧; 14세)
사복시정 화파 司僕寺正 樺派(화 樺; 14세),
사복시정 준한파 司僕寺正 俊漢派(준한 俊漢; 14세)
익한공파 翼漢公派(익한 翼漢; 14세),
창한공파 昌漢公派(창한 昌漢; 14세)
경한공파 經漢公派(경한 經漢; 14세),
계정공파 繼鄭公派(계정 繼鄭; 14세)
중추공 인춘공파 中樞公 仁春公派(인춘 仁春; 14세)[69],
별좌공 봉춘공파 別坐公 逢春公派(봉춘 逢春; 14세)
덕희공파 德禧公派(덕희 德禧; 14세),
덕록공파 德祿公派(덕록 德祿; 14세)
덕량공파 德良公派(덕량 德良; 14세)[70],
진충공파 盡忠公派(진충 盡忠; 14세)
효생공파 孝生公派(효생 孝生; 14세)[71],
택룡공파 澤龍公派(택룡 澤龍; 14세)
사립공파 士立公派(사립 士立; 14세),
천립공파 天立公派(천립 天立; 14세)
주부공파 主簿公派(시민 時敏; 15세),
사우당공파 四友堂公派(시담 時聃; 15세)
죽창공파 竹窓公派(시직 時稷; 15세),
시겸공파 時謙公派(시겸 時謙; 15세)
시성공파 時省公派(시성 時省; 15세),
시회공파 時晦公派(시회 時晦; 15세)
승사랑공파 承仕郞公派(광현 光玹; 15세)[A][전],
부정공파 副正公派(종미 宗美; 7세)[A]
생원공파 生員公派(흥림 興林; 8세)[A][76],
감찰공파 監察公派(덕림 德林; 8세)[A][78]
전서공파 典書公派(제경 齊卿; 8세)[A][80],
평장사공파 平章事公派(안군 顔君; 2세)[A][82].

◎ 대장군공파 분파(시조세대 = 중조세대 + 18세)[83]

좌시랑공파 左侍郞公派(인후 仁后; 4세)[84],
공량공파 恭良公派(수산 壽山; 5세)[85]
찬성공파 贊成公派(질 晊; 8세).[86][87]

◎ 통례문부사공파 분파(시조세대 = 중조세대 + 18세)[88]

좌윤공파 左尹公派(척/즐 隲; 3세),
남대공파 南臺公派(백공 伯恭; 4세)
정랑공파 正郞公派(보민 補民; 5세),
현감공파 縣監公派(숭경 崇經; 6세)
충간공파 忠簡公派(숭원 崇元; 6세),
승정공파 承政公派(숭윤 崇允; 6세)
직강공파 直講公派(숙황 淑璜; 6세),
현감공파 縣監公派(숙형 淑珩; 6세)
감찰공파 監察公派(숙규 淑珪; 6세),
정양공파 靖襄公派(숙기 淑琦; 6세)
문장공파 文莊公派(숙함 淑瑊; 6세).

상술했듯이 위의 파들은 모두 현재까지 이어져오나, 아래의 파들은 현재 확인이 되지 않고 있는 파들이다.

◎ 예부상서공파(禮部尙書公派)[89]

◎ 이부시랑공파(吏部侍郞公派)[大][91]

◎ 전법판서공파(典法判書公派)

◎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 판도정랑공파(版圖正郞公派)[大]

◎ 영광군사공파(靈光郡事公派)[大][94]

3.1. 연안 이씨 분적 본관 일람

4. 항렬

상술했듯이 문헌이 삼별초의 난 때 실전되어 전해지지 않아 이들 계파는 시조와의 세계는 물론 각 파조들 간의 세대 관계도 모른다. 이에 각 파가 독자적인 항렬자를 사용한다. 또한 같은 이유로 어느 계파가 큰집인지도 알 수 없다.

태자첨사공파 시조세대[시] = 중조세대 + 15세[世代]
시조 중시조 태자첨사공파(太子詹事公派) 이습홍(李襲洪)[103]
38세 23세 구(○九), 흠(○欽)[현], 정(庭○)[내]
39세 24세 병(炳○), 하(○夏)[내]
40세 25세 녕(○寧), 중(重○)[내]
41세 26세 의(義○)[B]
42세 27세 희(○熙)
43세 28세 용(庸○), 경(庚○)
44세 29세 택(○澤), 신(○新)
45세 30세 성(聖○), 정(廷○), 종(鍾○)[장]
46세 31세 규(○揆)
47세 32세 교(敎○)
48세 33세 숙(○肅), 순(○芛)[110], 병(○秉)[C]
49세 34세 연(演○)
50세 35세 경(○卿), 영(○迎)[C]
51세 36세 진(振○)
52세 37세 면(○冕)
53세 38세 남(南○)
54세 39세 동(○東)
55세 40세 재(載○)
56세 41세 유(○猷)
시조 중시조 소윤공파
38세 23세 구(○九), 경(景○), 수(○秀)
39세 24세 병(炳○), 응(膺○), 식(○植), 糸변(외자)
40세 25세 녕(○寧), 근(○根), 두(斗○)
41세 26세 의(義○)[B], 익(益○), 일(○一)
42세 27세 희(○熙), 룡(○龍), 명(命○)
43세 28세 용(庸○), 경(庚○), 찬(○燦), 현(○炫)
44세 29세 택(○澤), 신(○新), 기(基○), 철(喆○)
45세 30세 성(聖○), 정(廷○), 종(○鍾)
시조 중시조 재령공파
38세 23세 구(○九), 춘(○春)
39세 24세 병(炳○), 일(日○)
40세 25세 녕(○寧), 성(○聖), 유(有○)
41세 26세 의(義○)[B], 상(商○)
42세 27세 희(○熙), 범(○範)[115], 윤(○潤)
43세 28세 용(庸○), 경(庚○), 진(震○)
44세 29세 택(○澤), 신(○新), 형(○亨)
45세 30세 성(聖○), 정(廷○), 규(奎○)

소부감판사공파 시조세대[시] = 중조세대 + 16세[世代]
소부감판사공파(小府監判事公派) 이현려(李賢呂)[118]
시조 중시조 전서공파, 부정공파
39세 23세 재(○宰), 조(祖○)
40세 24세 승(○承), 人변(외자)
41세 25세 영(○榮), 병(秉○)
42세 26세 훈(○勳), 火변(외자)
43세 27세 규(○圭), 배(○培)
44세 28세 겸(○兼)
45세 29세 능(○能)
46세 30세 동(○東), 근(○根)
47세 31세 용(○容)
48세 32세 재(○在), 재(○載)
49세 33세 석(○錫), 범(○範)[C]
50세 34세 철(○澈), 순(○淳)[C]
51세 35세 환(○桓)
시조 중시조 문천공파, 의정공파
39세 23세 조(祖○)
40세 24세 人변(외자)
41세 25세 병(秉○)
42세 26세 火변(외자), 희(○熙)
43세 27세 배(○培)
44세 28세 金변(외자), 종(鍾○)
45세 29세 우(○雨)
46세 30세 동(○東), 근(○根)
47세 31세 용(○容)
48세 32세 재(○在), 재(○載)
49세 33세 석(○錫), 범(○範)[C]
50세 34세 철(○澈), 순(○淳)[C]
51세 35세 환(○桓)
시조 중시조 월사공파
39세 23세 재(○宰)
40세 24세 승(○承)
41세 25세 영(○榮)
42세 26세 훈(○勳)
43세 27세 규(○圭)
44세 28세 중(○重)
45세 29세 제(○濟)
46세 30세 동(○東), 근(○根)
47세 31세 용(○容)
48세 32세 재(○在), 재(○載)
49세 33세 석(○錫), 범(○範)[C]
50세 34세 철(○澈), 순(○淳)[C]
51세 35세 환(○桓)
시조 중시조 평장사공파[125]
39세 23세 사(思○), 성(○性), 종(宗○), 덕(德○), 춘(春○)
40세 24세 집(○集), 종(宗○), 채(○采), 배(○培), 덕(德○)
41세 25세 火변(외자), 金변(외자), 창(昌○), 곤(○坤), 세(世○)
42세 26세 규(○奎), 로(○魯), 현(○鉉), 경(敬○), 석(○碩)
43세 27세 선(善○), 점(○漸), 재(在○), 정(廷○), 원(元○)
44세 28세 승(承○), 종(鍾○), 찬(○燦)
45세 29세 영(○英), 호(○浩)
46세 30세 도(○燾)
47세 31세 기(起○)
48세 32세 재(○在), 재(○載)
49세 33세 석(○錫), 범(○範)[C]
50세 34세 철(○澈), 순(○淳)[C]
51세 35세 환(○桓)

대장군공파 시조세대[시] = 중조세대 + 18세[世代]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이송(李松)[130]
시조 중시조 사정공파[131] 생원공파[132]
38세 20세 석(○錫), 혁(○赫), 모(○模), 섭(○燮) 응(○膺), 중(○重), 철(○哲)
39세 21세 치(致○), 정(貞○), 언(○彦), 학(○學) 선(善○), 문(文○), 익(○翼)
40세 22세 익(○翼), 계(啓○), 구(九○), 종(鍾○) 주(○周), 영(○榮), 종(鍾○)
41세 23세 순(○純), 섭(○燮), 길(○吉), 원(○元) 헌(憲○), 광(光○), 기(基○), 인(寅○)
42세 24세 형(瀅○), 진(珍○), 재(在○), 병(秉○), 동(東○) 제(○濟), 배(培○), 세(○世), 병(炳○)
43세 25세 오른쪽과 동일(右同) 재(梓○), 영(榮○), 정(楨○), 근(根○)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신 항렬(新 行列)
시조 중시조 신 항렬자 구 항렬자
43세 25세 정(○楨), 근(○根) 영(榮○), 근(根○), 정(楨○), 재(梓○)
44세 26세 황(○晃), 엽(○燁) 형(○炯), 병(○炳), 찬(○燦), 엽(○燁)
45세 27세 윤(○允), 규(○圭) 균(均○), 기(基○), 지(址○), 규(圭○)
46세 28세 진(○鎭), 호(○鎬) 진(○鎭), 종(○種), 석(○錫), 호(○鎬)
47세 29세 양(○洋), 수(○洙) 영(泳○), 락(洛○), 사(泗○), 수(洙○)
48세 30세 재(○宰), 림(○林) 핵(○核), 식(○植), 표(○杓), 모(○模)
49세 31세 렬(○烈), 경(○炅) 렬(○烈), 환(○煥), 염(○炎), 경(○炅)
50세 32세 도(○道), 재(○在)
51세 33세 우(○祐), 현(○玹)
52세 34세 준(○濬), 윤(○潤)
53세 35세 승(○承), 걸(○杰)
54세 38세 보(○輔), 희(○熺)

통례문부사공파 시조세대[시] = 중조세대 + 18세[世代]
통례문부사공파(通禮門副使公派) 이지(李漬)
시조 중시조 정랑공파, 직강공파
36세 18세 교(○敎)
37세 19세 용(○庸)
38세 20세 균(○均)
39세 21세 현(鉉○)
40세 22세 영(○永)
41세 23세 화(○和)
42세 24세 응(應○)
43세 25세 원(○遠)
44세 26세 선(○善)
45세 27세 순(○淳)
46세 28세 동(東○)
47세 29세 태(○泰)
48세 30세 중(重○)
49세 31세 호(○鎬)
시조 중시조 충간공파
36세 18세 교(○敎), 림(○林), 규(○奎)
37세 19세 성(○性), 희(○熺)
38세 20세 균(○均)
시조 중시조 정양공파
36세 18세 교(○敎), 병(○秉)
37세 19세 성(○性), 환(○煥)
38세 20세 준(埈○), 균(○均)
시조 중시조 문장공파
36세 18세 병(炳○)
37세 19세 희(喜○)
38세 20세 진(○鎭), 탁(○鐸)
39세 21세 호(浩○), 해(海○)
40세 22세 식(○植), 복(○馥)
41세 23세 광(光○)
42세 24세 규(○奎)

5. 논란

5.1. 시조 이무가 신당서의 이무인가

5.1.1. 부정 의견

1887년 연안 이씨 운초 이정균이 지은 역사픽션 <흥무왕연의>에 등장하는 시조 이무가 신당서에 등장하는 농서 이씨[135] 이무가 맞는가 하는 문제이다. 신당서 열전 제4권에 나오는 이무가 동명이인이 아닐까 하고 김동협이 문제를 제기했다. #

연안 이씨 시조에 대한 기록이 당대 중국 측 기록으로는 없고 현재 중국에서 알고 있는 이무 역시 회남왕이 아닌 대한민국의 명가 연안 이씨의 시조라는 점 및 백제 정벌을 했다는 연안 이씨 족보의 주장을 그대로 실었을 뿐이다.

이에 대해 부사공파 문중 22세손 이성영은 혹여 가필이거나 정확지 않은 내용으로 시조를 오히려 욕되게 할 수 있으니 판단을 조심하자는 글을 썼다. 또한 이무가 연안백이 되었다가 연안후로 가봉이 된 후 국빈으로 대접받았다고 하는데 연안이란 지명은 고려 충선왕 때인 14세기이므로 혹여 연안후가 됐다 하더라도 중국 어딘가의 연안이 아닐까란 가설을 세우기도 했다. #

그러면서도 시조의 이름이 첫 등장하는 것은 현종 때 동국만성보가 처음이며[136] 영조 때 문헌비고와 일제강점기 때인 1924년 만성시조편임을 지적한다.[137] 물론 전문가의 주장은 아니기 때문에 고종 때 창작인 흥무왕연의를 김유신 장군의 흥무왕실기로 오해한 점은 눈에 띈다.

나당연합군의 지휘부 명단에는 대총관 소정방, 부대총관 김인문, 좌효위장군 유백영, 우무위장군 풍사귀, 좌효위장군 방효공 등이 나와있고, 중랑장 이무의 이름은 없으나 최소한 시조가 당나라에서 백제로 건너온 것이 맞는다면 소정방 웅진도독부 등을 설치할 때 남기고 간 1만 병사 중 장교가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5.1.2. 긍정 의견

원정시 농서 이씨 황족을 1명 파견한 게 아닌가. 단순한 장교가 제후의 직위를 받는가.

회남왕 이무가 맞는다는 전제하에 측천무후가 이무의 부친 이원례를 죽여 당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귀화하지 않았을까. #

문무왕이 공을 인정해 시염성(鼓鹽城)에 식읍을 내렸고, 이에 후손들은 본관을 시염으로 하였다. 시염성(鼓鹽城)은 현재의 황해도 연안이므로 이무가 식읍으로 받은 곳이 황해도 연안으로 보는 것이 옳다.

또한 1821년에 연안 이씨 종원 이문우(李文愚)가 시조묘를 찾기 위해 여러 수소문을 한 결과 황해도 연안부 서편 비봉산 옥녀봉 아래 은일동(隱逸洞)에서 시조묘를 찾고, 혼유석과 상석 밑에서 ‘연안백이무(延安伯李茂)’라고 쓰여 있는 지석을 발견하였으므로 이무가 식읍으로 받은 곳은 중국과 무관한 황해도 연안임이 자명하다. #

1,000호의 식읍은 우리나라 역사상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중국의 만호후 수준의 제후였다. 당시의 식읍은 고려 시대와 달리 전적인 권한이 있었을 걸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무는 신라의 왕의 아랫사람은 아니며, 봉건시대 군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5.1.3. 반론

5.1.4. 결론

회남왕 이무는 백제로 온 사실이 없고 패륜으로 중국에서도 최남단 하이난 섬 싼야시까지 유배를 가서 죽는다. 즉 회남왕 이무는 한반도에 자손을 남길 수도 없고 집안의 명예와 역사에 누가 될 인물을 다시는 잘못 주장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다.

경북 군위 장군당에 대해 "문무왕, 김유신, 회남왕 이무가 모여..."이런 내용의 2011년 경북일보의 기사가 있는데 1회성 기사야 그렇다 쳐도 혹시 장군당 사적 설명 등 회남왕 운운하는 정보가 있다면 서둘러 정정시켜야 할 것이다.

5.1.5. 양측 모두 인정하고 있는 사항

5.2. 수춘부원군 이수산이 연안 이씨?

이수산은 1352년 조일신의 난 때 살해당할 뻔했지만 숨어서 죽음을 면했고 첨의평리, 행성낭중 등을 역임하다가 기철 등이 숙청되어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으나 풀려난 후 수춘군에 봉해진 다음 찬성사와 당시 정1품 관직인 판삼사사[141]를 지냈고 추성익대좌명공신과 추숭보절익대좌리공신에 봉해졌으며, 공량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대부분의 사전엔 이수산의 본관이 수안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연안 이씨 대장군공파 중 공량공파의 족보에 이수산이 그의 형제인 수창, 수장과 함께 이인계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후대까지 기록되어 있기에 이수산을 수안 이씨가 아니라 연안 이씨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근대 지리학자 이지호[142] 수안 사람으로서 본관이 '연안'인데, 이 사람이 공량공의 21세손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1980년대 연안 이씨 공량공파 족보 서문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 족보 서문엔 본인의 선대는 분명한 연안 이씨임에도 불구하고, 각종 사적과 보서에는 수안으로 관향이 기록되어 있어 조상에 대한 죄를 짓고 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수산의 본관이 연안이라는 주장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이수산이 수춘부원군에 봉군이 내려지면서 아들인 지밀직사사 이념과 함께 수안에 정착하였다는 내용을 보아 이수산이 본관을 '연안'에서 '수안'으로 분적했다는 주장이다.[143][144] 다른 여타 가문의 특성을 살펴보아도 분관한 가문은 봉군에 의하여 분관되는 경우가 많다.

다른 주장으로는 이수산이 수춘부원군에 봉군되었기에 본관이 수안이라고 오인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수춘부원군은 고려사에서 처음 언급된 것으로 보이는데, 고려사라는 사료가 고려 당시에 기록된 사료가 아니라 1400년대 중반 즈음에 작성된 사료이기에 이수산의 본관까지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었고, 단순히 이수산이 수춘부원군에 봉군됐다는 이유로 그의 본관을 수안이라 칭했다는 것이다. #

또 다른 주장으로는 정말 출신 지역이 수안군이라 명신전에 수안군 사람(遂安郡人)이라고 나와있다는 주장이 있다. 다른 가문의 인물들로 예를 들면 본관이 성주라고 하면 ‘ 성주 사람(星州人)’이라고 표기하지 ‘ 성주군 사람(星州郡人)’이라고 표기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처가인 인천 채씨 세보에도 이수산 수안군 사람(遂安郡人)이라 하였고, 공량공파 파보에 이수산의 아들인 이념의 묘는 수안군 도소면에 소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수산 수안군 사람(遂安郡人), 즉 고향이 수안이라는 것이지 본관이 수안이라는 것이 아니며, 인명사전 등에서 본관을 수안이라고 기재한 것은 고향인 수안을 본관으로 잘못 해석한 기록이며, 수춘부원군도 이수산의 고향인 수안을 바탕으로 봉군이 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

1973년 발간된 연안 이씨 공량공파 족보의 서문엔 공량공의 후손들이 조선 후기 이전부터 이수산의 뿌리는 연안 이씨에 있다는 내용이 담긴 보첩을 갖고 있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비록 1973년에 발간된 족보의 서문이지만 해당 내용을 한성부판윤을 지낸 강난형이 1867년에 작성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결정적으로 수안 이씨 족보에는 이수산과 아들 이념이 나와 있지 않고, 연안 이씨의 보첩에 이수산의 선대와 그의 후손들의 세계가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봤을 때 이수산의 본관은 수안이 아니라 연안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항목을 만드는데 사용한 자료들의 출처이고, 이 글은 공량공파와 연안 이씨의 관계를 고찰한 글이다. 해당 링크들을 통해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

6. 실존 인물

6.1. 삼국 시대, 남북국 시대

6.2. 고려

계보가 삼별초의 난 때 실전되었다고 전한다.[150] 이에 현재는 계보가 전해지지 않아 각 파의 중시조의 세계를 고증할 수 없어 중시조의 선대의 인물을 신분 정도만 간단히 유추하고, 정확히는 파악할 수 없다는 어려움이 있다. 그 예로 상서좌복야 등을 지낸 김의공의 처가 연안 이씨라고 전하는데, 부인 연안 이씨의 아버지는 도감판서를 지낸 승중(承中)이며, 조부는 제학을 지낸 충건(忠健), 증조부는 소감을 지낸 유인(裕仁)이라고 한다. 여기서 김의공의 처 연안 이씨는 1117년 생이므로 증조인 이유인(李裕仁)은 대략 1000년대 중반 시기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유인(李裕仁)은 현재 밝혀진 연안 이씨의 파들 중 가장 활동 시기가 빠른 소부감판사공파 중시조 이현려의 활동 시기보다 이전에 활동한 인물로 역시 계보가 전해지지 않아 세계를 파악할 수 없다. 또 고려 성종이 “쇠로 말하면 좋은 소리를 내는 것과 같은 사람이다.(鐵中錚錚)”라고 표현한 고려 현종 13년에 졸한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주국(尙書左僕射參知政事柱國)을 지낸 이주헌[151]의 증손이자 선종 1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태자소보를 지낸 이공저[152]의 본관이 연안( 농서)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생년이 고려 문종 6년임을 보아 각 파 중시조의 선대의 인물로 추측되나 역시 확실히 고증할 방도가 없다.

6.3. 조선

6.4. 일제강점기

6.5. 현대

6.6. 기타(위인 및 유명인의 가족)

7. 기타

7.1. 연안 이씨 문화재

7.2. 창작물에서

8. 인구 분포

2015년 인구 기준으로 작성된 문서임을 밝힌다.
순번 지역 인구수
1 서울 36,497명
2 부산 7,177명
3 대구 7,396명
4 인천 10,963명
5 광주 1,844명
6 대전 7,256명
7 울산 2,178명
8 제주 836명
9 세종 769명
10 경기도 45,476명
11 강원도[227] 3,619명
12 충청북도 6,852명
13 충청남도 7,877명
14 전라북도[228] 9,908명
15 전라남도 2,655명
16 경상북도 6,968명
17 경상남도 5,765명
18 전국 164,036명
정리를 하면 2000년 대비 서울 부산의 인구는 오히려 줄었고, 인천 경기도의 거주 인구가 늘었다. 충청남도의 인구 수는 조금 늘었고, 전라북도는 2000년 대비 조금 줄었다. 수도권의 인구 수가 전체 인구의 반절 정도로 비중이 크며, 전라도에서는 전라북도에 인구 수가 크게 편중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제주특별자치도의 인구는 836명으로 2000년보다 인구수가 약 300명 정도 늘었다.

8.1. 집성촌

8.1.1. 남한

8.1.2. 북한[229][230]

9. 연안 이씨 관련

9.1. 관련 문서

9.2. 관련 링크

9.2.1. 인터넷 족보


[1] 해주 이씨와 안산 이씨 경기계 등 본래 연안 이씨였으나 다른 가문으로 분관한 경우와 해외 거주자 또는 개인 사정으로 인해 성씨 또는 본관을 바꾼 경우 또는 6.25 전쟁 당시 이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연리 후손 중 일부(이북에서 내려온 후손의 경우 휴전 직후 동/면사무소 서기가 호적을 정리할 때 본관이 미기재되어 있어 임의로 본관을 전주 등 다른 본관으로 기록하는 바람에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후손들이 본관을 되돌리려 해도 집안의 가보나 종친회 족보를 보고 인정해야만 수정할 수 있는데, 피난할 때 족보를 갖고 피난하는 경우는 드물고, 종친회의 도움을 받고 족보를 제공받기도 어렵기에 그냥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물론 남북통일이 된 후 일가친척이 족보를 소장하고 있거나 종친회가 직접 나서서 도와주면 바꿀 수 있겠지만) 등 그 외 인구를 포함한다면 약 17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또한 2015년 통계청의 집계에 따르면 연백 이씨가 29명이 있는 것으로 나왔다. 다만 이들이 연안 이씨인지 아님 말 그대로 연백 출신의 이씨인지는 불분명하다. [2] 본명이 ‘이이(李耳)’이다. [3] 대장군공파 종중에선 시조 이무가 흥성제 이고의 여섯째 아들 이번(李翻)의 후손이라고 주장했으나 일부 종원들은 이번(李翻)의 손자 이무는 연안 이씨 시조 이무와 생몰연대가 맞지 않다는 점에서 이번(李翻)의 후손이라는 것에 부정하기도 한다. 단, 연안 이씨 시조 이무가 상술한 이무와 다른 인물로 이번(李翻)의 또 다른 후손일 가능성도 있다. # 또 다른 사람은 이무의 선대의 족보를 제시하기는 했으나 그 근거는 미상이며, 족보의 인물들이 실존 인물인지조차 의문이다. 다음은 해당 인물이 제시한 이무의 족보이다. ‘ 이윤(李允)-이상후(李祥厚)-이무양(李武陽)-이교-이총(李叢)-이무(李茂)’ 그러나 제일 선대인 이윤(李允)은 누구의 후손인지 제시하지 않았다. 단, 연안 이씨가 농서 이씨 출신인 것은 확실하다. [4] 참고로 고요의 증조부는 창의로 삼황오제 중 하나인 황제 헌원씨 황제의 본처인 서릉의 딸 누조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다. 산해경에 따르면 창의는 하늘나라에서 죄를 범해 인간세계로 내려가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창의의 아버지인 황제 소전씨와 유교씨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소전씨는 인류의 시조격인 태호 복희씨와, 질서의 여신으로 우주를 배회하다가 번개의 신 뇌공의 발자국을 밟고 난 후 갑자기 임신했다는 화서(花序)의 딸 여와의 아들라고 한다. 태호 복희씨 여와의 아버지는 뇌신(雷神) 풍뢰우(風雷雨)로 이들의 성씨 또한 풍(風)씨였다고 한다. 소전씨 염제 신농씨의 아버지이기도 한데, 이 기록대로라면 서로 극렬하게 대립한 황제 염제 이복형제 관계가 된다. [5] 그러나 당나라 황실인 농서 이씨는 본래 탁발선비 계통으로 노자의 후손을 참칭했다고 보기도 하는데, 오호십육국시대 남북조시대에는 이민족의 중원 유입이 굉장히 활발했고 이들은 한족들에게 권위를 세우기 위해 중원의 유명인이나 신화시대의 인물의 후손을 참칭했기 때문에 농서 이씨가 본래 탁발선비 계통이라는 가설도 아예 허황된 가설은 아니다. 황실의 경우 모계는 실제로 선비족이긴 한데 부계는 탁발씨 계통인지 한족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황실은 스스로 한족임을 자처했으므로 선비족의 영향이 짙었던 한족 정도로 여겨도 무방할 듯싶다. [6] 당나라 황실은 흥성제의 아들이자 이번(李翻)의 형인 이흠의 계통이다. [7] 지금의 황해도 연안군. [8] 신라의 여인이라는 말도 있다. [9] 단, 이 이야기는 종원들 사이에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종원들이 이무가 당시 당나라의 국정이 측천무후로 인해 어수선하여 신라에 귀화했다고 보기 때문에 그의 아들이 다시 당나라로 되돌아갔다는 말은 신빙성이 없기 때문이다. [10] 연안 이씨 관동파와 그들의 근거지를 조사한 논문이 존재한다. # [11] 높은 고관들이 노론계 연안 이씨였던 것이지 물론 소론 남인 연안 이씨도 있었다. 대표적인 남인 계열이 태자첨사공파 계열의 이조판서 근곡 이관징 계열이다. 이관징은 예송논쟁에서 남인 학설을 지지했으며, 그의 아들 예조참판 근암 이옥은 환국에서 송시열의 극형을 주장했다. 이들의 후손은 처가 쪽 인연으로 경상북도 상주 지역으로 이거 했는데 이때 이옥의 아들 이만부가 한성을 떠나기 전 숙부 이협과 함께 아버지 예조참판 이옥을 따라 입궐하여 숙종에게 낙향 인사를 드렸다. 숙종은 그들의 낙향 결심이 확고부동한 것을 알고 "그대들이 영남으로 낙향하는 것은 좋으나 과연 영남에 그대 집안과 혼인할 수 있는 가문이 몇이나 될까?"라며 넌지시 농담을 던졌다고 한다. 이에 이들은 "성은이 망극하오나, 조령을 넘으면 버들잎 오얏뿌리가 발에 걸릴 듯 하옵니다."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실제로 이들의 말대로 종녀가 영남 남인의 정신적 지주인 이언적 종가의 종부로, 또 이황의 고제인 류성룡 종가 종부로 출가했다. 소론 계열은 대제학 이명한의 증손자이자 기로소에 입사했던 판서 이철보, 길보의 아버지인 이정신 계열이 있다. 이정신은 이종성, 조태억 등 소론계 인사들과 교류하였으며, 경종 대에 병조참판, 경기도·황해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이후 소론으로서 노론을 탄핵시키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신임사화를 일으킨 주동자로 지목되어 유배되었다. 또한 이정신의 증손이자 좌의정 이복원의 아들인 영의정 이시수 소론의 마지막 영수였다. [12] 조선 시대에 너무 번성해서 그런지 고려 시대에는 세력이 크지 않았던 가문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옳지 않다. 시조부터 중시조까지 세계를 고증하던 문헌이 실전되어 선대를 알 수 없어 고려 무신정권 시기 전후부터 여말선초까지라는 시대가 제한됨에도 불구하고(각 파 중시조의 선계를 고증할 수 없다 보니 각 파 중시조의 선조조차도 분명히 밝힐 수 없다. 또한 선계를 밝힐 수 없다 보니 과거 연안 이씨 족보 제작 당시에도 연안 이씨 종중조차 모르는 파와 세계가 존재했을 것이다. 즉 이름조차도 밝혀지지 않은 파가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당대 연안 이씨는 재상지종은 아니었지만 당대에 유력했던 권문세가 무신정권 이후와 원나라의 간섭기 이후 판삼사사 오원부원군 이권, 연안군 이엄, 원나라에서 연안군으로 봉해진 이아자첩목아, 무신으로 정권을 잡아 지밀직사사에 오른 위사공신 이분희와 원종의 총애를 받은 그의 동생 이습을 배출하는 등 당대에 세력이 컸던 가문이었다. [13] 당시 권신들을 일컫는 말로 천생오태사(天生五太史)라는 단어가 있다. 이는 연안 이씨 극옹 이만수[234], 장동 김씨 김조순, 의령 남씨 남공철, 청송 심씨 심상규, 대구 서씨 서영보을 일컫는 말로 이 시기에 정계를 움직인 핵심 인물들이다. 천생오태사(天生五太史)는 권세가 막강하여 감히 견제하기 어려워 이들의 권력을 빗대어 표현한 말로 하늘이 내린 태사라는 뜻이다. 이들의 집안은 혼인을 통해 인연을 유지하거나 서로 친교하여 세력을 유지하였다. [14] 인조실 배향 이귀, 순조실 배향 이시수 [15] 판서 이철보가 동생 이길보와 함께 기로소에 들어간 데 이어 아들 좌의정 이복원과 손자 영의정 이시수가 기로소에 들어가는 삼세입사(三世入社)를 이루었다. [16] 정승 명단: 이시백, 천보, 시수(이상 영의정), 이귀령, 정구, 후, 복원, 성원, 존수(이상 좌의정) [17] 판삼사사 이수산의 아들 이념이 태조 때 대제학의 전신인 예문춘추관 대학사를 지냈으므로 대제학의 전신인 대학사까지 포함한다면 8명이 된다. [18] 연릉군 이만원은 정조 20년(1796) 4월 18일 청백리로 천거되었으나 녹선되지 못한 54인 중 한 명이다. # 따라서 연리 청백리 명단에서 제외하여 7명이라고 표기하였다. [19] 사후 추봉된 경우까지 포함하면 10명이다. 참고로 고려 때 봉해진 부원군은 2명이다. [20] 고려 때 공신은 5명이다. 공신이 되었다는 기록이 족보에서만 확인되는 경우까지 포함한다면 총 7명이다. [21] 병조판서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는 이척과 이승백, 예조판서를 지냈다는 이보정, 족보에는 봉익대부 전공판서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활동연대를 고려하면 전공판서가 아닌 공조판서를 지낸 것으로 보이는 이지수, 병조전서를 지냈다는 이장림, 공조전서를 지냈다는 이음, 이귀령의 증손 예조판서 이종규(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국조방목에서는 어찌 된 일인지 ‘유종규(柳宗揆)’라고 나온다. 그러면서도 이칭은 ‘이종규(李宗揆)’라고 표기하고 있다. # 또한 조선왕조실록에서 태종 때 예조좌랑 등을 지낸 이종규(李宗揆)의 기록은 나오지만 유종규(柳宗揆)의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호조판서를 지냈다는 이규장을 포함하면 총 63명이다. [22] 6조의 판서를 모두 역임한 사람은 이만수, 조원(肇源), 존수이다.( 지식백과에선 좌의정 이후의 손자이자 연행기사를 저술한 연풍군 이갑도 6조의 판서를 모두 지냈다고 소개하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 등 사료에선 이갑이 호조판서를 지냈다는 기록이 나오지 않아 제외하였다.) 총 3명을 배출하였으며, 본관별로는 4명을 배출한 신 안동 김씨 다음으로 가장 많이 배출하였다. [23] 이귀의 일가가 10대 봉군으로 이어졌다. [24] 고려 때 봉군은 3명이다. 원나라에서 봉군된 경우와 봉군된 기록이 족보에서만 확인되는 경우까지 포함하면 총 6명이다. [25] 월사 이정구가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은 후 이 가문에서 문(文)자 시호를 받은 사람이 8대에 걸쳐 18명이다. [26] 유언으로 시호를 내리지 말라고 한 인물은 이귀산, 지억(이상 태자첨사공파), 이철보, 길보, 익보, 조원(祖源), 갑, 면응, 풍익, 세재, 현익, 순익(이상 소부감판사공파)으로 모두 11명이다. [27] 고려 때 시호를 받은 인물은 2명이다. [28] 전체 씨족 중 가장 많이 배출했다. [29] 연안 이씨 255 + 연안 유씨 1(연안인 이종규를 유종규라고 오기함.) = 256명. 문과 급제자 수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을 기준으로 작성하였다. 또한 문과 3회 급제자는 2명(이숙함, 만회), 2회 급제자는 8명(이석형, 주, 소한, 도, 은상, 명식, 지회, 성원)이다. [30] 참고로 규장각 첫 번째 제학이 좌의정 이복원이며, 정조가 규장각 각신 중에서 공로가 많은 4명의 각신을 지명하여 초상화를 그리게 했는데 그중 2명이 연안 이씨로 판서를 지낸 이시원, 조원(肇源) 형제이다. [31] 이 수는 세도 가문으로 유명한 풍양 조씨와 같은 수로 역대 비변사 당상 역임자 중 6%가 연안 이씨다. [32] 연안 이씨는 당시 왕비를 간택할 때 동성을 제외하고 간택하였기에 당연히 왕비를 배출하지 못했고, 후궁조차 배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당시 세도가들이 왕실의 인척임을 이용하여 권력을 휘둘렀던 시기에 왕실과의 인척이 없던 가문이 세력이 있었다는 것은 거의 유일하다. [33] 여러 사이트에선 전체 8위로 나와있는데, 이는 남양 홍씨의 문과 급제자 수인 329명이 혈연적인 관계가 전혀 없는 당홍계 토홍계가 합쳐서 나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개의 가문은 서로 혈연적 관계가 없으므로 문과 급제자 수를 조사할 때 따로 조사해야 한다. 따라서 남양 홍씨 당홍계 토홍계를 구분해서 조사한다면 문과 급제자 수는 각각 206명과 123명이므로 연안 이씨는 전체 7위이다. [34] 소부감판사공파에서 1집과 태자첨사공파에서 3집을 배출했다. 태자첨사공파의 어느 종원의 말에 따르면 5대 문과 급제 집안과 4대 무과 집안도 존재한다고 한다. 이에 소부감판사공파에서도 1집만 배출한 게 아니라 더 많은 집안을 배출했을 가능성이 높다. [35] 고려 충혜왕 때 지밀직사사를 지낸 연안군(延安君) 이엄(李儼)과 이엄(李儼)의 동생으로 지신사를 지낸 이운(李芸), 충정왕 때 지도첨의사를 지내고 공민왕 때 판삼사사에 오른 연성군(延城君) 오원부원군(五原府院君) 이권(李權)을 중시조로 하여 13개의 파로 보기도 한다. [36] 과거 명칭은 판소부감공파였으나 2002년부터 소부감판사공파로 명칭이 변경됐다. [37] 이지(李漬)의 처가인 전의 이씨 족보에 따르면 일명이 이을년(李乙年)이라고 한다. [38] 이해(李海)라고 하기도 한다. [39] 청백리를 다수 배출한 파이다. 그러나 별제공파(중시조 21세 항렬까지만 수록되어 있다.)와 금성공파(중시조 19세 항렬까지만 수록되어 있는데 19세손인 인물은 무후로 기록되어 있고, 금성공파의 종손이자 태자첨사공파 17세손인 이세온은 슬하에 자손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진위공파(1984년에 발간한 갑자보를 기준으로 최말손(最末孫)이 중시조 28세손으로 모두 189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초반 출생이다. 이를 통해 진위공파의 모든 후손들은 이북에 남아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내의정공파(최말손(最末孫)이 중시조 25세손으로 진위공파와 같이 1900년대 초반에 출생한 인물들까지만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는 남계 후손이 끊어진 것으로 보인다. [40] 이 파에서 안산 이씨 경기계가 분관하였다. 또한 수재공파의 지파인 금호공파는 선대 고증 문제로 인해 소부감판사공파 족보와 태자첨사공파 족보에 모두 실렸다. # [!] 土+末 [42] 내의원정공파(內醫院正公派)라고도 한다. [43] 1920년에 만들어진 경신보까지는 중시조 18세 항렬까지 수록되어 있었으나 이후에 만들어진 족보부터는 하나의 파로서 인정받지 못해서 사라졌다. [44] 연안 이씨 내에서도 진사공파는 여러 개이기에 구분을 위해 이언벽의 호를 따서 모암공파(慕菴公派)라고 하기도 한다. [45] 소부감판사공파는 분파의 수가 약 70여 개로 그 수가 굉장히 많은데, 이들 중 5개의 파를 제외하면 전부 저헌 이석형으로부터 시작된 저헌(문강)공파에 속한다. 즉 판사공파의 거의 대부분은 저헌공파이다. 여기에 속하지 않는 5개 파는 전서공파, 부정공파, 평장사공파, 생원공파, 감찰공파이다. [46] 문강공파(文康公派)라고도 한다. [47] 관동파(館洞派)라고도 하며, 동촌 이씨가 이 파를 일컫는 말이다. [A] 저헌공파가 아닌 파이다. [전] 전서공파의 지파이다. [A] [전] [A] [전] [A] [전] [A] [전] [A] [전] [A] [부] 부정공파의 지파이다. [A] [부] [A] [부] [A] [부] [68] 연평공파(延平公派)라고도 한다. [69] 중추공 인춘공파는 구한말에 태어난 중시조 22세 항렬인 인물까지만 수록되어 있다. 즉, 현재 남계 후손이 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70] 덕량공파는 구한말에 태어난 중시조 21세 항렬인 인물까지만 수록되어 있다. 즉, 현재 남계 후손이 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71] 효생공파는 구한말에 태어난 중시조 21세 항렬인 인물까지만 수록되어 있다. 즉, 현재 남계 후손이 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A] [전] [A] [A] [76] 집성촌이 개성시 개풍구역이다. 흥림은 태학생원이었는데 고려가 멸망하자 부조현(不朝峴) 진봉산 대사암 일대에서 낙향하였다. 흥림이 낙향한 부조현(不朝峴)은 태조가 고려 유신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경덕궁에서 친히 과거를 열었으나 이들은 아무도 응시하지 않고 경덕궁 앞의 고개를 넘어가 버렸다. 이에 그 고개를 부조현(不朝峴)이라 하였고, 부조현(不朝峴) 북쪽에 관을 걸어놓고 넘어갔다 하여 이를 괘관현(掛冠峴)이라 불렀다고 한다. [A] [78] 강원도 통천 일대에 집성촌이 있다고는 하나 1980년대에 편찬된 소부감판사공파 족보에 감찰공파 종원들이 수록되지 않았으므로 남계 후손은 존재하지 않거나 매우 극소수일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로 이덕림의 장증손인 이계장이 문강공 이석형의 차남인 진사 이호에게 입양 갔기 때문에 감찰공파 소속은 아니지만 이덕림의 핏줄은 아직까지 이어진다. 이계장의 후손들은 중추공 인춘공파, 별좌공 봉춘공파, 덕희공파, 덕록공파, 덕량공파, 진충공파, 효생공파로 분파되었다. [A] [80] 황해도 봉산 일대에 집성촌이 있다고 한다. [A] [82] 개성 평양, 중화군 등에 주로 거주한다. 평장사공파의 하위 지파로는 참판공파, 원언공파, 승사랑공파, 무공랑공파, 인향공파, 인과공파 등이 있다. 그러나 이 많은 파들 중 2000년대 초반에 진행한 평장사공파 계열의 족보 수록은 원언공파와 승사랑공파만이 수록되어 있다. 그 외의 파들의 인물은 1900년대 초반 출생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83] 조선조에 제일 번성한 파가 소부감판사공파라면 고려 때 제일 번성한 파는 물론 현존하는 4개 파들로만 규정했을 때 대장군공파이다. 또한 집성촌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대장군공파의 집성촌의 대부분이 이북이어서 현재 남한에 있는 대장군공파의 후손들은 한국 전쟁 때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많다. 파계 확인이 늦은 것도 이 때문일 수도 있다. 이처럼 파계 확인이 늦은 비슷한 예로는 소부감판사공파 중의 평장사공파가 있는데 평장사공파도 집성촌이 평양에 위치하고 있어서 현재 이남에 있는 평장사공파의 종원들은 대부분 그의 선조가 한국 전쟁 때 북에서 내려온 경우이다. [84]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이 집성촌이다. 또한 해주 이씨가 이 파에서 분관하였다. [85] 황해북도 수안군 도소면 옥검리가 집성촌이다. [86] 찬성사 이질을 파조로 하며, 집성촌은 함경남도 함흥 근방과 정평군 장원면 사수리 일대이다. 정평군 장원면 율천리의 명칭이 이질의 장남인 이흥양의 호 율천(栗川)에서 유래했다고 하며, 정평군 문산면 수천리의 명칭은 이질의 차남인 이중양의 호 수천(洙川)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파는 한 가지 신기한 점이 있는데 바로 대장군공파 족보에서 찬성공파 파조 이질이 영광군사공파 중시조인 지영광군사 이계연의 아들로 나와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연안 이씨 대장군공파 세보에선 찬성공파가 영광군사공파의 분파가 아닌 대장군공파의 분파로 나와있다. [87] 여담으로 연안 이씨 족보인 무진보(戊辰譜)에 따르면 이질의 장남인 이흥양의 처가 인천 이씨 수의교위 부사정 이실지(李實之)의 여식이라고 적혀있다. 그러나 당시 대장군공파 종중 회장은 ‘之’가 이름이 아니라 ‘~의’라는 조사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며, 이실지(李實之)의 딸이 아니라 이실(李實)의(之) 딸이라고 주장했다. 더불어 인천 이씨 족보엔 이실(李實)이나 이실지(李實之)에 대한 기록이 없고, 전주 이씨 족보에 영성대군의 삼남이자 호군을 지낸 밀릉군 이실(李實)이 나오므로 이흥양의 처의 본관을 전주로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88] 현감공파(숙형)와 감찰공파는 절손되었다. [89] 현존하지 않는 파들 중 그나마 가장 최근까지 존재했던 파로, 적어도 1900년대 초반까지는 남계 후손이 존재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남계 후손이 끊어진 것으로 보인다. [大] 이부시랑공파, 판도정랑공파, 영광군사공파는 대장군공파에서 분파하였다. [91] 이부시랑공파 중시조 이분양(李汾陽)은 금자광록대부 수태부 문하시중 익대공 김전의 장녀와 혼인하여 슬하에 아들 1명과 딸 2명(장녀는 상서 임성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상서 오전에게 출가했다. 오전에게 출가한 차녀는 딸 2명을 낳았고, 이들의 장녀는 합문지후 김효경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사공 왕씨에게 출가했다.)을 두었는데, 아들이 감찰시승을 지낸 이병이다. 감찰시승 이병은 2남 2녀를 두었고, 딸들은 각각 평강 채씨 삼중대광 도첨의중찬 양정공 채인규의 아들인 삼사사 채우와 장기 정씨 봉선대부 이부낭중 정구와 결혼하였는데, 평강 채씨와 장기 정씨 세보에 부인 이씨의 아버지는 감찰시승 장군 이병이고, 조부는 시랑 이분양, 증조는 대장군 이송이라고 나와있다. 이를 통해 이부시랑 이분양은 대장군 이송의 아들임이 확인된다. 현재 대장군공파 종원은 모두 이분양의 후손들인데, 이는 곧 남한에 현존하는 대장군공파 종원들이 모두 이부시랑공파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로 이부시랑 이분양을 중시조로 하는 이부시랑공파를 따로 기록했는지는 알 수 없다. [大] [大] [94] 현존해올 가능성이 있다. 영광군사공파라 주장하는 사람과 대화해 본 종원이 있다.(!) 당사자 주장으로는 따로 족보까지 발행해왔다고 한다. 이에 종원이 족보 앞면을 복사해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자 당사자가 이 말에 응했으나, 결국 생각을 바꾼 건지 보내지 않고 잠적했다 한다. 추정컨대 집안에서 반대한 것같다고. 관심 있는 사람은 연리 사이트에서 본문 검색어에 ‘추원보’를 검색해볼 것. 연안 이씨 추원보와 관련된 문서 상술했듯이 대장군공파 세보에 이질을 파조로 하는 찬성공파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찬성공파 파조 이질은 영광군사공파 중시조 이계연의 아들이기 때문에 대장군공파 중 찬성공파의 종원들이 영광군사공파라고 주장한 것일 수 있다. [95] 안산 이씨는 경기계와 철산계로 나뉘는데 경기계가 연안 이씨에서 분적한 것이고 철산계는 이희적(李希勣)을 시조로 하는 본관이다. 즉, 서로 다른 성씨이다. [96] 일명은 이원(李元)이다. [97] # [98]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해주로 자는 문욱(文郁), 호는 유춘(有春)·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이다. 벼슬은 현감을 지냈다. 산수, 인물, 영모, 포도 등 다방면에 걸쳐 재능을 발휘하여 김홍도와 쌍벽을 이룬 명수로 평가받기도 했다. 특히 산수화에서는 남종화와 북종화의 화법을 혼합하여 특유의 산수화풍을 이룩했다. [99] 덕수 이씨의 위인 중 한 사람인 율곡 이이의 맏형인 죽곡(竹谷) 이선(李璿)이 해주 이씨로 분적하였다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연안 이씨 대장군공파에서 분적한 것이다. [100] 해주 이씨가 가끔 자신이 어렸을 때 연안 이씨로 자주 들어와서 자신이 연안 이씨로 알고 있는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해주 이씨의 정보가 많이 없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시] 시조 세대란 시조부터 자신의 대까지를 말한다. 예를 들어 본인이 태자첨사공파 30세손이라면 중조 세대인 30 + 시조 세대인 15를 더해 시조 기준 45세손이라는 것이다. 이 시조 세대는 1958년 발행한 소부감판사공파의 종파인 전서공파 족보에 시조부터 추정 계대를 기록해 놓은 것이다. 이는 연안 이씨 항렬을 통일하기 위해 추정 계대를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데 종중에선 불분명한 기록을 인정하기 어려워 시조 세대로 세대를 보는 것을 금하고 중조 세대를 기준으로 세대를 보는 것을 권하고 있다. [世代] 시조를 1세로 하여 아래로 내려갈 경우에는 세(世)라 하고, 자신을 빼고 아버지를 1대로 하여 올라가며 계산하는 것을 대(代)라 한다. 즉 자신이 태자첨사공파 30세손(世孫)이라고 한다면 태자첨사공파 중시조 이습홍으로부터 29대손(代孫)이 된다는 것이다. [103] 태자첨사공파에선 23세 구(○九)자 항렬부터 거의 모든 파가 통합된 항렬을 사용한다. 23세 항렬을 보면 재령공파 계열과 현령공파 계열, 소윤공파 계열, 내의정공파 계열만 다른 항렬을 사용했는데, 이는 특별한 경우로 이러한 경우를 제외하면 23세부터 모든 파들이 통합된 항렬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단, 재령공파와 소윤공파의 경우 아직도 독립된 항렬을 사용한다. [현] 현령공파와 현령공파에서 분파한 지파에서만 사용하는 항렬이다. [내] 내의정공파와 내의정공파에서 분파한 지파에서만 사용한 항렬이다. [내] [내] [B] 항렬자 원리를 따라서 '재(載○)'자와 '성(成○)'자를 항렬로 쓰는 집안도 더러 존재한다. [장] 장령공파와 장령공파에서 분파한 지파에서만 사용하는 항렬이다. [110] 인명용 한자가 아니다. [C] 대장군공파에서 공개한 항렬자이다. 연안 이씨 종중에서 공개한 항렬과 대장군공파에서 공개한 항렬은 조금 다르므로 대장군공파가 아닌 이상 각 파 종중에서 직접 공개한 앞의 항렬자를 따르는 것을 추천한다. [C] [B] [B] [115] ‘범(○範)’자의 경우 진위공파에서도 사용하는 항렬이다. [시] [世代] [118] 소부감판사공파는 30세 '동(○東)', '근(○根)'자 항렬부터 각 파가 통합된 항렬을 사용한다. [C] [C] [C] [C] [C] [C] [125] 소부감판사공파 후 평장사공파는 파계 확인이 늦어 1980년대에 들어서 비로소 족보에 기록되었으므로 28세 이전 항렬을 각기 다르게 쓰는 집이 많다. 즉, 여기에 적힌 항렬 외에 다른 항렬도 존재한다는 말이다. [C] [C] [시] [世代] [130] 대장군공파도 소부감판사공파 중 평장사공파와 같이 파계 확인이 늦어 항렬을 각기 다르게 쓰는 집이 많다. [131] 찬성사 이질의 차남 이중양의 후손 [132] 찬성사 이질의 장남 이흥양의 후손 [시] [世代] [135] 당나라 황실 집안 성씨이다. [136] 중종 때 간행한 신증동국여지승람 김유신 소정방 그리고 이무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고려 말엽에 세워진 장군당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 즉, 연안 이씨 시조와 관련된 책자 기록은 이때가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137] 단, 조선 초중기에 작성한 묘지 비문에선 시조의 이름을 찾을 수 있는데, 그 예로 홍귀달이 지은 충간공 이숭원의 비문과 이정구가 지은 문강공 이석형의 비문 등이 있다. [138] 만약 연안 이씨 시조 이무가 당나라 황족이 확실하다면 공훈과 큰 관계없이 제후의 직위를 받았을 수도 있다. [139] 실제로 연안 이씨 종친회 임원 일부가 2013년 노자의 고향 중국 허난 성에서 열린 세계 이씨 종친대회에 참석했다. [140] 사실 당나라 초기 지배층이었던 이씨(李氏)는 모두 농서 이씨였다. 시조 이무가 당나라에서 왔다는 첫 기록은 1567년에 대제학 정사룡이 찬한 이국주의 묘지명이다. [141] 본래 판삼사사는 종1품 관직이었으나 공민왕 11년에 정1품 벼슬이 되었다. 이수산 공민왕 11년 이후에 판삼사사를 지냈으므로 정1품이었다. [142]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교수, 대한지리학회 회장 등을 역임한 지리학자이다. [143] 실제로 조선씨족통보에서는 이수산을 시조로 하는 수안 이씨와 이인(李仁)을 시조로 하는 또 다른 수안 이씨가 있다고 나와있다. 이인(李仁)은 고려사와 궁원록에서 이름 확인이 가능한데 궁원록에선 연안군 이엄, 전법판서 이방, 이인(李仁)의 처부(妻父) 이적(李適) 등 다른 연리 인물과 함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144] 현대에 대장군공파 중의 공량공파가 이수산을 파조로 삼는 것을 보아 후손들이 다시 본관을 연안으로 바꾸었거나 안산 이씨 경기계와 태자첨사공파 중의 수재공파처럼 후손 중 일부만 분적했을 수 있다. [145] 연안 이씨 추원보에는 이무의 묘가 강원특별자치도 이천군에 있다고 한다. [146] 여담으로 국립대전현충원 내에는 이귀의 차남인 사우당 이시담의 묘도 존재하는데, 이시담의 묘 역시 이장을 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연안 이씨 문중에서 이시담은 인조 즉위에 공헌하여 어지러운 정사를 바로잡는데 기여했다고 진정을 요청하였고, 박정희의 묘소 존치 재가가 떨어져 사우당 이시담의 묘 역시 보존할 수 있었다. [추원보] 연안 이씨 추원보에 기록된 내용으로 추원보는 무엇을 근거로 작성했는지 자료가 부족하고, 다른 가문의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 연안 이씨 가문의 세계를 바탕으로 작성한 내용이 있기에 너무 신뢰하지 말고 참고만 하길 바란다. 특히 발해에서 장수를 지냈다는 남북국 시대의 인물들의 기록은 정말 참고만 하길 바란다. 추원보에 대한 고찰 1, 추원보에 대한 고찰 2 [추원보] [추원보] [150] 이를 대용하기 위해 이북 지방에서 살던 종원들이 갖고 있던 자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추원보가 존재하나 추원보를 고증할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하고, 당시 인쇄술이 부족한 탓인지 시중에 많이 배포되지 않았으며, 생몰년도 등 몇 가지의 오류 때문에 참고 문헌 정도로만 사용되는 실정이다. 연안 이씨 추원보에 대한 고찰 [151] 동주 토산현 출신으로 소리(小吏)라는 말단 관리 출신인 것을 보아 이 지역 일대의 호족 출신으로 추정된다. 또한 목종 즉위 이후 고속 승진을 한 것을 보아 목종 즉위의 공신으로 추정된다. 이주헌은 감찰사헌과 내서사인, 서경유수, 상서좌복야 등을 거쳐 상서우복야로 죽었다. [152] 이공저의 부친은 봉어 이사상이고, 조부는 경(卿) 이휘?라고 한다. 이공저는 개성 출신으로 문종 6년에 태어나 인종 15년에 8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묘는 개성 고토성(지금의 황해도 금천군 우봉면)에 있고 평상시에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인종 16년에 돌에 해서(楷書)로 새긴 『이공저묘지명(李公著墓誌銘)』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추원보] [추원보] [155] 이제선의 자는 자연(子衍)으로 성종 때 용호위상장군을 지냈다. 이제선은 거란의 2차 침략 때 공을 세워 정국공신에 봉해졌다. [추원보] [157] 경주 이씨 이인정(李仁挺)은 충렬왕 때 활동했던 인물이다. [추원보] [159] 泌은 필 또는 비로 발음한다. 여담으로 이경필은 진사로서 과거시험을 봤는데, 과거시험의 문체 양식에 맞지 않게 답안을 작성했음에도 장원으로 급제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지공거였던 김양감과 손관이 현명하지 못하다며 비난을 들었다. [추원보] [161] 추원보에는 이습홍이 이욱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이욱과 이습홍 사이의 세계를 정확히 상고할 수 없기에 그 사이를 생략하여 이습홍을 이욱의 아들로 적어놓은 것이라 봐야 한다. [추원보] [추원보] [164] 일부 족보엔 그가 벽상삼한삼중공신 수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추원보] [166] 混은 혼 또는 곤으로 발음한다. [167] 청주 한씨 족보에 의하면 한사기의 처 연안 이씨의 조부는 대장군 이송이고, 증조부는 연안군 이엄이라고 한다. [168] 경상북도 성주군이 아니라 평안남도 성천군이다. [169] 오원은 현재 연안군의 별칭이다. [170] 지금의 완주군 고산면 [171] 三司左使. 삼사의 정3품 관직. 1356년에 혁파되었다가 1362년에 재설치되면서 정2품으로 승격되었다. [172] 判司宰寺事. 사재시의 정3품 판사. 사재시는 해산물을 조달하던 관서이다. 1342년 정도전이 짓고 1386년 세워진 사나사 원증국사 석종비(舍那寺圓證國師石鐘碑)에 관직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 [173] 이에 태자첨사공파 선조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서 동양 최대 규모에 준하는 연화사(물론 연화사보다 규모가 큰 사당이 존재하나 개인 집단이 만든 사당으로는 매우 큰 규모인 것은 확실하다.) 철거 문제 등과 관련하여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해당 관련 영상 해당 관련 기사 [174] 가선대부 궁내부특진관을 지냈다고 하며, 성균관 명륜당 옆 99칸의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175]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면 처음엔 종6품 관직에 제수된다. 그러나 이석형은 조선에서 유일하게 정6품에 제수되는 특별한 혜택을 받았다. [176] 이 때 부르던 삼장원가의 가사가 전해진다. 다음은 삼장원사의 가사이다.
< 삼장원사 (三壯元詞) >
三壯元詞九天上 (삼장원을 치하하는 구천에서 위에서)
三壯元臣拜稽首 (삼장원한 신하 머리 숙여 절을 올리네)
臣名九皐風徹響 (구고에 떨친 신하의 명성 바람타고 사무치는데)
臣身一毛不自有 (신의 몸은 털끝 하나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네)
王曰來汝文章骨 (임금께서 이르시네 옳아! 그대, 타고난 문장이로다.)
設我竹아래邊豆崇我酒 (내 그대 위해 변두를 차리고 술을 가득 채웠노라)
居然敎坊新門안祭出 (교방에서는 재빠르게 새곡조 만들어 내니)
宮娥信口歌以侑 (궁녀들 멋들어지게 노래하네)
歌聲淸切上蒼蒼 (청아한 노래소리 창창하게 들려오니)
紫皇廳之咨嗟久 (자황께서 들으시고 찬탄 마지 않으시네)
方丈蓬萊一時遍 (방장산과 봉래산을 일시에 두루 거닐은 듯)
五色雲間鸞鶴逗 (오색 구름 사이 사이 난학이 깃들인 듯)
瀏瀏瑞旭度仙掖 (맑고 밝은 상스러운 햇살 선액을 지나가고)
細細和風動宮柳 (솔솔 부는 온화한 바람 궁중 버드나무 흔드네)
天香桂樹長三枝 (천향풍기며 우뚝 자란 계수나무 긴 세 가지는)
月裏精神恩雨後 (달 속에 은우내려 맑은 정기 받았다네)
玉壺瓊漿十分醉 (옥호와 경장으로 맘껏 취하고는)
晩下門안昌門扶左右 (늦어서여 좌우 부축받고 창문 내려오네)
君知筆力參造化 (임금께서 조화를 부리는 듯한 필력을 알아보고)
嗟爾小兒八叉手 (어린 나이에 능란했던 팔차수에 매우 감동하였네)
[177] 의원정심규제(醫員正心規制)는 다섯 가지 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다음은 그 내용이다.
一 醫者 不殆硏究 深思熟考 勿爲失數之至 (첫째, 의원은 의술의 갈고 닦음을 꾸준히 한다. 심사숙고하여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二 醫員 夫患者 何條件貧富高下 莫論 無次別待遇 診療最善 誠實爲主 (둘째, 의원은 환자의 조건이나 빈부고하를 차별하지 않는다. 진료에 정성과 최선을 다한다.)
三 醫術 仁術也 慈惠濟象 非商道 勿把蓄財之道 (셋째, 의술은 인술이다. 은혜로 베풀며 축재의 상술로 삼지 않는다.)
四 醫道 正直診療中 病原因愆過 秘密保障 一切他方 不許發說 (​넷째, 의사의 길은 정직함이다. 진료를 통해 안 병과 환자의 부끄러운 내용을 발설하지 않는다.)
五 醫學者 世間之尊敬人 恒時 以聖心對人 不爲驕慢 治療憑藉 不許他方利用 (다섯째, 의사는 세상 사람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 누구에게나 정성으로 대하고 교만하지 않는다. 치료를 빙자하여 다른 이익을 취하지 않는다.)
[178] 이 때의 일화가 선조수정실록에 전해지는데, 이후백은 이조판서 시절에 힘써 공론을 숭상하고 어떤 청탁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리 친구라도 자주 와서 안부를 살피면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루는 친척이 찾아와서 벼슬을 부탁하자 이후백은 낯빛이 변하면서 작은 책자 하나를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앞으로 관직에 제수할 사람들 명단이었다. 그 명단엔 친척의 이름도 그 속에 기록되어 있었다. 이후백이 말하기를, “내가 여기에 기록한 것은 장차 천거하기 위함이었소. 그런데 지금 족친께서 벼슬을 구하는 말을 하고 있으니, 청탁한 이가 벼슬을 얻게 된다면 이는 공정한 도리가 아닐 것이요. 참으로 애석하구려. 그대가 말을 하지 않았다면 벼슬을 얻었을 것인데.”하였다. 그 친척은 매우 부끄러워하면서 물러갔다고 한다. 이후백은 사람을 뽑아 임용할 때는 반드시 합당한지 여부를 두루 물어 보았고, 만약 잘못 등용한 사람이 있으면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내가 나라 일을 그르쳤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575년부터 조정이 동인 서인으로 분당하였음에도 이후백의 공정한 인사는 시비를 걸 사람이 없었다. <연려실기술>에 나오기를 동인인 김효원은 그가 서인 심의겸과 친하다고 하여 “후백은 다만 판서의 재목일 뿐이다. 만약 정승이 되기에 이른다면 내가 꼭 논핵할 것이다.”하였으나, 이후백은 나이가 어린 신진 관료들도 싫어하지 않아 정승 물망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호조판서를 마지막으로 죽었으니 애석한 일이라고 전한다. [179] 그러나 많은 사전이나 문서에선 양관 대제학을 지냈다고 나와있다. 이를 보아 후에 이후백이 정말 양관 대제학을 역임했거나(정말 역임했다고 가정하면 연안 이씨 대제학(대학사 포함) 역임자는 총 9명이다) 추증된 관직을 생전에 역임했다고 오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180]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干戈誰着老萊衣 (전쟁에 누가 노래자의 색동옷을 입을 수 있겠는가?)
萬事人間意漸微 (만사 인간의 뜻이 점점 희미해져가네.)
地勢已從蘭子盡 (지세는 이미 난자도로부터 끝났고,)
行人不見漢陽歸 (행인은 서울로 돌아가는 이 보이질 않네.)
天心錯莫臨江水 (임금께선 암담하게 압록강을 굽어보고,)
廟算凄凉對夕暉 (묘당의 계책은 처량하게 석양을 바라볼 뿐.)
聞道南兵近乘勝 (남도의 관군이 요즘 승기를 탔다고 들리던데,)
幾時三捷復王畿 (언제나 전승하여 서울을 수복하려나.)
[181] 이 때 적은 시가 전해진다. 다음은 시의 내용이다.
東海茫茫萬里長 將軍何事自沈忙 (만리 떨어진 망망한 동해 물결 위에 어찌하여 장군은 스스로 뛰어 드시는고)
殺身己快葬魚腹 埋骨無勞願首陽 (내 몸 흔쾌히 던저 어복에 장사 지냄이여 뼈 묻는 수고 없이 만고충절 지켰구려.)
七里灘解千古咽 九嵐山色百年荒 (예날 신라 박제상을 기리는 망부석아 오늘도 안타까히 허망하게 기다린 백년)
君間漢代李都衛 國士心甘拜大羊 (한나라 이릉장군 생각마저 돋는구려 바다를 향해 삼가 허리 굽혀 절하노라)
[182] 수레로 시신을 조각내는 것을 말한다. [183] 이혼(李混)의 경우 아들 이만식(李萬軾)이 후에 소원(訴冤)하여 그 죄는 풀렸다. [184] 이렴(李濂)은 이인좌의 난에 가담하여 노적된 이만구(李萬衢)의 숙부이기도 하다. [185] 후에 이만인(李萬寅)을 포함한 이렴(李濂)의 세 아들은 모두 교살되었다고 한다. [186] 형 이유는 정승은 하지 못하고, 이조판서와 병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재주와 능력은 있었으나 성품이 부박(浮薄)하고 사휼(詐譎)한데다 무식하여 사리에 어긋난 일이 많았고, 임금에게 아첨을 잘해 최고의 총우(寵遇)를 받았다는 등 평판이 매우 안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풍원군 조현명은 그의 죽음을 듣고서는 통곡하며 말하기를 "나라를 위해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이 죽었다."라고 하였다. [187] 후술하겠지만 이지서는 괘서를 작성하여 붙인 탓에 모진 고문을 당했고, 고문 끝에 물고(物故)를 당하였다. 또한 이지서에겐 장남 승연, 차남 항연 등 아들 6명이 있었는데, 괘서를 쓴 차남 항연은 섬으로 유배되었다.(참고로 연안 이씨 족보엔 이지서의 아들로 승연과 경연만 기록되어 있으며, 차남 항연과 다른 아들들은 기록되지 않았다. 이승연의 장손 이우홍은 후손에 대한 기록이 없고, 이승연의 차남 이민덕은 이지서의 동생 이지절의 차남 이복연에게 양자를 갔고, 그 후손이 아직까지 존재한다. 이지서의 또 다른 아들 이경연은 슬하에 서자 이현덕을 두었지만, 이현덕의 후손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이지서의 종친인 이만춘(李萬春) 역시 이인좌의 난과 관련된 조덕규의 처남으로 지목되어 고문을 당했다. 이만춘(李萬春)의 아들 이지경(李之景)(연안 이씨 족보에 의하면 이만춘(李萬春)은 5명의 아들을 두었고 다섯 아들 모두 지(之)자와 일(日)자를 부수로 하는 한자를 돌림자로 사용했다. 그러나 5명의 아들 중 이지경(李之景)이라는 이름은 찾을 수 없다. 이에 이지경(李之景)은 연안 이씨 족보에 기록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변방에 유배되었다. 실록을 보면 이인좌의 난의 역적 이지경(李之暻)을 극형에 처하고, 그 처자도 연좌시켜 노비로 삼으며, 재산은 몰수하였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지경(李之暻)은 이지경(李之景)의 다른 이름이거나 이지경(李之景)의 일족일 수도 있다. 더불어 실록을 보면 이지간(李之榦)은 역적 민관효와 친하다는 이유 등으로 이만춘(李萬春)과 같이 유배되었다고 나오는데, 이지간(李之榦) 역시 이들의 일족일 수도 있다. [188] 이지시는 이성징의 손자였다. 이로 인해 친척인 이만근(李萬根)과 이만춘(李萬春)이 고문을 당했으며, 진잠현감 이만동(李萬東) 역시 이들의 일파로 몰려 곤장을 맞고 죽었다. 이에 이만동(李萬東)의 부인 우계임과 아들 태연, 두 딸 미순·종순은 경상도 단성의 관노와 관비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우계임의 나이는 41살이었으며, 아들 태연(泰延)은 13살, 두 딸 미순(美順)·종순(終順)은 각각 8살, 5살의 어린 나이였으며 단성 호적에는 이들은 30년이 넘도록 유배지를 떠나지 못하고 단성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아들 태연과 두 딸은 연안 이씨 족보에서 사라지는 불운을 겪었다고 한다. 연안 이씨 족보를 보면 이만동(李萬東)의 아들 이지현(이태연(李泰延)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이는 이태연(李泰延)이 이만동(李萬東)의 아들이라고 상술했던 내용과는 다른데, 자세한 내용은 후술한다.)은 이조연을 양자로 삼았으나 이조연이 자식을 두지 못해서 절손된 것으로 나온다. 참고로 이 이야기에는 한 가지 오류가 있는데 이만동(李萬東)의 아들은 연(延)자 돌림이 아니라 지(之)자 돌림으로 족보에 이만동(李萬東)은 아들 이지현을 둔 것으로 나온다. 따라서 연(延)자 돌림은 이만동(李萬東)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뻘 항렬이다. [189] 이익운은 아들 이명호를 양평에서 장사를 지냈는데, 이익운은 유언으로 천주교를 믿지 말고, 이명호의 곁에 묻어 달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이명호의 절명 뒤, 이익운은 중형 이승운의 셋째 아들인 이명건을 자신의 둘째 아들로 양자 들여 흔치 않게 아들 둘을 양자로 들이게 되었다. 또 이명건의 큰아들인 이원식을 이명호의 아들로 삼아 이명호의 가계는 긴 정성의 뒤에야 비로소 여느 집과 같은 안정된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한국학자료센터를 보면 이원식은 이명발의 아들로 나온다. 즉 후술할 이명불과 이명호, 이명발 모두 동일 인물일 수도 있다. [190] 이 기록에서의 이명불의 이야기는 이명호의 이야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191] 이것은 이가우가 한성판윤을 9번 역임하는 중에도 판의금부사, 이조·예조·병조·형조 판서, 대사헌, 관찰사 등을 두루 거쳤기 때문이다. [192] 중간에 한성부윤으로 있던 이서(李墅)와 윤자(尹慈)의 재임기간이 불분명하기에 이석형의 재임기간을 정확히 단정지을 수는 없다. 정확한 임기를 알 수 없는 이서와 윤자의 재임기간을 1일로 가정했을 때 최장 8년 5개월에 이를 수 있다. [193] 실록에서는 당시 명칭에 따라 '판한성부사' 또는 '한성부윤'으로 기록되어 있다. [194] 부산광역시 기장군에 있는 어사암이 이때 유래되었다. 어사암은 1894년에 기장현에 있는 해창에서 양곡을 가득 실은 조운선이 부산포로 가다 이곳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침몰하는데 흉년으로 굶주리던 어촌 주민들은 잠수질하여 바다 밑에 흩어져 있던 곡식을 건져서 먹는다. 그러나 이 일이 현감에게 알려지며 주민들은 모두 절도 혐의로 기장 관아에 구금되고, 마을 집집을 수색하여 곡식을 모두 거둬 갔으며, 옥에 갇힌 주민은 가혹 행위로 죽기까지 했다. 이 일이 고종의 귀까지 들리자 이도재를 어사로 파견하여 볏섬 도난 사건과 고문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도록 했다. 어사가 온다는 소식을 접한 어촌 주민들은 기장 관기 월매로 하여금 자신들의 어려운 사정을 얘기하고, 관아에서 가혹 행위로 도난 물량이 많은 것처럼 허위로 꾸며 주민들의 재산을 수탈하려 했다고 말하게 했다. 이에 월매는 어사가 현장을 조사하기 위해 매 바위를 찾을 때 월매도 동행하여 춤과 노래를 선보였고, 어사는 흥에 겨워 ‘천공경무물(天空更無物) 해활난위시(海闊難爲詩) 환구구만리(環球九萬里) 일위가항지(一葦可航之)’(하늘은 비어서 다시 형상하기 어렵고, 바다는 넓어서 시를 짓기 어렵네. 세상 구만리에, 한 조각 갈대배로 항해해 갈 뿐이라네)라는 시를 매 바위에 새겨 넣어 결국 이도재의 현명한 선택으로 절도 죄가 성립되지 않아 주민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이에 고마움을 느낀 주민들은 1883년 생사단을 세워 비석에 시를 짓고, 이도재의 생일마다 축원을 올렸다고 전해진다. 당시 비석에 적은 시는 아직까지도 비석에 적혀 있어 당시 어민들이 이도재에게 느꼈던 무한한 고마움을 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은 ‘우리 고을에 왜 이리도 늦게 오셨나, 그래도 하늘은 기필코 도우시네, 수 많은 폐단들을 모두 바로 잡으시니, 천추에 영원토록 기리오리다.’ 이다. [195] 전라감사 재직 당시 섬사람들의 여러 고충을 해소시키기 위해 강진, 해남, 영암으로 흩어져 있던 섬들을 묶어서 섬사람들 공동체인 완도군을 신설하기도 했다. 이에 사람들이 이도재에 대한 고마움에 영세불망비를 고금도에 세웠다. [196] 이때 처음 칙임관 1등에 서임되었다. [197] 이 글을 보아 다행히 후대가 끊기지 않고 이어진 것 같다. [198] 택당 이식과는 동명이인이며, 정국공신 이곤의 후손이다. [199] 지금은 완주군 용진읍과 삼례읍으로 각각 편입됐다. [200] 1919년 3월 17일 완주군 초포면 3·1 운동이 일어난 곳이다. [201] 태자첨사공파 중의 진사공파의 집성촌이다. [202] 남포시 용강군 [203] 여담으로 그와 그의 어머니는 대한민국 첫 모자 국회의원이다. [204] 신천 강씨 족보에 강인은 보육의 손자로 기록되어 있으나, 보육 신라 때 인물이고, 강인은 고려 후기의 인물이므로 강인은 보육의 손자가 아니라 후손으로 봐야할 것이다. [205] 전법판서 이방은 광산 김씨 족보 등 사료에 의하면 전법판서 외에 사헌부감찰을 지냈고, 연리세보(延李世譜)에 7세로 나온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기 상으로 보아 시조부터 7세가 아닌 어떤 파를 기준으로 7세손으로 기록된 거 같다. 그러나 이방이 어떤 파에서 분파한 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연안 이씨 추원보에 의하면 이방의 6대조는 정국공신 이제선이다. 이에 추원보의 내용이 맞는다면 이제선을 파조로 하는 지파가 있었을 것이다. 즉 과거 연안 이씨 족보 제작 당시에도 연안 이씨 종중에서 모르는 파와 세계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 기록이 확실한지에 대해선 의문점이 있다. 만약 기록이 확실하다고 해도 이방의 처 해주 오씨 해주 오씨의 시조 오인유의 7세손이었으므로 7세손이라고 기록한 것이 이방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점도 있다. [206] 현재까지 밝혀진 밀직부사 이득량의 딸은 두 명인데, 한 명은 앞서 서술한 홍승연 처 연안 이씨고, 나머지 한 명은 박회의 처 연안 이씨다. [207] 참고로 이수창의 장녀는 영천 이씨 보문각제학 이석지에게 출가했다. [208] 현재 상산 김씨 족보에 김균의 부인은 황씨만 기록되어 있고, 이씨는 누락되어 있다. [209] 이계손(係孫)의 현손이다. [210] 단, 묘비명에선 이숭원의 조상 이무(茂)가 단양 이씨 단산부원군 이무로 혼동되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당시 계대를 잃어버린 탓에 발생한 문제로 추측된다. [211] 상술한 도첨의찬성사 이무(茂)와 이해의 조상인 밀직부사 이무(茂)가 동일 인물이라면 예부상서공파와 통례문부사공파는 같은 집안 출신일 가능성이 있다. [212] 이삼산은 삼언(三彦), 삼산(三山)의 다른 이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삼산은 단종 2년 정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직제학을 지냈다. # 그러나 현재 실존하는 파에선 파계를 고증할 수 없으므로 미확인 6개 파 중의 인물이거나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은 파의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213] 당시 임금은 숙종이었다. [214] 이는 5년 뒤에 일어나는 신미양요의 주된 원인이다. [215] 철인왕후의 생모는 민무현의 딸 흥양부부인 민씨이다. 본래 김문근은 효간공 이용수의 딸 연양부부인 이씨와 결혼하였으나 연양부부인 이씨가 본인 소생의 자녀 없이 26세의 나이로 일찍 죽자 흥양부부인 민씨와 재혼하여 철인왕후를 낳은 것이다. 즉 연양부부인 이씨는 철인왕후의 친모가 아니라 재취(再娶)의 자식이 그 아버지의 전처를 이르는 말인 전모(前母)이다. [216] 근거 자료 [217] 조선조에서 조금 과장하자면 환갑잔치할 확률은 20%라고 하며, 조선 왕의 평균 수명은 46.1세였으며 서민들의 평균 수명은 35세 혹은 그 이하라고 한다. 그러나 연안 이씨 인물들은 대부분 장수했는데 고려 인종 대에 태어난 소부감판사공파 중시조인 이현려도 희종 2년 까지 살아 81세에 사망했고 조선 초 검교좌의정을 지낸 좌의정치사 이귀령은 무려 94세 때 사망했다. 비록 명예직이긴 했지만 이귀령은 조선에서 정승 직함을 달았던 사람 중 제일 오래 살았던 인물이다. 이 외에도 많은 인물이 대부분이 7~80대까지 살았으며 조선 시대 70대를 넘긴 종2품 당상관들만 들어갈 수 있는 기로소에 들어간 인물이 21명을 기록하여 전체 가문 중 2위라는 매우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218] 불당골 안에는 태자첨사공파 2세부터 5세까지 위패를 모신 사당인 연화사(延和祠)와 연화사(延華祠)가 있었으나 주차장을 만들기 위해 모두 철거됐다. 또한 불당골은 모든 풍수가들이 불당골이 명당 중 명당이라고 명당의 표본으로 삼고 있다. [219] 이현려는 현재 영정도 전해진다. # [220]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 외할아버지 [221] 생원과, 진사과, 식년문과 [222] 교지와 교지함, 시호족자 등 6점의 유물이다. [223] 참고문헌 [224] 손가락을 잘라 피를 넣어드리는 행위 [225] 마찬가지로 동호리 이씨 고가도 연안 이씨의 고택이다. 동호 이지유의 손자 이진악이 조부의 호를 따서 고택을 지은 것이다. 또한 동호리 지명 자체가 이지유의 호에서 유래된 것이다. [226] 출처:동아일보 젊은 그들 106화 [227] 강원특별자치도 [228] 전북특별자치도 [229] 참고로 북한에서는 이라는 행정구역을 쓰지 않는다. 또한 대한민국의 법률상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북한에 위치한 지역의 이름을 대한민국 이북5도위원회가 규정한 행정구역을 따로 사용하고 있다. 아래의 명칭은 북한 땅에 있는 대한민국 이북5도위원회가 규정한 행정구역의 명칭이다. 또한 이 행정구역은 이름이 같은 북한 당국이 관할하는 행정구역과 면적의 차이도 큰데, 일부 문서에서 행정구역 이름만 같고 관할구역이 다른 북한의 행정구역을 대입하는 오류가 종종 있다. [230] 개풍 개성에선 소부감판사공파 중 생원공파 계열과 태자첨사공파 중 소윤공파, 재령공파 계열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황해도에선 대장군공파와 태자첨사공파, 소부감판사공파 계열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미수복 강원도 쪽에선 소부감판사공파 계열의 후손이 세거하고, 평양을 비롯해 평안도 쪽에선 대장군공파와 소부감판사공파 중 평장사공파 계열이 세거하고, 함경남도 쪽에선 대장군공파와 태자첨사공파 중 강호공파( 조선 초 좌의정을 지냈던 이귀령의 후손들로 태자첨사공파 중 별제공파, 금성공파, 이천공파, 소윤공파가 속한다.) 계열의 후손들이 세거한다. [231] 단, 대종회에서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운영하는 홈페이지다. [232] 태자첨사공파 중 의정공파는 전공판서 이원발을 파조로 하는 파이다. 현재 태자첨사공파 종원은 모두 이원발의 후손이므로 태자첨사공파 카페라고 봐도 무방하다. [233] 이 카페의 경우 연안 이씨 관련 누리집 중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으나, 카페 관리자의 작고로 신규 회원의 카페 활동이 불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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