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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08 14:31:43

한스 바이스베그너

제2차 세계 대전 전투기 에이스 일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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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56b94> ▲ 21~30위
순위 이름 국적 격추 수 주 기종 비고
31위 하인리히 슈투름 독일 158대
32위 게르하르트 튀벤 독일 157대
33위 한스 바이스베그너 독일 152대
페터 뒤트만 독일
35위 고르돈 골로프 독일 150대
36위 프리츠 텍트마이어 독일 146대
37위 알빈 볼프 독일 144대
38위 쿠르트 탄처 독일 143대
39위 프리드리히-카를 뮐러 독일 140대
40위 카를 그라츠 독일 138대
하인리히 제츠 독일
루돌프 트렝켈 독일
43위 프란츠 샬 독일 137대
발터 볼프룸 독일
45위 호르스트-귄터 폰 파송 독일 136대
오토 푀네콜트 독일
카를-하인츠 베버 독일
48위 요아힘 뮌헤베르크 독일 135대
49위 한스 발트만 독일 134대
50위 알프레트 그리슬랍스키 독일 133대
요하네스 비제 독일
▼ 52~66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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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바이스벵어(Hans Beißwenger : 1916. 11. 8~1943. 3. 6)

1. 서훈

2급 철십자 훈장 (1941. 5. 6)
1급 철십자 훈장 (1941. 8. 16)
공군 명예컵 (1941. 8. 9)
공군 전선비행 금장 (1941. 8. 20)
독일 황금십자장 (1941. 10. 17)
기사철십자 훈장 (1942. 5. 9)
곡엽기사철십자 훈장 (1942. 9. 30)

2. 입대까지

2차 대전 동안 통산 출격 500회를 거듭하면서 연합군기 152대를 격추시킨 엑스퍼트 에이스로 이름을 남긴 한스 바이스베그너는 1916년 11월 8일에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소도시 슈베비슈할(Schwäbisch Hall)에서 중학교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렇지만 학업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상급 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김나지움 자격증을 따고도 한동안 장래를 정하지 못하고 백수 생활을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청년 한스는 21살 생일을 며칠 앞둔 1937년 11월 2일에 독일 공군에 지원하여 처음으로 군문에 발을 들여놓았다.[1] 일반 사병으로 입대한 탓에 괴핑겐에 주둔하고 있던 제25고사포 연대에 배속된 바이스베그너 이등병은 그곳에서 기초 군사 훈련을 받았다. 당시 비밀리에 전쟁 준비를 하고 있던 독일 공군은 부족한 조종사 인력 충원을 위해 지원자를 받는 제도 외에도 일반 사병 중에서 자질이 돋보이는 인력을 뽑아 조종 교육을 시키는 경우가 있었는데, 여기에 선발된 그는 1938년 4월 1일에 슐라이스하임(Schleißheim)에 있는 제2전투비행학교(Jagdfliegerschule)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조종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나치 독일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을 때 바이스벵어는 중사 계급에 꽤 짬밥을 먹은 전투조종사가 되어 있었다. 1940년 10월에 그는 제54전투항공단 예하 제II비행단 소속 제6비행중대에 배속되었고, 11월 1일자로 소위로 승진했다.

3. 유럽 전선에서

황색 작전을 통해 서유럽을 거의 모두 점령한 나치 독일은 프랑스를 거점으로 삼고 JG 54는 바다사자 작전의 사전 준비로 영국 본토 공습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그때까지 파죽지세로 연전연승을 거듭하던 루프트바페는 완강한 영국 공군을 맞아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었다. 바이스베그너가 JG 54에 착임했을 때는 눈에 띄게 줄어든 조종사를 보충하기 위해 부대를 재편하던 시기에 해당한다. 그가 배속된 시점에서 이미 제I비행단은 프랑스를 떠나 독일로 돌아가 예버에서 정비하고 있었고, 그가 속한 제II비행단 역시 12월 3일에 델멘호르스트로 후퇴했다. 해가 바뀐 1941년 3월 29일에 항공단 본부중대와 제II비행단과 제III비행단은 유고슬라비아 침공 준비를 위해 오스트리아로 이동을 명받았다. 유고슬라비아 침공이 시작되자 4월 7일에 바이스베그너는 유고 공군의 호커 허리케인를 격추시켜 자신의 첫 전과를 올렸다. 발칸 전역이 한창이던 5월 6일에 그는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4. 독소전

독일이 불가침 조약을 무시하고 소련을 침공하자 정예부대인 제54전투항공단도 선두로 참전하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바이스벵어 소위는 덜 떨어진 소련 공군기들을 상대하면서 사냥꾼 기질을 익히고 그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했다. 7월 17일에 그는 최전선에서 대공포에 피격되어 불시착했지만, 다행히 운좋게도 근처의 지상군에게 픽업되어 멀쩡한 상태로 기지로 돌아왔다. 8월 24일에 그가 잡아낸 I-16은 그에게 있어 20번째 제물이었고, 1941년이 저물 때까지 그의 스코어는 32대로 불어났다. 1942년 4월 6일에는 1급 철십자훈장에 해당되는 40대를 넘겼고, 5월 8일에는 50대를 넘겨 5월 9일에는 공군 중장 헬무트 푀르스터(Helmuth Förster : 1889~1965)가 또다른 에이스 호르스트 하닝 소위와 바이스베그너의 목에 직접 기사 철십자훈장을 걸어주었다. 한스 바이스베그너는 8월 11일에 제6비행중대장으로 임명되어 소위 계급장을 단 지휘관이 되었다.

소위든 중위든 간에 독일 공군에서 지휘관이 된다는 것은 더 많은 격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항공단에서 중대장이건 비행대장이건 편대를 이끄는 최선임자는 가장 높은 고도를 차지하고 우선 공격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바이스베그너 소위는 그 후로도 격추수를 계속 늘려 1942년 8월 15일에 75대째 적기를 격파하는가 하면, 8월 23일는 하루에 적기 5대를 잡아내 일일 에이스가 되었다. 이날 그는 3차례 출격했었는데, 첫 출격에서 5대를 줄줄이 격추시켜 버리는 실력을 선보였다. 9월 26일에 한스 바이스베그너 소위는 마침내 대망의 100대 격파를 달성했다. 첫 격추에 성공해 기뻐 날뛰던 소위가 겨우 1년 반만에 독일 공군을 통틀어 25번째 센트리 에이스가 된 것이다. 그륀 헤르츠의 쟁쟁한 에이스 중에서도 빛나는 무공을 인정받은 그는 9월 30일에 제130호 곡엽기사철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1942년 9월 4일, 바이스베그너의 직속 상관인 비행단장 디트리히 흐라박 대위는 진급 추천서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포함시켰다.
"키 크고 늘씬한 체격을 갖춰 운동선수로도 아주 좋은 소질이 보인다. 솔직하고 성실한 성격을 지녔으면서도 결단력이 있고 같은 또래의 부대원에 비해 성숙하다. 일반 상식도 충분해 사관학교 출신의 생도에 비해서도 뒤지지 않는 교양을 갖췄으며, 필요할 때만 분명히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태도를 보인다. 군인으로서의 개성과 자신감은 충분하다. 항공병으로서의 재능은 매우 뛰어나고 전투기 조종사로서도 나무랄 데가 없다. 449회 출격에 97기를 격추시킨 전공은 그가 가진 대담성에 의지한 것이다. 편대장으로서도 뛰어난 판단력과 탁월한 지도 능력을 발휘하고 있어서 다른 파일럿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얻고 있다. 그의 부하들은 중대장을 믿음직한 전우로도 여기고 있지만 특히 사랑받는 상관이 된 것이 주목할 만하다. 사상적인 면에서도 완벽한 국가사회주의자임에는 아무런 의혹을 제기할 수 없다."

흐라박이 써준 추천서는 곧 승인이 떨어졌고 바이스베그너는 이제 중위가 되었다. 진급 휴가를 받은 그는 잠시 고국에 돌아가 짧은 휴식을 취한 후, 부대로 돌아와 전투 피해 복구를 지휘했다. 1942년 말까지 그의 격추수는 119대를 기록했다. 1942년 11월 9일 친위대 명예 하급돌격지도자[2]로 승진하기도 했다. 1943년이 되어도 그의 꾸준한 격추 페이스는 그대로 유지되어 1월 23일에 125번재 격추, 2월 11일에는 135대째의 격추를 기록했다. 그렇지만 이처럼 무적으로 여겨지던 한스 중위에게도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5. 엇갈리는 최후

1943년 3월 6일, 한스 바이스베그너 중위는 달랑 1개의 슈밤을 거느리고 Bf 109G-2 겔베 4(Werk Nr.14236)에 올라 일멘 호수의 남쪽을 향해 출격했지만 돌아오지 못했다. 당일 그가 이끈 편대는 일멘 남쪽에서 4대의 소련 공군기가 출현했다는 지원 요청을 받고 긴급 출격한 것이었고, 그 무렵 부쩍 전력이 보강된 소련 공군의 상황 탓에 자주 있는 일이었다. 바이스베그너의 슈밤은 현장에서 낮게 날던 LaGG-3 전투기를 공격해 그중에서 2대를 지면에 처박았지만, 저공에서 교전을 벌이느라 에너지를 잃은 독일 편대를 향해 상공에서 찍어누른 Yak-3 전투기에 피격당해 추락하고 말았다. 최근까지 그는 마지막으로 남긴 교신조차 없었던 것을 보면, 기습받을 때 조종석에 집중사격을 받고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3,500 m 고도로 날다가 작전 지역에 다다르자 눈 아래로 15대의 일류신 Il-2가 우군을 공격하기 위해 새카맣게 파리떼처럼 빙빙 돌고 있는 광경에 눈에 띄었지요. 그리고 그 위로는 상공 2,500 m 고도에서 소련 공군의 LaGG-3 전투기가 15대에서 20대 가량이 떼를 지어 엄호 비행을 하고 있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슈밤은 중대장 한스 중위님이 인솔하고 있었고 저는 오전 출격에서 LaGG-3 한 대를 잡은 후 기지에 예비 병력으로 남겨져 있다가 난데없이 긴급 출동이 떨어져 2번 로테를 이끌게 됐습니다. 중대장님은 엄호기가 너무 많아 슈투르모빅을 먼저 잡으려 했다간 우리가 되려 당할 수 있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우린 그 명령에 따라 LaGG 전투기를 향해 강하를 시작했지요. 그때가 오후 1시 48분이었습니다. 2번 로테의 선도기였던 내가 쏜 사격은 빗나갔지만, 한스 중위님은 순식간에 적기 하나를 불덩이로 만들고 두 번째 표적을 향해 날개를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내 조준기 앞으로 슈투르모빅 한놈이 뛰어들더군요. 볼 것도 없이 방아쇠를 길게 당겼고 그 적기는 파편을 흩날리다가 기상으로 곤두박질치더군요. 재차 이탈을 위해 상승하면서 편대를 다시 짜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중위님의 겔베 퓌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이스베그너 최후의 공중전에 함께 편대를 짜고 전투를 치룬 게오르크 문델로(Georg Munderloh / 20킬) 상병은 자신이 타고 있던 Bf 109에 기총탄이 박혀 엔진에서 냉각수가 새고 흰 연기가 치솟자 부근의 벌판에 긴급 착륙을 했고, 소련군에게 사로잡혀 포로가 되었다. 같은 전투를 기록한 소련 공군의 전투보고서에 따르면, 바이스베그너를 잡은 조종사는 제32친위전투기연대(32-й гв. иап)의 에이스 이반 M. 콜로도프(Иван Михайлович Холодов : 1915~1992 / 26킬) 상위가 거의 확실하다. 그런데 콜로도프가 냉전 시절 중장까지 진급하고 발간한 자서전에 따르면, 자신이 노린 나치 지휘관기는 피탄된 후 연기를 길게 끌면서 기수를 독일군 비행장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증언에 따르면 바이스베그너는 기습받을 때까지만 해도 생존해 있었지만 기체 고장으로 되돌아가다가 추락해 사망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1] 공군 입대전 슈츠슈타펠에서 잠시 복무했다. [2] 소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