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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16 13:12:28

프레드 오


1. 개요2. 출생부터 입대까지3. 조종사가 되다4. 첫 격추와 활약상의 시작5. 전역 이후의 삶6. 여담


파일:프레드 오옹 조종사시절.jpg
조종사 시절

파일:프레드 오옹.jpg
말년의 모습. 사진 하단에 있는 자신의 전용기 도색을 재현한 프라모델이 인상적이다.

1. 개요

프레드 오 (Fred. F Ohr,[1] 한국이름 오종구, 1919 7/19 ~ 2015 9/6)

한국계 미국인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한국계 미국인 출신 에이스 파일럿이다.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며,[2] 격추수 6기와 지상파괴 17기를 달성했다. 탑승기는 슈퍼마린 스핏파이어[3] P-51C/D[4]. 또한 아시아계로서는 최초로 미 육군에서 대대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파일:프레드오옹 전용기.jpg
그의 전용기 P-51D "Marie". 특유의 노란색 꼬리가 인상적이다.

2. 출생부터 입대까지

프레드 오는 1919년 7월 19일, 미국 오리건주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일제의 핍박을 받아 미국으로 이민온 재미교포 1세대였다. 그의 가족은 그가 어렸을 때 아이다호주로 이사했고,[5] 그는 쭉 거기서 자랐다.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5살때 처음 타본 비행기에 매료되어 조종사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미국에서 유색인종이었던 그가 조종사가 되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고, 여러번 포기하려고도 했으나 어머니가 "간절히 원하면 소원이 이뤄진다" 라고 말씀하셔서 계속해서 노력했고, 마침내 1938년 미 육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그는 꼭 조종사가 되기 위해 육군에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노력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유색인종이었던 관계로 그는 육군 조종학교 시험에서 번번히 물을 먹어야만 했다.

3. 조종사가 되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40년, 프레드 오는 상관의 눈에 띄었고, 드디어 육군 항공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6] 1942년, 프레드 오는 항공항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임관, 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던 영국 으로 발령받았다. 그는 거기서 북아프리카 전역이 벌어지고 있던 튀니지에 있는 한 비행장으로 파견되었으나, 1943년까지는 항공기를 조종하지 못하고 지상근무만을 해야 했다.

4. 첫 격추와 활약상의 시작

1943년, 그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전투기에 오를 수 있었다. 그의 첫 탑승기는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독일 공군의 Ju 88 한 기를 격추시켰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그는 활약상을 이어 나갔다. 프레드 오는 플로이에슈티 공습에 참전하였으며,[7] 북아프리카 전선의 종결 이후에는 이탈리아 전선으로 발령받았고, 그 다음에는 유럽 전선으로 가서 계속해서 싸워 나갔다. 이 과정에서 그는 총 155번 출격하여 6기의 적기를 격추했고, 17기를 지상파괴하는 전공을 세우며 한국계 미국인 최초로 에이스가 된다.[8] 그리고 이러한 활약 끝에, 1944년, 그는 마침내 미 육군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대대장을 역임하기까지 했다. 또한 그는 이 공로로 은성무공훈장 2회, 수훈비행십자훈장 2회, 동성무공훈장 1회, 공군 수훈장을 17회 수훈했다.

물론 이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는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부하들과 동료들에게 멸시받기도 하였고, 북아프리카에서는 정비불량으로 그의 스핏파이어가 적진 한가운데에 불시착한 일까지 있었다. 하지만 프레드 오는 꾸준히 노력하여 주변의 불신을 이겨냈고, 마침내 아시아계 최초로 대대장 역임이라는 기록을 세움과 동시에 각종 서훈을 받게 된다.

5. 전역 이후의 삶

그는 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944년, 소령 계급을 끝으로 전역하였으며, 전역 이후에는 학업을 지속해 나가 치과의사가 되었다. 그는 이후 시카고로 이주해 거기서 치과를 차린 다음 2005년까지 치과를 운영했다. 여담으로 치과 의사로도 성공했는데 시카고 한인들 사이에서는 그가 운영하는 치과가 제법 유명했다고 한다. 다만 이웃들이나 치과 단골들도 프레드 오가 에이스 파일럿이었다는 건 알지 못했다고. 이런 면으로 볼 때 자신의 공적을 마구 자랑하고 다니는 스타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술 된 중앙일보의 2014년 인터뷰 기사에 의하면 전쟁 중 살상 행위를 수행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며 살았다고 한다.

프레드 오는 은퇴 이후에도 각종 2차 세계대전 기념 행사에 자주 불려나갔다. 또한 개인적으로도 건강해서 무려 95세였던 2014년에 중앙일보와 인터뷰[9]를 하기도 했으나, 안타깝게도 2015년 9월 6일, 노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96세.

6. 여담

현재까지는 유일한 한국계 미국인 에이스 파일럿이다. 사실 에이스라는 것 자체가 현대전에서는 많이 희귀한 개념이 되었기에[10] 한동안 다른 한국계 미국인 에이스 파일럿이 나올 가능성은 낮을 것이다.

여담으로 그의 외삼촌 또한 B-17의 방어기총 사수로 참전했다가 전사하였다고 한다.
[1] Oh가 아닌 Ohr인 이유는 그의 어머니가 영어를 잘 몰라 잘못 출생신고서에 이름을 작성한 것이 자신의 이름으로 굳어진 것이라고 한다. [2]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북아프리카 전역, 이탈리아 전역, 그리고 서부전선에 참전했다. [3] 1기 격추. [4] 5기 격추. [5] 이 때문에 한동안 한국에서는 그가 아이다호에서 태어났다고 잘못 알려져 있었다. [6] 여기에는 전시인력부족도 한 몫 했다. [7] 여기서 그는 폭격기 호위를 맡았고, 3기의 적 요격기들과 교전, 1기를 격추시켰다. [8] 일반적으로 항공기 5기를 격추시키면 에이스로 분류된다. [9] https://www.joongang.co.kr/article/15703496 [10] 당장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항공기를 몇천 대씩 찍어냈고, 출격도 자주 있었기 때문에 에이스 되는건 상당히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으로 대당 항공기의 가격이 올라갔기 때문에 요즘에는 항공기를 아무리 많이 만들어도몇백 대 수준으로만 생산하는데다가, 항공기 하나하나를 격추시키기도 매우 어려워졌고, 2차 세계대전처럼 큰 전쟁도 벌어지지 않기 때문에 에이스가 나오기 어려운 것이다.